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혹한 이야기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김보은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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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저리 옮겨 다닌 시체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된다. 야생동물 보호구역, 스리 파인스의 어느 곳에서. 심하게 굶주린 이들이 잔뜩 무리 지어 살고 있는 야생동물 보호구역. 그들은 서로를 주저하면서도 이따금씩 생채기를 내는가하면, 바깥으로부터 숨어는 있지만 자신들 역시 과거에 외부인이었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그리고 그들 어제의 과거가 곪기 시작해 기어이 오늘 살갗 위에서 터지고야 만다(악마가 언제나 구석진 곳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까). 도서추리의 냄새가 나는 『냉혹한 이야기』는 짧았던 프라하의 봄의 상처가 더쳐 모든 것이 거의 변하지 않는 마을 스리 파인스에서 곪아터진다ㅡ 마을 주민 클라라의 말처럼 스리 파인스에는 시체를 만들어내(야 하)는 소명이 있는가 보다. 여느 때처럼 가마슈는 누구든지 의심하면서도 누구나의 집에 들어가(초대되어) 차를 마시고 저녁을 대접받으며(흔쾌히!), 종국에는 하나의 인간이 죽기 전과 후의 과정을 밝혀냄으로써 피해자와 범인을 안타까워한다. 그의 신념대로 모든 것은 두 번째 기회를 가질 자격이 있기 때문일까? 그러나 그것은 한마디로 전혀 괜찮지 않은 ㅡ I'm Fine('F'uck up, 'I'nsecure, 'N'eurotic, 'E'gotistical) ㅡ 상황이다.(p.136) 범인(이라고 여겨지는 자 또는 용의자)의 (거짓)말[言]은 입속에서 썩는가하면 공기 중으로 뿜어져 졸렬하고 참혹한 경우에 불거지는 악감정과 거친 언사처럼 다른 사람의 가슴에 박혀 그대로 응고된다. 불쾌한 일이다. 가마슈는 그/그녀를 시큼한 피클처럼 절이고 절여 질겁하게 만들고, 스리 파인스의 주민들은 아귀가 잘 맞는 하나의 작은 편대를 이루고 있었으나 그들이 친구로 여겼던 자의 한마디 한마디가 거짓으로 밝혀짐에 따라 이내 등을 돌리고 만다. 루이즈 페니의 소설이 대개 그렇지만 이 『냉혹한 이야기』는 오리를 데리고 다니는 미친 시인 루스(가장 매력적인 인물이 아닌가)가 써내는 단편적인 시의 구절이 혼란스레 떠다니는 가운데 심농의 냄새가 물씬 흘러넘친다. 물론 심농은 『명탐정 코난』마냥 속전속결이지만(코난의 경우 주간만화 연재 중 3회 안에 사건 해결을 해야 한다는 대원칙이 있다) 매그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가마슈란 감성적 인물의 존재로 인해 결코 쾌적하지 않은 실제의 삶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암호가 약간 아쉽긴 하나(물론 '키워드'가 중요했지만 결국엔 '시간문제'였으므로), 소설은 매력적인 캐릭터의 환원과 함께 인물들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제반에 눈을 돌림으로써 이야기가 갖춰야 할 튼튼한 골격을 쌓았다는 느낌이다. 여러 개의 선택지 중 고를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고 결국엔 범죄의 길에 들어선다ㅡ 이 당연하게 보이는 맥락은 필연적으로 그들 사회와 역사(과거)에 귀결될 수밖에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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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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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에는 적어도 실제로 발생한 사건 그대로의 사실뿐 아니라 첨삭이 뒤따른다. 이것은 곧 편집을 의미하며 그러한 행위의 많고 적음에 따라 오웰과 헉슬리의 우려를 반드시 동반하게 된다. 물론 사건을 단순 보도하는 것이라면 언론과 서기의 구분이 없겠지만. 뉴스(news)라는 단어의 탄생을 놓고 전 세계('N'orth, 'E'ast, 'W'est, 'S'outh)의 모든 일을 전한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곤 하지만, 수용자의 입장에서는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시시콜콜한 사건 사고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ㅡ 보통의 표현대로라면 '주문하지 않은 요리를 강제로 먹는 기분'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뉴스는 상품으로 취급되기 시작했고 특히 상품성이 없는 소식은 뉴스라고 불리기도 어렵게 되었다(심지어 그것들은 지나치게 파편화되고 있다). 이를테면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투쟁과 갈등, 모순의 구조가 존재해야만 그것은 소위 뉴스거리로의 변용이 가능한 셈이다. 이러한 반목과 다툼이 없다면 텔레비전이건 신문이건 그들은 뉴스로 다루지 않는다. 우리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습, 그러니까 어촌의 조용한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누구도 그것을 뉴스라고 여기지는 않을 ㅡ 사건의 중요도를 '낮음'이라고 판단하거나 아예 주시하지 않는다 ㅡ 것이다(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일이 일어난다). 이것의 문제점은, 만약 우리가 특정 지역에서 일상적인 것으로 통하는 게 뭔지에 대해 감을 잡지 못한다면 비일상적 상태를 측정하거나 그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게 무척이나 어렵다는 점이다.(p.98) 다시 말해 우리가 안정적인 상태를 알고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나중에 발생한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ㅡ 비교대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앞서 말한 것처럼 일상이라고 느껴지는 어떤 상태를 우리는 잘 알지 못하며 뉴스를 전달하는 제공자 역시 그런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ㅡ 나는 지금 대차대조표를 보고 있는데 부채와 자본 혹은 흑자와 적자 가운데 오로지 적자만을 주시하며 직원들을 닦달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러한 뉴스의 선별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디를 가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우려와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동시에 충격적인 사건을 더는 충격적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하게끔 면역성을 키운다.



리프먼은 『여론』에서 뉴스의 본성에 관해 이렇게 썼다. 「뉴스는 어떻게 씨앗이 땅속에서 싹트는지를 말해주지는 않지만, 언제 처음으로 싹이 지표면에 나왔는지를 말해줄 수는 있다. 심지어 뉴스는 누군가가 말한 일이 실제로 땅속의 씨앗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말해줄 수 있다. 뉴스는 싹이 예정된 시간에 나오지 않았다는 점을 말해줄 수도 있다.」 그는 뉴스가 사회조건의 반영이 아니라 스스로 헤집고 나오는 어떤 측면에 관한 보도라 말한 바 있다. 어떤 명시적인 것, 확실히 정의할 수 있는 사건의 진행 모습, 그리고 그것이 기정사실이 될 때까지 뉴스는 있을 법한 진리의 바다와 구분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만약 뉴스를 제공하는 언론이 하나같이 같은 사실만을 전달하고 똑같은 결론만을 말한다면 그들 중의 몇은 파산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양성과 그에 따른 관점 차이의 역치를 벗어나 대표성 없이 흐물흐물하고, 객관적 기준의 부재에 따른 '떡밥'에 불과해서도 안 될 일이다. 실제로 우리는 이런 자극적 타이틀과 내실 없는 정보에 피로를 느끼며 기사를 분석해내는 능력 또한 점차 마비된다. 정보량의 증가가 일종의 생산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게 만들지는 않는 것이다(일정 수준을 넘는 정보는 정보가 아니라 축적된 기록에 불과해진다). 태양의 위치가 아닌 시계의 알람으로 방향 상실을 예방하는 오늘날의 뉴스는 과거보다 양도 많아졌고 질적으로도 발전했다. 그러나 거대기업에 대항할 소비자의 간섭이 필요한 것처럼, 뉴스와 정보의 맥락에서도 단순히 제공자와 수용자로 이분되는 논리를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정말 우리 스스로가 뉴스를 거부하고 평화로운 상태, 즉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모습'을 알아챌 수는 없을까? 이어폰을 빼고서 거리와 행인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는 없는 것일까?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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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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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감이 드는 다른 종족을 다루듯 혹은 치매를 앓는 노인을 꺼리듯 아이를 대하는 데이비드를 탓할 수는 없다. 그의 아내 해리엇도 마찬가지. 기어이 태어나고야 만 로즈메리의 아이 같은 그들의 다섯째 아이 벤에 관한 이 소설은, 어떤 유형의 윤리관도 뚫지 못하고(레싱 자신도 신경 쓰지 않는다) 어떤 비난도 쏟아내기가 어렵다. 해리엇은 입을 열어 타이르는 교육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자 어린 벤으로 하여금 자신을 버렸던 공포의 기억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새로운 훈육의 방식을 터득했고, 자신의 바로 그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이번에는 그녀 쪽에서 곧 다가올지 모르는 공포에 치를 떤다. 사악한 유아기의 벤은 보호는커녕 아무것도 갖추어지지 않은 오물의 틈바구니에서 방치되었다가 다시금 모성애를 되찾은 해리엇의 손에 의해 이탈과 합류를 경험한다. 제 형들과 누나들을 위협하던 (여전히 악마 같은) 벤은 바로 위 형의 목을 조르는 것에는 실패했으나 개를 죽이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하루 종일 집 밖을 서성인다. 만약 보통의 가정이라면 어떨까. 노년으로 접어든 남녀와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간 아이들 사이에서는 그들의 아들딸이자 부모인 중간자를 건너 뛰어 모종의 계약이 성립되곤 한다. 가족의 변화, 그러니까 조부모와 손주라는 관계가 탄생하게 되면 그들 사이에는 일종의 동맹 관계가 맺어지고, 가정의 헤게모니가 조부모로부터 부모로 이양되는 시점(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노년에 접어들었다는 것이 분명해지는 시기)에서 그들은 사사건건 간섭하는 부모보다는 늙수그레하며 너그럽기까지 한 조부모와 좋은 한 쌍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다섯째 아이』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개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제 형마저 살해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벤은 외할머니까지 상처를 입게 만들며, 데이비드와 해리엇으로 시작된 이 일가를 파탄으로 몰아넣는다. 그들의 '다섯째 아이'는 한 가정 안에서 정신 이상자 혹은 괴물 취급을 받으며 성장하고 있는 거다. 그리고 레싱은 다운 증후군을 앓는 아이를 등장시킴으로써 벤을 그보다 더 몰아세우기에 이른다. 물론 해리엇이 벤을 되찾아 오는 것을 온전히 모성애를 발로로 하여 진행된 것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반대의 경우에도). 그녀는 어머니의 역할에 집착한 나머지 아이가 아닌 자신을 위해 한 번 버렸던 벤을 미친 듯이 갈구하지 않았나. 그녀는 벤으로 인해 상처받은 다른 가족들을 껴안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벤에게 사랑을 쏟지도 않았다. 수용할 수 있는 범위와 한계, 바로 이 '범위와 한계'라는 것이 간섭함으로써 이 소설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인물들이 이물질로 생각하는 벤에게 나 역시 애정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벤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에게 또한 어떠한 사랑의 감정도 들지 않게 된다. '인간이란 종족은 동물과 달리 (이성이란 녀석이 끼어들어) 야만스럽지 않다'는 특성은 인간 스스로가 정해버린 것이다. 우리는 우리만의 규약을 만들고 때에 따라서는 위대하게 보이는 알쏭달쏭한 함의를 만들었다. 어떤 동물의 어미가 기형의 새끼를 버리는 것을 보고 우리는 혐오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설사 혐오스럽게 보이더라도 그것은 그들만의 문제이니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그건 동물들의 세계잖아.」). 하지만 이것이 인간의 경우라면 어떤가. 그 꺼림칙한 허상과 공포의 세계가 『다섯째 아이』 속에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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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소아와 페소아들 제안들 6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김한민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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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없는 분절과 사뿐하지 않은 불친절함이 잔뜩 짜증이 나 있는 상태를 유지하게 만들고 더러는 화를 내게 한다. 심지어 페소아의 글에 대한 정립된 감상이라는 게 있기나 할까 싶다ㅡ 앞서, 그의 텍스트 자체에 골격이란 게 있기나 할까? 나는 내가 말하려는 것이 잠시 후에 말해진다는 게 겁난다. 지금 하는 내 말들은 내뱉는 즉시 과거에 속할 것이므로(페소아의 텍스트 「선원」의 인용). 페소아의 표현대로 그가 창조한 존재하지 않는 패거리(단순한 필명으로서가 아닌 이명[異名]의 구조적 난립 = 나는 내가 아닌 이 세계의 모든 사람)로 하여금 모든 것을 실제 세계의 틀에 맞춘 대가, 또 자신과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이루어진 각각의 관점에 대해서도 나로서는 확고하게 이해할 길이 없다. 읽으면 읽을수록 생매장되고 있다는 기분만 들 뿐이다. 『불안의 서』만 보더라도, 시작만 놓고 보면, 그것은 괜찮은 경우 『율리시스』처럼 하나의 소설로 읽힐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조이스보다는 친절한 편이니까). 비록 분절되어 있다고는 하나 그래도 『페소아와 페소아들』에 모인 어지러움보다는 쾌적함을 덜 앗아간다ㅡ 그러니까 제목에 '페소아들'이란 단어를 갖다 붙인 것은 실로 훌륭한 착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책장을 넘겨보면 위고의 성(性)에 관한 메모와 같이 알쏭달쏭한 면면이 드러나 있다. 더군다나 '페소아'라는 것 역시 현실의 페소아와는 다른 이명으로서 동작하고 있다고 봐야 할 마당에 말이다(타부키의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을까?). 해럴드 블룸이 어떤 이유에서 페소아를 좋아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는 휘트먼의 연장에 있다는 이유로 페소아의 이명 '알바루 드 캄푸스'를 선호한다고 했다('페르난두 페소아'보다도), 스스로를 문학으로 전환했다는 점에서만큼은 페소아를 한껏 추어올림으로써, 기존의 시에 '당황스러울 정도의 불쾌감'을 보인 태도에 대해 의문을 품는 동시에 그를 칭찬한다. 이는 솔직히 내가 페소아를 바라보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고 해야겠다. 혐오스런 결탁(블룸에 의하면)에 맞선 존재의 숭고함은 차치하고라도, 그를 또렷이 읽어낼 수 있는 재주가 내게는 없는 까닭이다. 아니면 나를 온전히 설득시키지 못한 페소아의 책임에 무거운 압력을 가해야 할 것이다.





덧) 위에서 말한 '위고의 메모'라는 것을 살피면― 그는 여성 편력으로 인한 질투를 피하기 위해 몇 개의 암호를 사용했는데ㅡ 이를테면 n은 나체를, osc는 키스를, pros는 매춘부를 가리키며ㅡ 그것은 다음의 것들처럼 적힌다.

9월 13일: 앙졸라 n을 봄.
9월 17일: Pros 베르테에게 원조비, 피갈 9가, n. 2프랑.
9월 23일: 에밀 타파리, 시르크 가 21번지, 7층 1호. o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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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축구 엠블럼 사전 - 상징과 기록으로 보는 명문 클럽의 역사와 문화 축구 엠블럼 사전 시리즈
류청 지음 / 보누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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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으면 틀린 부분 두어 군데를 바로잡을 수 있었을 테고,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보다 자세한 내용을 담을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을 네 개나 매긴 것은 내가 축구에 관해 까막눈이기 때문이다. 다만 축구 클럽의 엠블럼 디자인 자체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맥락인 것이고.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 국가대표의 A매치가 아니면 축구라는 것 자체에 전혀 관심이 없다. K리그는 물론이거니와 프리미어리그, 분데스리가, 프리메라리가 등에도 눈을 두지 않는다. 그런데 웬걸, 언제부턴가 분데스리가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ㅡ BVB 09 Dortmund ㅡ 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분데스리가는커녕 도르트문트의 경기를 챙겨 보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그들의 엠블럼과 유니폼 그리고 팬들의 카드섹션 이 멋져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심지어 이영표가 한때 도르트문트에 적을 두었던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구글 검색창에 도르트문트를 넣으니 구단 엠블럼이 새겨진 병뚜껑이 나타났다. 어디서 이런 물건이 생긴 걸까. 책을 읽어 보고야 알았다. 1909년 트리니티 유스 소속의 청년들이 팀 보루시아를 창단했는데, 보루시아라는 명칭을 도르트문트 인근 맥주 공장의 이름에서 따왔단다. 엠블럼의 '09'는 당연히 팀이 창단된 연도(1909년)를 나타낸다. 현재 입고 있는 유니폼은 검정과 노랑으로 구성된 줄무늬인데 그래서 그들의 별명은 '꿀벌 군단'이다. 또 얼마 전 팀의 감독인 위르겐 클롭은 지동원의 이름을 가지고 장난을 치기도 했다ㅡ 브랜드 구찌와 발음이 유사한 Gut-Ji(Good-Ji). 도르트문트 홈구장은 8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고 2010/11 시즌에는 리그 우승을 거머쥐며 평균 관중 7만9천 명을 넘겼다. 라이벌 FC 바이에른 뮌헨과의 더비는 데어 클라시커(Der Klassiker)라 불리며 경기마다 경찰들을 긴장케 한다(그래 봐야 '엘 클라시코' 등과 다를 바 없는 명칭일 뿐인 게지).







하여간 이런 '토막 상식'이랄까, 『유럽 축구 엠블럼 사전』은 나처럼 축구 지식이 전무후무하다 할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굉장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하나의 팀 전체를 꿰뚫고 싶다면 추천하지 않으리라. 그럴 바엔 차라리 『레알 마드리드』, 『FC 바르셀로나』, 『리버풀』, 『첼시』 등의 책이 나을 것이다(모두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오로지 나와 같은 이들에게 적합한, 소소한 흥밋거리를 줄 뿐이다. 이를테면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엠블럼에는 범선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맨체스터와 머지 강의 어귀를 연결하는 맨체스터 운하를 상징한다고 한다. 길이 75km의 이 운하는 산업혁명 당시 맨체스터에 번영을 가져왔고, 운하가 뚫리면서 상대적으로 리버풀이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당연히 그들의 지역감정은 나빠지기 시작해 맨체스터와 리버풀의 경기는 언제나 거칠기로 유명하다.(p.17) 세리에A의 AS 로마를 보자. 엠블럼에 들어간 황금색은 로마 가톨릭을, 적갈색은 로마 제국을 상징한다. 문양 속 동물과 두 아이는 로마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늑대와 쌍둥이 형제라는데,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알바롱가의 왕 누미토르의 왕위를 빼앗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동생 아우물리스는 조카들을 모두 죽이고 형의 조카딸인 실비아마저 신전의 사제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군신 마르스와 관계를 맺어 쌍둥이 형제를 낳았는데 두 아이는 죽을 위기를 넘겨 마르스가 보낸 늑대 암컷의 젖을 먹고 자라 이후 쌍둥이 중 하나인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설하는 제국의 시조가 된 것이다.(p.259) 2013/14 시즌을 앞두고 함부르크 SV에서 거취를 옮긴 손흥민의 팀 바이어(바이어? 바이엘?) 04 레버쿠젠은 어떨까. 독일을 대표하는 제약 및 화학 기업인 바이엘은 레버쿠젠의 모회사로, 엠블럼에도 그 글자(BAYER)가 십자가 모양으로 교차해 들어가 있다. 클럽과 기업의 이야기는 또 있다. FC 바이에른 뮌헨의 엠블럼에는 바이에른 주의 상징인 아가일 문양이 있는데 이는 자동차 회사 BMW의 것과 같다. 바로 BMW가 뮌헨에서 출범한 탓에 그렇단다……. 뭐, 끝도 없이 이어지는데, 이렇듯 축구 클럽 엠블럼 하나에는 신화에서부터 지역성, 팀의 성격, 유니폼의 컬러 등에 이르기까지 재미있고 놀라운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나는 순전히 도르트문트의 엠블럼과 유니폼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시작했지만, 『유럽 축구 엠블럼 사전』을 통해 다채로운 정보까지 얻을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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