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삼바
델핀 쿨랭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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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가 만료된 임시 허가증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당신이 당신인 것을 증명할 수도 없고, 반대로 당신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줄 수도 없으며, 그저 공무원 옆구리의 서류철 바깥에서 맴돌 뿐이다. 갈가리 찢긴 접수증도 마찬가지. 왜? 그쪽 역시 유효기간이 끝나버렸으므로. 종이에 찍힌 숫자놀음, 그리고 급여 명세서와 각종 청구서, 은행계좌 출금 명세서와 같은 '생활의 증거들' 없이는, 당신은 당신이 살아있는 것인지 죽어있는 것인지조차 소리 내어 말할 수 없게 된다. 「이민국 국장은 널 믿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체류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야.」 삼바가 그의 삼촌으로부터 체류증을 '물려받는' 것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신분증이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삶 자체가 없는 것과 같은 의미였을 테니. 더군다나 그가 삼촌의 지하 아파트에서 몰래 자라던 버섯을 낚아채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한 것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다른 어떤 이미지들(거북이나 연어)보다도 생경함이 없다. 가끔 움츠러들거나 쓰러지기도 하지만 버섯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하늘을 향해 직립하려고 하는 까닭에. 소설은 외국인 노동자의 업무상재해나 죽음처럼 심각한 양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주자의 모습을 담백하게 스케치함으로써 더욱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이를테면 그들의 생활상과 '취급'에 분노하기보다 그들이 갖는 심성적 흐름에 동조하게 된다. 『웰컴, 삼바』는 작가 자신이 이민자와 난민을 돕는 시민단체 시마드(cimade)에서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탄생한 소설이지만 '벌집'으로 묘사되는 바티뇰의 격리 상설창구라는 낯설기만 한 장소에서의 각양각색 만남들은, 차라리 이것이 허구로 꾸며낸 문장에 불과했으면, 하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삼바가 구겨진 종이, 음식 찌꺼기, 찌그러진 플라스틱, 과일 껍질, 머리카락 뭉치 등 쓰레기를 분류하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바삐 손을 놀릴 땐, 그는 동시에 자신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다른 사람과 스스로를 분류하는 작업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시커먼 얼굴'인 삼바는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인다. 「제 이름은 삼바 시세예요. 그리고 전 생생하게 살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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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가 알아야 할 것들 마니에르 드 부아 Maniere de voir 시리즈 1
세르주 알리미 외 32인 지음, 이진홍 옮김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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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의 시리자(급진좌파연합)가 집권하고 각각의 상반된 시선이 쏟아졌다. 기존의 정치세력과 기득권층으로 이루어진 질서를 거부한 유권자의 승리로 보는가하면 다른 한편에선 시리자의 집권을 신민당에 느낀 피로감에서 찾으며 앞으로 그리스의 위기는 더욱 심화될 것이라 평했다. 글쎄, 모르겠다. 우리가 여태 정의하고 있는 진보 혹은 좌(左)의 의미가 과격, 반(反)자본, 운동권 등으로 점철되었던 만큼 한국정치에서의 진보는 다른 국가들에서와 다소 다른 양상을 띤다. 한국 보수가 '잃어버린 10년'으로 칭하는 시절도, 나는 얄궂게도 그것이 진보정치였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설령 한국정치가 좌우로 나뉘어있다 한들 아시모프가 『파운데이션』에서 역설했던 '(그럼에도 불구한)끝없는 노력'은 어디에도 없고, 이념이 아닌 현실의 손을 들어주어도 모자랄 마당에 정치공학 운운하며 악다구니를 써 봐야 별무소용이다ㅡ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특기할만한 점 두 가지, 좌파와 우파라는 단어는 진보와 보수라는 단어보다 굉장히 파렴치하고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있는 것과 동시에, 꾸준히 좌파와 진보가 기를 펴지 못해왔던 것에 비해 최근 들어 '보수 =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조금씩 퍼지기 시작했다는 것. 어쨌든 한국정치에서의 진보는 개혁, 자율, 민주, 평등, 자유 등에 관한 한 자신들의 담론을 보수의 그것에서 베끼는 수준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기에 진보는 없다. 급진적이라는 말은 그저 '급진적 선회'에만 쓰였고 자율 역시 '시장의 자율'에 그쳤으며,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활과 인식을 함께해 줄 담화가 사라지는 것을 목도해야만 한다. 대중이 길을 잘못 들었는가, 아니면 정치가 잘못된 길로만 가는 건가.




진보적 정치 이념과 지향성을 하나의 점으로 규정하려 들면, 각자 생각하는 정답을 각자가 주장하기만 할 뿐 어떤 소통도 불가능한 지점을 이내 만나게 된다 (...) '소인은 똑같은 자들끼리 서로 싸운다'는 옛말이 딱 들어맞는 상태인 것이다.

ㅡ 본문 p.303 「우리가 진실로 진보정치를 원한다면」에서




18세기의 사상가 콩도르세는 프랑스 혁명에 걸린 가장 큰 위험은 구제도인 앙시엥 레짐으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계급이 민주주의를 횡령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대담하고 야망 있고 이기적인 한 부유한 계층이 자기들만의 지배로 민주주의를 대신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의 계층이 아니라 국가에서 스스로 모집된 것으로 국가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자기들이 대표하는 국가의 이익이 곧 자신들의 이익과 동일하다는 근거로 국가가 스스로를 주장하고 내세우는 것보다 자신들이 더 잘 대변하고 표현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본문 3부 中 「그들은 누구를 대표하는 걸까?」에서) 무슨 무슨 '주의'를 들먹이기에는 진보건 보수건 이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 같다. 특히 좌파의 정체성의 위기는 꽤나 심각한데, (제발 그 빌어먹을 '통합'이란 단어를 좀 갖다 붙이지 않았으면!) 대중과의 연대감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그들 스스로 분열해버린다. 왜 그들은 늘 불가피하다는 볼멘소리를 하는가? 왜 그들은 늘 불완전하다며 징징대는가? 질질 짜기 전부터,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패배감으로 똘똘 뭉쳐있는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하건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항상 마취된 사람들처럼 보인다. 2년 전쯤 <마니에르 드 부아> 124호에 수록된 「그리스 급진좌파연합 시리자당의 운명」(본문 수록)에서는 이런 문장도 찾을 수 있다. 「이제 노동자, 피고용인, 빈곤층으로 전락한 중간계층을 결집한 거대당이 되어버린 시리자당은 공산당의 심사를 뒤틀리게 하는 것만큼이나 거대 미디어와 그 충견(忠犬)들도 불편하게 한다.」(p.202) 진보이건 좌파이건 대중은 그들에게 역시 일관성을 요구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대중은 그들이 단순히 정체되어있는 현상이나 특권층에게 고춧가루를 뿌리는 것만을, 위의 인용에서처럼 불편하게 만드는 것만을, 바라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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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역사용어해설사전
이은식 지음 / 타오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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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내가 살고 있는 전라북도 익산시(益山市)를 한번 보겠다. 이 『필수역사용어해설사전』에 부록으로 실린 '고대에서 현재까지 지명 변천 일람표'를 들여다보면 이곳의 지명이 현재 익산군(益山郡)이라 적혀 있고, 또한 '지명해설' 부분에서도 '전라북도 익산군'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지난 1995년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되면서 '익산시'로 개편되었으므로 이는 틀린 것이 된다. 이 같은 오류가 또 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책이 사전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까닭에 한 번에 모두 톺아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역사용어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해서 그다음에 생각난 것이 도승지(都承旨)였다. 영화 《광해》에서 주야장천 왕 옆에 붙어있던 그 도승지 말이다. 책에 의하면 그 정의는 이렇다. 도승지란, 조선시대 왕명을 출납하던 승정원의 장관으로 정3품직이며 정원은 1명이고 왕의 측근에 시종하여 전선(銓選)에 깊숙이 관여했다, 고. 한마디로 도승지는 왕의 비서기구인 승정원의 장이라 할 수 있어 오늘날의 비서실장 정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다(철저하게 왕을 보좌하는 임무를 띤다). 그렇다면 대동법(大同法)을 보자. 물론 이도 'ㄷ' 항목에 실려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대동법은 각 지방에서 바치는 여러 공물을 쌀로 통일하여 내게 하는 조세법인데, 토지의 결(結)에 따라 부과하게 되어 필연적으로 양반과 지주들의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이를테면 소득수준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지금의 고소득자들이 갖는 심리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영화에 함께 거론되는 것으로는 호패법(號牌法)도 있다. 이는 오늘날의 주민등록증과 같고 주서, 성명, 직업, 연령, 본관 등을 기입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역사를 다룬 영화나 소설 하나만으로도 그 시대에 통용되었던 용어들이 궁금해지고, 또 얼마든지 이 책을 찾아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을만하다. 아, 끝으로 상참(常參)이 생각난다. 상참이란 매일 아침 대신과 중신 등이 편전에서 국왕을 배알하던 약식 조회. 어딘지 모르게 장관들이 대통령을 쉽게 만날 수 없으며 만기친람(萬機親覽)형 업무 스타일을 비판하는 지금의 모습이 묘하게 겹친다. 그도 그럴 것이 상참은 '매일'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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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와 세이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7
무라카미 하루키.오자와 세이지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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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식이든 그 비슷한 것이든 무엇이든 간에, 나로서는 죽었다 깨도 안 될 말이다. 쇼스타코비치, 디터 체흘린의 베토벤 소나타, 힐러리 한, 야니네 얀센, 율리아 피셔, 오토 클렘페러, 이 정도가 내가 가지고 있는 음반인데, 연주에 사용된 악기 구성이 현저하게 달라지지 않는 이상 잘 구분하지도 못한다. 이를테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설명하는 부분에 '서주에 이어 도도도도 하는 거센 멜로디가 나온다'고 쓴 구절이 있다. 나는 그것을 들으면서도 이 부분인가, 저 부분인가, 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헤맬 정도다. 이런 내 앞에서 클래식 이야기를 하겠다니, 하는 반신반의의 마음가짐으로 책을 펴들었다. 그런데 이 양반들, 주전부리를 옆에 놓은 채 아랫목에서 엉덩이를 지지며 미주알고주알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다. 이따금, 어, 거기, 거기야, 하면서 가려운 등짝을 내미는 것처럼. 몇 곡이라도 모아 책 출간과 함께 음반도 기획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한편, 하루키와 더불어 오자와 세이지라는 사람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클래식 이야기는 그냥 넘어갈 때도 있고 때때로 그건 그래, 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했지만 희끗희끗한(실은 반백에 가깝다) 아저씨의 사람됨만은, 특히 음악에 관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짐짓 비밀스레 느껴지기도 하는 무대 밖 이야기도 역시 좋은데, 하루키가 그의 소설 속에 음악 이야기를 단 한 문장이라도 쓰지 않는 날이 오기나 할까, 하는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기도 한다. 실로 그 때문에 알게 된 음악도 꽤 되니 말이다. 물론 종국엔 그런고로 이 책이 만들어졌다고 봐야겠지만……. 만일 하루키가 자꾸만 자신을 문외한이라 칭하지 않고 진행된 일방통행이었다면 모르나, 담백한 제목처럼 클래식 한 소절이라도 들어봤음직한 사람이라면 썩 괜찮은 이야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어딘지 모르게 두 사람의 '합'도 나쁘지 않고. 때로는 모호한 부분도 있고 때로는 무릎을 치게 만드는 곳도 있어 가만가만 읽다 보면 앞서 말했듯 정말이지 옛날이야기 한 자락을 듣는 것만 같다. 나로 말하면 하루키 스스로 문외한이라 일컫는 것보다도 훨씬 이쪽 이야기에 전무후무한 무(無)지식을 자랑하지만, 클래식은 이런 거야, 이 부분은 이렇게 들어야지, 가 아니라 주먹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실제로 둘의 대담 사이에 그런 장면이 나온다) 설렁설렁 읽기만 해도 기분이 묘해지기 일쑤다. 도톰한 이불 속에 들어앉아서라면 더욱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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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와 수다 떨기 1 명화와 수다 떨기 1
꾸예 지음, 정호운 옮김 / 다연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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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부터 카라바조로구나. 누명인지 무엇인지, 하여튼 살인범이 되어 도망자 신세로 지낸 그 카라바조다. 제멋대로인 성격과 정서불안으로 설명되곤 하는 그의 ‘뎅강 잘린 목’이 기억에 남는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이라고 이름 붙여진 작품인데, 나는 목의 주인이 배우 휴 잭맨을 많이 닮았어, 라고만 생각할 뿐 그림의 이름이나 제목은 전혀 알지 못하던 차였다. 카라바조는 살인범, 도망자, 기사, 탈옥수를 전전하다가 우스꽝스럽게도 열병에 걸려 숨졌다. 그러고 보니 <세례 요한의 목을 벰>에 피로 등장하는 그의 유일한 사인은 어찌 보면 다잉 메시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동시에 그것이 사인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기도 하고. 책에는 고흐를 비롯해 세잔, 르누아르, 렘브란트 등이 나오는데, 내 개인적 취향을 다시 한 번 알게 되는 순간이다. 사실적인 묘사는 물론이거니와 찰나의 포착이 좋은 그림에 마음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어, 그런 측면에서라면 역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카라바조를 으뜸으로 꼽는다. <카드 사기꾼>은, 지난 소더비 경매에서 논란을 일으켰던 바로 그거다(어쩐지 제목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그중에서도 발군이다. 사기꾼 중 하나는 속임수를 쓰기 위해 허리 뒤춤에서 여벌의 카드를 꺼내고, 나머지 하나는 꾐에 넘어가는 남자 뒤에 서서 손가락으로 그의 카드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빤히 쳐다보는 튀어나올 듯한 눈알과 이맛살, 시옷 자 입매가 인상적이다(거기다 구멍 난 장갑까지!). 붉은 입술의 청년은 뭔가 좋은 패가 들어온 것 마냥 미소가 번지기 일보 직전인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카라바조의 그림에 완전히 빠져 이곳저곳을 들쑤신 끝에 결국 찾아내고야 말았다. 도저히 방에 걸어둘만한 공간이 없는데도 주문할까 말까를 계속해서 고민하는 이 멍청함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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