느림 밀란 쿤데라 전집 8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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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란하다, 상당히. 젠장. 대관절 뭘 말하고 싶은 거지. 나는 절망한다. ‘이 느림을 느리게’ 읽지 않으면 얼간이가 되겠는 걸, 하면서 말이지. 책이 명쾌하지 않으니 나도 명쾌하게 쓸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건, 음, 이건 ‘성이 호텔로’ 변신한 이야기로구나, 하는 것. 하나의 연극이 펼쳐지는 마룻바닥 위구나. 그리고 사랑 또한 변해버린 이야기. 아니, 사랑과 인간은 그대론가?「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내게 묻는 자가 없을 때는 아는 것 같다가도 막상 묻는 자가 있어서 그에게 설명하려 하면 나는 알 수가 없다.」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인 게지. 시간이란 놈은 좀처럼 알 수 없는 것이므로 T 부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느림과 한가로움 역시 나로서는 잘 입증이 되질 않는다. 느리게 행동하는 사람들. (어떤 의미에서든)쾌락을 좇는 사람들. 그럼 라캉의 말이 맞는 건가?「성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어떤 특정한 개인을 대상으로 해서 그 사람을 통해 성욕이 만족되면 모든 것을 얻을 것 같은 확신이 있는 것인지, 에로티즘은 생물학적 짝짓기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인지, 나는 (에라)모르겠다……. 망각은 행복과 자부심과 현재를 준다. 새로운 음식을 먹으려면 배변을 해야 하고 새로운 사건을 기억하려면 오래된 기억은 잊어야 한다. 느려지려면 빨라져야 하고, 빨라지려면 다시 느려져야 한다. 내가 알고 있는 A는 과거의 그 A가 아니고 텍스트 안의 T 부인은 18세기의 T 부인이 아니다(쿤데라는 틀림없이 독자를 조롱하고 읽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이것은 창 없는 모나드. 그럼에도 18세기든 20세기든 누구나 사람과 씨름하고 사랑과 씨름하고 속도와 씨름하고 망각과 씨름한다.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므로. 인물들은 18세기와 20세기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새로운 주체로 탈바꿈되었지만 자신의 욕망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아, 결국 새로운 관계가 탄생하면서 비로소 사후에 주체가 출현하는 거로구나 ― 새로운 욕망과 시간을 찾아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게 우리가 하는 일이다. 각각의 인간성과 시간성 때문에 우리는 몽상의 세계로 갈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조심성쯤이 될까. 느림과 빠름의 속도가 인간을 만나 맥놀이를 만들며 소용돌이 치고 있다. ……내가 너무 어렵게 돌아왔나(분명 쉽지 않은 일이지만 쉽지 않은 만큼 내 받아들임에도 문제가 되긴 한다)?

 

 

덧) 책은 일생의 대부분을 서서 보낸다. 쿤데라의 느림 강의도 뱅상의 자지처럼 언제나 서있겠지. 꼿꼿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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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라의 돼지
나카지마 라모 지음, 한희선 옮김 / 북스피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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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다라의 돼지』에서의 잃어버린 8년은 평범한 아이를 ‘바나나 키시투’로 변용케 했다(‘변용’이라니 굉장히 무심한 말이지만 어쨌거나 그렇다고 하자). ……시작은 거창해 보이는 말로 운을 떼었지만 돌이켜보면 참으로 많은 결점을 지닌 작품이다. 그런데 이렇게나 ‘풍부하고 우스꽝스러운’ 단점들을 품었음에도 나는 나카지마 라모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왜? 희한한 재미를 지니고 있으니까. 교고쿠 나쓰히코의 소설이 ‘이 세상에 이상한 일이란 없다’란 논의를 주장한다면『가다라의 돼지』는 정반대에 서있다(등장인물인 미스터 미러클은 별개로 하자). 한마디로 소설은 주술(呪術)로 시작해서 주술로 끝난다. 그러고 보니 ‘주(呪)’, 한자에 입[口]이 들어가 있다. 쿠미나타투 마을의 주술사 오냐피데는 이렇게 말한다.「언어야말로 모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영혼을 뜯어 밖으로 내던진다. 그게 바로 ‘말’이다.」 ‘밖으로 내던진다.’라고. 일본어로 ‘말하다(話す)’와 ‘풀어놓다, 놓아주다(放す)’는 발음이 같다. 우리말은? ‘주문을 왼다’, ‘주문을 걸다’, 곧 ‘말을 걸다’(어처구니없는 비약이려나?).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각기 다른 저작에서의 두 문장을 살펴보자.「서로 화해될 수 없는 두 원리가 실제로 마주치는 곳에서 각자는 타자를 바보니 이단자니 하고 선언한다.」「실제 언어를 조금 더 면밀하게 검토하면 할수록 그것과 우리의 요구 사이의 갈등은 더 첨예해진다.」과연 주술이나 말 따위의 기생충이 득시글거리는 인간이란 숙주에겐 피할 수 없는 이니시에이션인가보다. 격자문 안에 얼룩말 한 마리를 넣고 제각각 앉아있는 각도에 따라 백마니 흑마니 난리를 피운다는 바키리의 말도 고개를 주억거리게 한다. 텔레비전으로 타자의 ‘말’을 듣는 인간은 제 코피도 보기 싫은 주제에 타인의 피에 굶주려 있다. 이로써『가다라의 돼지』는 뭔가 끈적끈적하고 사위스런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끝의 스튜디오에서의 장면은 영화《박수칠 때 떠나라》의 냄새도 좀 나고. 자, 그런데 이제 이 작품의 어처구니없는 것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한다. 아키야마 루이로 시작된 플라시보 효과로 왠지 이야기 전체를 묶어버리는 듯한 느낌도 들고, ― 뭐든 마음먹기에 달렸다, 인가. 이제 와서 이런 말은 참 속편한 논리다. 이래서야…… ― 그간 죽은 사람들에 대한 제대로 된 술회도 나오지 않으며, 거의 신적으로 묘사됐던 바키리는 결말에서 단 한방에 끝난다(이거야 원). 게다가 조상 오 오우베의 힘이 오우베 교수에게 있다는 것도 느닷없는 부분이고, 마가이가 갑작스레 마약을 하는 것도 개연성에서 벗어나 있다. 정말 허무한 퇴장이다. 하다못해 사이코패스도 그것만으로도 범죄의 동기는 될 수 있을 텐데 말이지. 나카지마 라모는 이런 식이다. 진드기가 식어가는 숙주의 몸에서 그 죽음을 알아차리고 홀연히 빠져나가듯 그 모습만을 보여준다. 개미가 개미인 것처럼, 사람이 사람인 것처럼 그 이상을 바라지 말라는 법칙. 베르그송(Henri Bergson)처럼 설탕이 녹기까지 기다려야만 하나. 누구든 진리는 알고 싶어 하니까? 시간은 관념적인 게 아니라 체험적인 것이니까? 마음대로 늘일 수도 없고 줄일 수도 없으니까? 그래서(그럼에도) 이런 ‘(말도 안 되는)자유분방’한 점도 다소 애교로 봐줄 수 있다. 뭐, 작가가 나카지마 라모니까, 하는 식은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썼다면 정말 기교 있고 ‘멀쩡한’ 결말로 이끌어나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앞서 언급한 부분들을 단점이라고 했음에도 왠지 이 작품은 이렇게 끝나는 것이 매력적이라고 여기게 된다.

 

 

덧) 인용이 너무 과했나!? (그리고 한 가지 더. 757페이지로 이 책은 끝이 나지만 적어도 1,000페이지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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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의 회전 - 헨리 제임스 장편소설 열린책들 세계문학 192
헨리 제임스 지음, 이승은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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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은 자신의 책(『죽음의 무도』)에서 셜리 잭슨의『힐 하우스의 유령』과 함께 지난 100년간 등장한 초자연적 소설들 중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바로 이 헨리 제임스의『나사의 회전』을 꼽는다 ― 동시에 유령의 원형에 관해서라면 친절한 꼬마 유령 캐스퍼를 논의하는 게 더 낫다는 발랄한(!) 단서를 달아두고서. 시골 대저택에 온 가정교사가 유령을 목격하면서 벌어지는 심리 공포 소설『나사의 회전』은 다분히 중의적인 동시에 다의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된다. 어린애들의 마음이 구부러져 있거나 가정교사의 시력이 좋지 않거나 하다는 건데(제발 두 가지의 경우밖에 없었으면 좋으련만), 이 고상한 문장으로 하여금 공포가 공포로서 온전히 작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비밀은 비밀로 남겨두는 어정쩡한 미학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 과정은 ― 두 번쯤 읽으면 확실히 느낄 수 있다 ― 쉽게 삼킬 수 있게 만들어진 캡슐 속의 약이 아니라 겉의 캡슐이 부서져 바닥에 모조리 쏟아져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다. 가정교사의 이름은 알 수 없으며, 대저택의 주인이라는 작자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등장하지 않고 게다가 마지막에서 아이는 제 가정교사에게「이 악마 같으니!」― 다른 판본에서는「이 악질아!」라고 ― 하고 소리친다. 가정교사가 헛것을 봤거나 아이들이 거짓말을 했거나 둘 중 하나겠지 뭐, 하고 그냥 넘겼으면 좋겠으나 간단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으니 실제로『나사의 회전』은 읽고 난 다음이 고생이다. 인식이 대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인식을 따른다는 칸트의 통찰이나 그와 반대로 현상세계를 그 자체로 긍정하려했던 니체를 굳이 살펴보지 않더라도 끝에 가서 아이는 죽음을 맞게 되지 않던가? 또 이야기는 주인공이 아닌 가정교사의 시점에서 철저히 진행되지 않던가? 그러니까 독자 역시 그녀가 보게 되는 것 이상은 볼 수가 없잖은가. 유령이 오직 가정교사에게만 보인다는 점에서는 그녀의 환각에 불과한 것이지만(독자로서 그녀의 정신 상태는 믿기 힘든 점이 많다!) 아이들에게 정말 유령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확언할 수도 없는 이유다. 물론 시대상과 프로이트를 들어 섹슈얼리티를 언급하면서(막대기와 탑 vs 나뭇조각의 구멍과 호수) 그녀의 성적억압과 욕구의 좌절에서 오는 극도의 환상으로 볼 수는 있다. 그런데 작품 속 유령의 실체감은 상당하다. 이를테면 유령을 빼면 이상한 점이 발견되는 것인데, 더글러스의 긍정적 평가, 본 적이 없는 퀸트에 대한 묘사 등이 그것이다 ― 이것도 다 미친 가정교사의 탓이고 모든 게 다 환상이며 어쩌다 맞아떨어진 우연의 일치라고 한다면 좋아할 사람은 (우연을 그렇게도 좋아하니)폴 오스터밖에 없을 것이다! 어쨌든 적확한 답은 없고, 단순하다면 한없이 깔끔하지만 복잡하다고 보면 아주 훌륭하게 공포란 장르에서 가치 있는 시도를 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는 작가의 지적 게으름은 찾아볼 수 없으며 오직 <제임스의 유령(들)>만이 존재함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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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량의 상자 - 하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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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없다고 봄)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는 코나투스(conatus)의 개념을 ‘자신의 존재 안에서 지속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정의했다. 반면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어땠나. 그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를 이렇게 비판했다. 「자기 보존 명제는 틀렸다. 그 반대가 참이다. 바로 살아 있는 것들 전부가 가장 명료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것들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이상이 되기 위해서 행위한다.」 이것은 물론 니체의 ‘힘에의 의지’라는 명제로 뻗어나가는 개념이 되겠지만, 잠시 『망량의 상자』에서의 가나코와 요리코의 경우에 빗대어 볼까. 철로에 떨어진(혹은 떨어뜨린) 행위는 가나코와 요리코를 이어주는 끈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로 환생한다는 소녀들의 생각에서 말이다. ‘그 이상이 되기 위해서 행위한다.’ 여기서 이 문제가 개입한다. 그런데 어찌 보면 가나코가 되고픈 요리코의 행위는 그 이상이 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차라리 망량(魍魎) ― 망자의 간을 먹는 요괴 ― 의 그것과 다름없을 정도다. 그리고 시작되는 교고쿠도의 이야기. 아, 이 장광설, 그의 말대로 결국 뒷맛이 좋지 않게 됐다(작품을 다 읽은 후의 독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쨌든 이 작품은 전작 『우부메의 여름』에 비해 다소 커진 스케일과 한층 더 신선한 사건에의 접근방식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이 ‘교고쿠도 시리즈’의 시점은 역시 세키구치여야만 한다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준, 소위 압축되고 집적된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사실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했던 코제브(Alexandre Kojève)의 말이나 라캉(Jacques Lacan)의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와 같은 논제를 떠올렸다. 오히려 인간의 필수적인 항목일지도 모르는 욕망 ― ‘욕구’와는 다른 개념으로서 ― 이 엉뚱하게 분출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 결여의 모델에 따라 욕망을 사유하는 것이다. 결핍된 무엇인가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라는 것 말이다. 실로 금기를 통해 욕망의 주체가 탄생한다는 바타이유(Georges Bataille)의 통찰과 멋들어지게 교차되는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의도치 않게 교고쿠도식 장광설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말았다. 작품으로 돌아가자. 4개의 사건, 즉 1)가나코 살인미수사건, 2)가나코 유괴사건, 3)사이비 교주 사건, 4)연쇄 토막살인 사건까지. 정말이지 (에도가와)란포식 메스꺼움을 자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전작에 비해 한층 더 강렬하게 다가오지만 다른 방향에서 보면 굉장히 속편하게 치부하고 마는 교고쿠도의 가치관도 이번엔 논란을 빚을 여지도 있고 말이다 ― 물론 그 특유의 장광설에 독자들은 흐물흐물해지고 말 테지만. 아쉬운 점은 또 있다. 다분히 사이코패스적 인물들의 과중한 겹침이나, 특출한 건지 뭔지 잘 모르겠어서 여전히 의구심으로 남는 작가의 문장력, 그리고 몇몇 서브테마 구성에서의 유기적 연관과 치밀함 등등. 한 가지 더 말하자면 가나코와 요리코의 내러티브를 좀 더 구체화하고 확장시켜 끌고나갔으면 하는 것까지. 그러나 이 작가, 꽤나 심혈을 기울였다는 느낌이 지배적이다. 줄곧 중심을 잃지 않고 결말까지 치닫는 일련의 과정에서 한 치의 오차도 범하지 않았다. 마치 시종일관 등장하는 ‘구보 슌코의 장갑’처럼, 평이하달 수도 있는 논제를 가지고 끝까지 독자로 하여금 졸이게 한다. 기술(記述)적 매력이다. 온바코의 이야기와 병치되며 이어지는 구보 슌코의 이야기와 그와 함께 진행되는 교고쿠도식 철학(아, 매력적인 장광설이여!)도 꽤 수준급으로 정제되어 있다. 상자 같은 건물 안에 있는 또 다른 상자 속의 존재,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우리는 그것을 열지 않으면 상자 속의 존재를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덧) 초반에 언급했듯 『망량의 상자』는, ‘뒷맛이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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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탄생
송호근 지음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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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책머리에’ 부분 6번째 행을 읽고 있는데 ‘광주 민주화 운동’이나 ‘광주 혁명’이 아닌 ‘광주 사태’란 단어가 등장했다. 설마 이 책 전체가 아래에서 위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관점은 아닌지, 왠지 모를 불편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역사적 사실을 보면 동학운동이나 조선사회를 통틀어 ‘인민’이라는 단어의 개념 ―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들 혹은 (대체로)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에 대한 개념 역시 ― 이나 지식은 희박했으며 그것조차 인식하지 못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과연 저자는 ‘인민의 탄생’에 대해 올바르고 적확하게 통찰하고 있는가? 그런데 이에 앞서『인민의 탄생』은 개념의 공허한 동어반복과, 진실과 사실에 있어서 독자를 오도하는 부분도 많았음에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 책이 다른 것들보다 눈에 띄게 좋아 보이지 않는 점이다……. 담론과 공론에 있어 언문의 역할을 되짚어보고 기존의 서양산(産) 사회과학과 서양식 잣대를 벗고서 조선사를 조망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독자의 입장으로서는 그렇지만도 않은 것처럼 보인다. 처음 언급했듯이 위에서 아래를 ― 혹은 기득권의 입장에서 ― 내려다보는 시각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내가 이 책에 대해 자그마한 평가를 내린다면, 굴절된 프레임으로 이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론장에서의 인민(의 탄생)이란 피라미드 꼭대기의 몰락과 붕괴에서 기인했다고 해야 맞는 말일 거다. 그런데 이 불가능한 합의가 ‘위’가 아닌 ‘아래’에 원인이 있다고 하기에 나는 이것이 관념적으로든 뭐든 어긋났다고 본다.『인민의 탄생』은 한글이 탄생되어 그것으로 인해 스스로 읽고 쓰고 생각할 줄 아는 새로운 인민이 출현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에 있어서 공론장과 합의의 결함 및 결핍은 교양시민이 부재했기 때문이란다. 한마디로 한국 사회는 사회적 합의를 주도할 교양시민이 없어 마침내 공론장에 균열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인민의 탄생』은 참 잘 만들어졌다. 몹시도 많은 사회 과학자들을 끌어오고 올바르지 못한 서구식 잣대를 들이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을 무렵 저자가 일간지와 인터뷰한 기사를 읽었다. 그런데 뭐라고? “SNS가 대안 공론장이 되기엔 아직 이르다. 여과기능 없는 온라인 공간의 대화는 개화기 인민들이 소문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소문에 살을 붙이고 극적 요소를 보탠 것 같은 현상일 뿐이며 자기검열의 과정을 겪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나는 한국 사회를 공론장의 측면에서 봤을 때 그것이 ‘반쪽짜리’라는 말에는 쉬이 찬성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에 우리의 공론장과 합의가 신통치 않은 것은 교양시민이 부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썩은 기득권의 썩은 논리와 지배와 피지배적 인식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인민과 공론장과 합의의 문제를 엉뚱한 데서 찾으려하니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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