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팡 떼리블 창비세계문학 48
장 콕토 지음, 심재중 옮김 / 창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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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하다며 비난 받았던 무서운 아해들ㅡ무서워하는 아해들.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닌 바에야 서로를 무서워하던 뽈과 엘리자베뜨가 선택한 죽음이 찬사를 받거나 무시 당하거나 하는 문제는 애초부터 결론지어져 있었다. 지저분하고 잔혹한 세계를 구축한 프랭크(『말벌 공장』)가 자신의 섬 여기저기에 구슬, 돌, 볼트, 올무 등을 숨기며 부비트랩을 완성한 것처럼 콕토의 아이들 또한 뗄 수 없는 연대를 느끼며 집 안과 테두리 속에 그들만의 습성을 채워 간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지극히 흉물스럽고 잔혹해서 외려 그것이 아름다울 수 있지 않느냐는 식의 이야기는 이 소설과 작가의 안중에 존재할 수 없는 거다. '그들만의 게임'이라 불리는 것도 실은 정체가 불확실한 유치하기 짝이 없는 그야말로 어린 애새끼들의 그것이고, 아이들이 생활하는 집과 방을 지배하는 공기와 물건들 역시 어딘가로 올라가거나 벗어나는 지렛대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ㅡ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저들과 저들의 생활 양식(그리고 공간)을 두고 비정상이라 손가락질하는 것은 철저하게 그들의 삶에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다. 물론 소설에는 뽈과 엘리자베뜨가 이처럼 은밀하고도 위험한 생활 방식을 택한(그런 생활에 놓인) 이유로 아주 작고 간접적인 요소밖에는 제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우리로 하여금ㅡ이들이 삶의 습속의 거대한 시공간적 흐름을 너무나도 급격히 건너뛰어ㅡ예컨대 영악한 어린아이들의 돼먹지 못한 연출, 강렬하지만 비이성적 의식에만 함몰되도록 몰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콕토의 이 이야기는 바로 그 아이들의 소설이다.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성인으로서의 자각과 각성 혹은 부수적인 이런저런 항목들에 열을 올릴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설령 그와 비슷한 의도가 있었다 한들(절대 그럴 리 없으나) 누구라도 그런 식으로 생각지는 않으리라. 일종의 교훈이나 훈육하기, 더 생각을 곱씹어 아이들에게 무관심에 가까운 정성만을 들이미는 어른들의 자화상 등을 상기하게 만드는 소설 또한 아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부조리함의 한복판에 있는 것인가? 여기에 등장하는 아이들 또한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것이고?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자살뿐이라던 카뮈에겐 뽈과 엘리자베뜨의 '삶에의 무저항'이 마뜩잖게만 여겨질 터다) 콕토는 아무것도, 모든 것도, 허용되는 동시에 허용되지 않는 예측 불가능한 삶, 그저 그것을 보여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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