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경의 필로시네마 - 탈주의 철학에 대한 10편의 영화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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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좀 쉽게 풀어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근본적으로 영화 얘기를 하고 있긴 한데 거기에서 뽑아낸 철학적 구조가 중심이 되니, 뭐 철학 용어가 나와도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어쨌든 『필로시네마』는, 살짝 늘어붙은 '탈주의 철학에 대한 10편의 영화'라는 부제처럼 온갖 스펙트럼의 탈주를 갖고서 진행되는 영화 이야기다. 인간은 뭐든 사유하기 마련인데 여기선 빠르게 동작하는 이미지에서 어떤 사유를 뽑아낼 수 있을까, 하는 게 문제가 된다. 그것도 '탈주'를 ㅡ 삶으로든 삶에서든, 어느 쪽이든 간에. 그러니까, 이건 철학서다……. 근데 그 '탈주'라는 게 사실은 에서(Maurits C. Escher)의 판화처럼 돌고 도는 것이라면? 그래서 어떻게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면? 탈주가 당차고 아름답게 보인다면 그건 우리가 쉬이 볼 수 있는 가시적 세계에 있는 것은 아닐 거다. 그런 의미에서 (책에 등장하는)영화들은 모방의 예술이 아니라 창조의 예술 ㅡ 점, 선, 면, 체가 빚어내는 가상의 이미지 ㅡ 을 보여준다. 그렇지 않다면 그저 그런 정신사나움에 지나지 않겠지. 가상 같은 현실, 현실 같은 가상,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하이퍼리얼리즘이 난무하는 곳에서 어찌 '탈주'하지 않고 배기겠나? 그런데 약간 우스운 측면, '막힘'이 없다면 탈주 또한 의미가 없고 전혀 아름답지도 않을 거다. 우리의 앎에 영향을 주는 현실, 가상, 타자의 임팩트는 몹시도 강력한데 거짓을 거짓이라고, 거짓을 현실이라고, 현실을 거짓이라고…… 이렇게 끊임없이 되묻고 사유하는데, 내가 과연 현실(혹은 가상)을 놓칠 수 있을까? ㅡ 「이러니 내가 널 못 잡아넣겠냐?」(영화 《공공의 적 1-1 강철중》에서 철중의 대사) 우리는 어떻게든 현실(가상)을 잡아 처넣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보는(볼 수 있는) 세계에 대해 칸트와 니체의 의견은 나뉘어지지만 둘 다 사유만은 고개를 주억거릴만하다. 「안경으로 바라본 세계와 맨눈으로 바라본 세계 중 과연 어느 것이 진짜일까?」(강신주, 『철학 VS 철학』, 그린비, 2010) 책에서 소개된 영화 《토탈리콜》(1990)만 봐도 시종일관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묻지 않았나. 그런데 바꿔 보면 이게 참 매력적이다. 이렇게 황당하고 슬픈 질문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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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4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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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였던가. 일본에서 제작된 드라마 버전을 봤는데 조금 실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기억으로는 다소 낡아보였고 서사구조도 핀트가 좀 안 맞는달까. 그래서 역시 책으로 읽어야겠다고 결심, 최근 출간된 개정판을 보았다. 읽는 데 두 시간 정도 걸린 것 같으니 일단 몰입도는 상당히 좋다. 나에게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은 기대한 만큼을 웃도는 것들도 많고 ㅡ 사실 (거의) 다가 그렇다. 소비자는 돈을 가지고 있고 자본가는 상품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돈을 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본가는 우리에게 허용된 순간적인 자유나 우월함을 오래 참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소비자의 돈을 다시 회수하지 못할 경우, 잉여가치를 얻을 수 없고 나아가 그 돈으로 생산에 재투자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다양한 유혹의 기술을 개발하는 데 혈안이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자신의 우월성을 보장해 주는 돈을 강제로 뺏을 수 없다면, 자발적으로 소비하도록 유혹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밖에 달리 길이 없다(강신주, 『철학 VS 철학』, 그린비, 2010). 그럼 여기서 다시 코제브의 말이 등장하게 된다.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을 스스로 욕망하고 있고, '대가리가 커질수록' 자신이 욕망이 타자의 욕망이란 것을 망각한다. 아무리 인간이 신이 될 수도 있고 동물로 전락할 수도 있다지만 ㅡ 본능을 이겨낼 수 있는 이성이 존재한다지만 ㅡ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반드시 결핍이 존재할 때만 집착이란 것이 생겨날까?  내가 보기에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행복을 추구하는 것만 같다. 명백히 본말전도다. 이래서는 말이 되질 않는다.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이다.」 전체의 시스템이 문제라지만 개인의 오류도 분명히 있다. 개인은 영민하다지만 집단은 우매한가? 이 말은 반드시, 모든 경우에 성립할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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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 궁리 공동선 총서 1
인디고 연구소 기획 / 궁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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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고도 교묘하지만 지젝의 논의는 절실하게 동작한다. '불가능의 재구성' 내지는 '가능의 재구성'을 담고서. 핑크 플로이드의 음반을 영화로 만든 알란 파커 감독의 《더 월(Pink Ployd The Wall)》(1982)을 보라. 영화에는 코드화된 삶, 벽으로 묘사되는 사회적 강제와 억압, 전쟁의 고통, 컨베이어 벨트 위의 학생들……이 등장한다 ㅡ 거기서 우리가 하는 건 '망치의 행진'이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벽은 허물어진다. 실제로 무너졌는지 아니면 그런 의지를 보여 주려는 건지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한 해석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우스운 건 벽을 부수려는 의지나 논의 또한 '벽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밖으로 나가려는 파리가 창문이 닫힌 것도 모른 채 자꾸만 투명한 유리에 몸을 던지듯이. 진부한 말이지만, 벽이 존재함으로써 새로운 사고와 행동이 가능하고 가치를 갖는 게 아닐는지 모르겠다. 역설적으로 얼음을 깨뜨리기 위해선 먼저 물이 얼어야 하지 않겠나.

 

 

공동선은 저에게 있어 투쟁의 문제입니다. 공동선은 저에게 '자유를 향한 공동 투쟁'을 의미합니다 (...) 우리 스스로가 이방인이 되어봄으로써 어떻게 공동선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이 주제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 예를 들어, 오늘날 프랑스의 어느 보수주의자도 「나도 68혁명 현장에 있었어. 나 또한 물론 시위를 했지. 하지만 후에 나는 현실주의자가 되었어」라고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습니다. '불가능한 것'은 여전히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경계를 흐려버리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경계를 재사유(rethink)하는 것 말입니다.


ㅡ 본문 p.195-209

 

 

그래서 「사회 · 정치적 공간 안으로의 배제된 자들의 침입이 곧 민주주의」라는 지젝의 말은 힘을 얻는다. 이것은 아렌트(Hannah Arendt)의 「인간의 무사유로 인해 전체주의가 발생한다」와 궤를 같이 한다. 그녀가 말한 '철저한 무사유'는 바로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없음'을 의미하므로. ……사회는 허용되거나 금지되는 것들이 명시적으로 드러날 필요가 없어야 한다. 그런 (윤리적)표준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논의들이 필요한 거겠지. '공동선'이 무시되고 '최고선'이라는 것이 존재할 땐 누구나 그것을 향해 돌진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알게 된다. 최고선을 좇는 이들은 그들 스스로가 그런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최고선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들은 이미 그들이 배제되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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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뒷면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9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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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괴상한 버릇(편견)이 있다. 국적을 불문하고 여성 작가가 쓴 소설은 읽지 않는다는 것. 그게 조금씩 깨지고 있다. 미야베 미유키로 시작해서 이제 온다 리쿠로도 넘어오는 중이다 ㅡ 이 『달의 뒷면』에서 인간의 수용이란 것에 대해, '정보의 취사선택' 운운하는 부분은 좀 진부하다고 느꼈고, 게다가 소재도 진부한 '현대인의 습성'에다가, 화장(火葬)을 하고 봤더니 유골이 없는 사람이 있다는 에피소드도 그랬다. 그런데도 이 소설, 재미있다……. 본문에서 사람이 실종되는 것을 '도둑맞는다'고 한 건 어째서였을까. 왜 피동의 형태로 표현된 걸까. 등장인물 교이치로처럼 일기를 써 자신의 1분 1초를 반추하지 않으면, 내가 나임을 오롯이 만족하지 않으면 무엇인가에 '당한다'는 뜻인지. 아니면 『달의 뒷면』을 지배하는 '텍스트(책)와 물'의 측면에서 봤을 때 자꾸만 편해지려는, 그래서 반대로 집(나) 안에서 나가려 하지 않는 '나르시시즘의 뒷면'을 보여주려 한 것인지. ……그나저나 소설 속에서 왜 하필 문학작품의 제목으로 끝말잇기하는 장면을 넣은 것일까. 왜 하필 물이 차오른 곳이 도서관이었을까. 왜 하필 교이치로의 창고에서 낡은 LP를 보여준 것일까. 내가 보기에 '달의 뒷면'이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것'이다 ㅡ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것.' 어쨌든 『달의 뒷면』을 지배하며 가장 크게 드러난 물질은 '물(水)'이다.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이 물을 두고 부드러움을 간직한 우월적인 것이라고도 했다가도, 물은 난폭하다며 '물 속에서의 승리는 바람 속에서보다 더 드물고 위험스럽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책에 이런 말을 써놓았다.

 

 

사람과 세계의 싸움에서,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쪽은 세계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계는 나의 도발(挑發)이다'라는 공식을 선언함으로써, 쇼펜하우어의 교훈을 완전히 하고 (...) 나의 날카롭고 뛰어난 지도력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하므로 나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ㅡ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자, 그럼 다시 소설을 보자. 작품 후반에서 남겨진 세 사람은 스스로가 '도둑맞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면 '도둑맞아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ㅡ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마을의 다른 사람들은 실종된(도둑맞은) 그 기간 동안만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지 그에 대한 자각은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럼 남는(남겨진) 문제는 빤하다. 세상살이 하찮다면 하찮은 것이지만, 내가 아니어도 별 상관 없다는 듯 살고 있는 것에 대한 질타, 남은 교이치로 · 다몬 · 아이코를 내세운 정수리에 침 놓기, 비(非)활자화에 대한 아우성, '다수파'라는 것에 대한 동경과 거부감, 개인(個)과 공동체(共)를 모두 소망하는 이율배반…….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반대급부의 문제가 등장한다. 이래서는 그저 편할 대로 생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실은 이 소설은 정신병(혹은 편집증) 환자 몇의 소동극이었습니다, 하고 에필로그에 크게 써놓을 수도 있다는 거다. 이런 식이라면 앞서 '텍스트(책)와 물'이라 언급했던 부분도 확대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달의 뒷면』, 정체가 뭘까. 검은색과 흰 색의 정중앙에 서서 잿빛을 띠는, 어디로든지 튀어나갈 수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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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평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카프카 평전 - 실존과 구원의 글쓰기 서강인문정신 16
이주동 지음 / 소나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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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씀으로써, 낯설고 부조리한 세상을 텍스트의 서사 안으로 끌고 들어온 카프카였다. 그리고 남들이 잠든 밤에 홀로 깨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했던 사람이었다. 처음 『카프카 평전』을 집어 들었을 땐 '평전'이란 단어가 주는 시간과 압력에서였는지 이유 없는 거부감이 들었지만, 수수께끼와도 같은 그의 작품은 물론이거니와 카프카란 인물 자체도 꼭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다는 생각에 미쳐 이 두꺼운 평전에 빠져들었다. 초인 혹은 거인이었던 아버지의 반대를 비롯해 사회와 세상이란 굴레 속에서 그를 존재하게 한 건 언제나 글쓰기였다.

 

 

불행하고, 불행하다. 하지만 좋은 생각을 했다. 한밤중이다 (...) 불이 켜져 타오르는 램프, 조용한 집 안, 어두운 바깥, 깨어 있는 마지막 순간들, 그것은 나에게 쓸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비록 가장 불행한 권리이긴 하지만. 나는 이러한 권리를 서둘러 이용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자려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아도 자꾸만 저절로 눈이 떠지는 것처럼 극히 자연스런 귀결. 물론 카프카에게 글쓰기란 일종의 윤리(도덕)적 문제로 간주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상상 속에서도 가능하기 쉽지 않은 부조리함을 활자화하면서 그것으로 세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고통 또한 보여주었다 ㅡ '당연하지 않은 일상'을 '열린 해석'으로 보여줌으로써 말이다. 특히 그의 작품 「변신」을 보라.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벌레로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인간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소설 말이다. 부조리한 데포르메의 충격이 주는 섬뜩함은 언제 읽어도 우리로 하여금 질겁하게 한다. 게다가 그와 함께 조직으로 대변되는 사회구조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오히려 그들이 벌레로 변한 주인공보다도 낯설게 다가오지 않던가. 그러니까 당연히 당시 사회체제와 맞물려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데 여기서 '함몰된 개인'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ㅡ 어찌 「변신」의 경우만 그렇겠는가, 하고 느껴지긴 하지만.

 

 

그는 1922년 (두 번째)유언장을 쓰는데 그 후 침대에 누워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카프카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많이 읽되 자신의 마음과 맞닿아 있는 책은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 그가 키르케고르의 책을 자주 반복해서 읽은 것은 그의 삶이 아버지와의 갈등, 약혼자와의 파혼, 여러 번의 졸도, 세속적이고 범속한 것에 대한 거부, 소외된 삶, 부족한 신앙심에서 오는 불안,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다가온 인간적인 절망 등 여러 가지 점에서 카프카의 삶과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p.761). 후두결핵으로 죽기 전 카프카는 그를 따랐던 클롭슈토크에게 모르핀을 놓아달라고 소리쳤고, 그는 카프카의 분노에 마취제인 판토폰을 투여했다. 그러자 카프카는 이렇게 외쳤다. 「속이지 말게. 자네는 내게 해독제를 주고 있잖아! 나를 죽여주게. 그렇지 않으면 자넨 살인자야.」 그리고 클롭슈토크가 주사기를 씻으로 침대에서 멀어져 가자 그는 떠나가지 말라고 했고, 클롭슈토크는 가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카프카는 내처 말했다. 「하지만 내가 떠나가네.」

 

 

「변신」 · 『소송』 등을 쓴 그가 죽었다는 것은 ㅡ 그의 글쓰기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누구나가 그렇겠지만)이제 글로만 카프카를 만날 수 있는 나는 멀리 있는 그에게 「변신」의 주인공인 그레고르의 여동생이 했던 말로 찬사 아닌 찬사를 하려 한다. 「이리 좀 와 보세요! 그것이 뒈졌어요. 저기 누워서 완전히 뒈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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