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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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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과 무감동에 불안이 더해진다. 오늘의 사람/사람들은 자신의 불안을 드러내는 것을 거리끼지 않고 이제는 다른 사람/사람들의 불안에까지 관심을 기울이며 혹여 그 불안이 현실이 되어 내게 오지는 않을까 하면서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불안감에 불안해한다. 동시에 (대체로) 내 신체와 소유물을 해치지 않는 한, 그러니까 내게 실질적 위협이 없는 한 다수의 쪽에 서 있고자 한다. 그편이 내 불안감을 다소나마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불안(감)이라는 건 때때로 내게 긍정의 작용을 이루어내기도 하는데, 적절한 불안과 긴장은 나를 무기력에 빠뜨리지 않고 더 이상 내가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 추진력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한편 또 당연히, 그러한 불안은 그것 스스로 추진력을 얻을 수도 있다(따라서 책의 결론 부분이 다소 자기계발서 같은 느낌을 주고 있는 터라 개인적으로 유일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기도 하다). 불안은 상당히 다양한 형태로 우리에게 수작을 건다. 전쟁, 건강하지 않음, 자연재해, 욕망 채우기에 실패한 뒤 느끼는 불만족. 특히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것이라 여겨졌던 것들이 실은 단순한 긴장이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면 또 다른 불안이 야기되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소비자인 우리의 '선택의 자유'라 일컬어지는 방식에서 오는 '선택의 권력'이 각각의 소비자가 아닌 상품을 판매하는 기업에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것, 좀 더 나은 조건을 기대하며 통신사를 끊임없이 바꾸는 사람들, 이런저런 불안을 덜고자 자기계발서와 각종 멘토를 찾는 모습 등에서(p.112),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시시콜콜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의 틈바구니를 돌아다녀야만 한다는 한층 더 나아간 새로운 불안에 휘둘리고 만다. 때문에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게끔 설계되어 가면서도 그런 만큼 인간관계 또한 단속적이거나 혹은 정반대로 흐를 가능성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즉 선택지가 많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우리에게 '자유로운 선택'의 기회를 제공한다고만은 볼 수 없다는 의미인데, 예컨대 가짓수 많은 선택지에서 특정한 것을 고르기는 쉬워도 '무한에 가까운 선택의 자유' 앞에 서면 외려 갈팡질팡하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선택지는 없으니 그냥 원하는 것을 아무거나 하시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될는지도 모른다. (p.113: 오늘날 소비 지상주의 사회에서는 파트너를 구하는 논리와 새 차를 사는 논리가 다르지 않다. 즉, 먼저 광범위하게 시장조사를 한다. 다음으로는 욕망하는 ‘대상’의 품질을 하나하나 확인한다. 그러고는 혼전 계약서를 작성한다. 시간이 지나면 중고를 새것으로 바꾸거나, 번거로운 일을 최소화하기 위해 작정하고 단기 임대 계약을 맺기도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 첫머리에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위험(과 거기서 생겨나는 공포 혹은 불안)에 대해 말한다. 우리의 신체와 재산을 위협하는 위험, 사회질서의 지속 가능성과 안정성을 위협하는 것,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위험 등. 그러나 이런 위험의 가짓수는 비단 바우만이나 살레츨이 지적하고 있는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우리가 불안 요소라 인정하는 것들 외에 새로운 공포의 영역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불안감과 무서움으로 점철된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해서 늘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루 24시간 일주일 내내 공포에 빠져서 지내지는 않을 것이므로. 바우만의 말대로 우리는 그런 무서운 사태의 가능성을 잊어버릴 교묘한 전략을 넘칠 만큼 갖고 있다.(앞의 책 p.17)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계속해서 변하거나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불안의 형태 또한 그럴 공산이 커야 하겠지만 다들 알다시피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불안 요소를 스스로 만들어내기도 하며 어떤 목적을 가지고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개인/단체도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좋지 않은 부담스러운 것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될 텐데, 살레츨이 책을 끝내며 말한 '불안이 없는 사회도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위험한 곳'이 가지는 의미, 즉 약간의 불안에 대한 경험은 우리의 안녕과 평온을 저해한다기보다 주의의 결여를 방지할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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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일인자 1 - 1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1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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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7부작으로 정리된 <마스터 오브 로마> 시리즈 중 1부 『로마의 일인자』 제1권. 하나같이 두껍기 그지없어서 한국어 번역이 완료되면 총 스무 권쯤은 될 것 같다. 꾸준한 투자와 관심이 없으면 좌초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는 소위 대작이 갖는 불안감과 분권 없이 출간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과거 2부까지 출간되었다 절판을 겪는 안타까움이 있었으니 이번만큼은……). 내용으로 들어가자면 언제나 그렇듯, 역사는 사람과 장소만 바뀔 뿐 그대로 머물러 있다고 해도 될 정도가 아닐는지. 『로마의 일인자』 1권은 카이사르(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리우스(가이우스 마리우스), 술라(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이 세 남자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카이사르가 자신의 열여덟 먹은 딸과 그녀보다 서른은 좋이 나이 든 군인 마리우스를 결혼시키고자 하고, 카이사르의 아내가 이를 아무렇지 않게 '사업 문제'라 부르며(맙소사!), 마리우스가 앞으로 철저히 혼자가 될 거라 눈물을 흘리는 아내와의 이혼을 요구하면서 내뱉는 '그러게 작은 개라도 길러보라'라는 우스꽝스런 어조, 명문가 출신이나 파락호에 난봉꾼인 술라의 운명 등이 얽히고설킨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자신의 피호민(被護民)인 평민을 보호하는 귀족이 유독 자기 피호민들이 많은 지역에 공공사업 계획을 추진하거나, 유서 깊은 가문과 돈이 결혼이란 방식으로 어우러져 일종의 파급효과를 내거나, 유력 정치인(들)이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갖은 술수를 쓰는 모양새 그리고 끔찍하고 더러운 파벌 정치는 역시 사람과 장소만 바뀔 뿐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총 세 권으로 제작될 1부 『로마의 일인자』를 다 읽어보아야 이 걸작의 겉핥기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아직은 여기까지다. 다만 시리아의 점술가 마르타가 마리우스를 두고 일곱 번이나 집정관이 되어 '로마 제3의 건국자'란 칭호를 얻을 거라 읊은 예언과 더불어, 독버섯 등으로 두 여자를 저세상으로 보낸 야심가 술라가 카이사르의 둘째 딸과 결혼하며 얻은 카이사르 가문의 후원(동시에 동서지간이 된 마리우스의 재정적 지원)으로 시작할 정치적 입지 다지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가가 최대 관심사가 되리라. 『로마의 일인자』가 모습을 갖추고 가이드북(용어와 개요를 정리한 소책자일 듯하다)과 함께 출간되는 것은 이제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시오노 나나미의 저 유명했던 책도 읽지 않았고 로마제국의 역사에 관해서도 전반 지식이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콜린 매컬로의 팩션이 일반 역사 서적에 비해 제격이지 않겠나. 아마도 로마제국을 다룬 딱딱한 역사서 한 권을 읽으라 했다면 쉬 접근하기 어려웠을 터다(13년간의 고증과 20년에 가까운 집필 기간을 거쳤다던가! 심지어 연구와 독서로 인해 심지어 매컬로 자신은 시력마저 잃고 말았단다!). 그리고 이제 <마스터 오브 로마> 1부가 모습을 갖춘다. 카이사르 가문과 마리우스의 결합에서 시작된 로마 이야기의 시작이,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 마지막 권 마지막 장을 덮을 땐 과연 어떻게 변해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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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공부 -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삶을 위한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적극적인 투쟁
장정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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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을 읽어 본 거라곤 시집 『햄거버에 대한 명상』뿐이다. 그의 공부 책을 읽는 것도 거의 십 년 만에 출간된 개정판으로, 어딘지 모르게 나는 장정일로부터 '도망중인 사나이'인 것만 같다(실제로 그의 작품 중 「도망중인 사나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는데, 내가 쓴 맥락은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장정일이 꿈꾸는 인문과 내가 꿈꾸는 인문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여기는 인문 또한 매한가지일는지도. 「존경받던 어른이 어쩌다 우리의 실망을 사는 경우는 바로 '기계적 중립'을 취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가 서문에 적어놓은 말이다. 중용? 좋다. 어디에서든 중간만 하라, 모나게 튀지 말고, 앞서가지도 말며, 뒤처지지도 말아라. 어르신들의 현명한 가르침이다. 아니, 현명한 가르침이었다. 다시 한 번 중용이라고? 좋다, 좋다. 그런데 흑과 백 사이의 회색분자며 기회주의자라니? 얼토당토않다. 외려 흑과 백에 있는 자들의 정체가 아리송할 때가 더 많은 건 왜일까(이 세계를 흑, 회, 백으로 딱 잘라 삼등분해서 세 개의 자루에다가 담을 수 없을지라도). 그래서 장정일의 '공부'다. 내가 서서 발을 딛고 있는 곳과 내 입을 통해 말해진 것을 나조차도 알지 못한 채 강 한복판에 있다면 이것도 중립은 중립이다. 그런데 앞서 인용한 '기계적 중립'이다. 그러므로 다시 '공부'인 거다. 하다못해 남을 응징하거나, 내 처지를 변명하거나, 무언가의 뻔뻔함을 타파하거나, 과거에 머무르고 싶지 않거나, 어느 쪽이건 공부다. 행동하는 철학자가 없다며 우는소리하기 전에 일단 공부다. 물론 장정일의 때로는 수상쩍은 공부가 나나 우리에게 가시적이고 즉각적인 명제를 던져주지 않을 공산도 있다. 탱크같이 밀어붙여서는 우리로 하여금 '기계적이고 무지한 중용'을 고민하도록 만들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지식과 사유의 덫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장정일의 공부에 대한 절절한 노력은 우리를 부지불식간에 뾰족한 가시 위에 앉게끔 유도한다. 세모꼴 지붕 한가운데에 달걀을 얹어놓으면 어느 쪽으로든 굴러가는 것처럼. 균형을 잘 잡아 그대로 있으면 또 어떤가. 그쯤 되면 이미 수많은 고민을 한 끝에 중용을 택하기로 마음먹은 것일 텐데. (다만 깨지지만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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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열린책들 세계문학 229
알베르 카뮈 지음, 최윤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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뮈가 가졌던 알제리나 나치에 대한 생각은 저쪽으로 제쳐 두고 그저 재난 소설로서의 『페스트』를 읽고 싶었다. 직간접적 영어(囹圄) 생활 속에서 불특정의 사람들이 병들고, 죽고, 시시껄렁한 대화를 주고받고,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탄복하고, 타인의 불행하지 않음에 화를 낸다.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도 닮아 있는데, 실제로 리유의 한 발짝 떨어진 서술과 진노 선생 집에 얹혀사는 이름 없는 고양이의 깨달음은 대동소이하다) 그리고 전염병 출현, 심각성 대두, 안정기, 소설은 대략적으로 이 구조에 따라 움직인다. 당국은 도시를 폐쇄하고 이런저런 조치를 취하려 하나 이미 늦었고, 병명이 공포되자 사람들이 두려움에 빠지긴 했지만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하며, 또 어김없이 종교가 끼어들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타인의 괴로움에 기꺼워하던 아무개는 전염병 확산이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자 다시금 자기 혼자만이 고통에 빠져있다고 여겨 이젠 그 스스로가 전염병과 같은 불행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해하려 한다. 특히 랑베르의 인물상이 흥미롭게 다가오는데, 그는 개인적인 이유로 폐쇄된 도시를 빠져나가고자 하지만 결국 마음을 바꾸어 리유(의사)를 돕기 때문이다. 인간 자신을 믿어야 한다? 이런 고담준론 같은 명제가 현실에 적용되기란 요원할는지 모른다. 『독감』(사이언스북스, 2003)을 쓴 지나 콜라타는, 저 옛날 아테네를 덮친 전염병 기록을 쓴 투키디데스를 인용한다. 「전염병은 격심한 무절제와 방종을 낳았다. 이제 사람들은 예전에는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하던 일을 공공연하게 시도했다.」 그때와 지금의 의학 수준과 사고방식의 상이함은 차치하고라도,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구분하기 힘들다. 소설 속의 시민들도 탈출할 수 없는 도시 안에서 영화와 술에 빠져 피로와 죽음의 고통을 잊으려 한다. 질병을 가지고 설교하는 자, 건강 증명서를 써주지 않는 의사를 비난하는 자, 혼란스런 틈을 놓치지 않고 암거래에 손을 대는 자, 이런 불협화음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는 자. 이제 불행은 비현실에서 이편의 현실 속으로 편입된 지 오래고, 작중 타루라는 인물의 '죽음 권하는 사회'에 관한 환멸에 가까운 폭로만이 허위허위 공기 중에 흩뿌려진다. 관찰, 그리고 관찰. 『페스트』는 끊임없는 관찰로 사람들 앞에 거울을 들이민다. 그러므로 이것은 더 이상 추억에 머무르지 않고 기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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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 : 모리어티의 죽음 앤터니 호로비츠 셜록 홈즈
앤터니 호로비츠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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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티는 셜록 홈즈 시리즈를 종결지을 수 있는 좋은 방편이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을 알지 못할 만큼 무지렁이이면서도 실로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인 사람을 끝장내기엔 모리어티만한 정도의 설정은 불가피했을 거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그만이 홈즈에 대적할 만한 인물로 그려졌고 동시에 영영 셜로키언들의 미움을 받는 처지가 되었을지도(모리어티가 가상의 인물이라는 둥, 실은 범죄자가 아니라는 둥, 홈즈의 배다른 형제라는 둥 별의별 이야기도 난무한다). 『셜록 홈즈: 모리어티의 죽음』은 애설니 존스 경감과 핑커턴 탐정 사무소(도일의 『공포의 계곡』에서도 등장한다)의 프레더릭 체이스 콤비를 내세워, 홈즈와 모리어티의 마지막 대결이 이루어졌던 라이헨바흐 사건 이후를 다룬다. 홈즈와 왓슨 없는 셜록 홈즈 시리즈이며 진행자는 왓슨이 아닌 탐정 사무소의 체이스. 이야기는 모리어티가 홈즈와 함께 폭포에서 떨어지기 전 편지 한 통을 받았다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여기에 모리어티에 버금갈 만한 클래런스 데버루라는 악명 자자한 인물이 떠오르고, 존스와 체이스 콤비는 소설 끝까지 그자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리고 기어이 모리어티 시신의 재킷에 비밀스레 꿰매진 솔기를 뜯어 모종의 쪽지를 발견하는데, 내용은 당연히 대문자와 소문자로 이루어진 수수께끼 같은 암호문. 클래런스가 모리어티를 만나고 싶어 하면서도 실제로 그의 얼굴은 알지 못한다는 것에 착안한 존스 & 체이스 콤비는 급기야 모리어티 흉내를 내며 약속 장소로 나가지만 '런던탑에서 날아오른 까마귀가 몇 마리였는가?' 라는 수상쩍은 암구호 앞에서 낭패를 보고, 이어 경시청 폭발 사건, 존스 경감의 딸 납치, 치외 법권에 가로막힌 끕끕수, 과거 홈즈 시리즈에서 다루어졌던 다종다양한 트릭의 차용 등이 어지러이 얽히고설킨다. 홈즈라 하면 나는 일단 가스등과 마차가 떠오르고 호로비츠의 소설에서도 그 같은 풍경을 묘사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 보이는데(다소 폭력적이거나 얌체 같고 추잡한 짓거리를 일삼는 인물의 행동 탓에 뤼팽의 냄새도 살짝 풍기기는 하지만), 특히 개인적으로 가스등이 나간 상태에서 불을 뿜으며 난사되는 총격, 점멸하면서 앞뒤 분간이 어려운 시각적 분위기와 그 속에서 또다시 생겨나는 칼잡이의 의문스런 행동이 가장 마음에 든다. 결말은, 글쎄, 기막힌 반전이 준비되어 있긴 하나 호불호는 극단적으로 나뉠 것만 같다. 나는 나름대로 괜찮은 생각이라는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으며, 선한 자는 더욱 선하고 악한 자는 더욱 악하게, 라는 말을 적용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보았다. 잘 만들어진 패스티시는 원작을 조악하게 난도질하지 않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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