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의 모험 - 당신이 사랑한 문구의 파란만장한 연대기
제임스 워드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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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문구 클럽의 창설자가 전하는 문구사(史). 문구 클럽이란 것도, 문구사라는 용어도 낯설다. 제임스 워드(바로 그 요상한 클럽을 만든 작자)는 이 책 마지막 장ㅡ그 많던 볼펜은 다 어디로 갔을까ㅡ을 시작하면서 문구의 역사는 곧 인간 문명의 역사이기도 하다고 적었다. 돌이켜보건대 휴대전화와 컴퓨터 자판을 다다다다닥 소리가 나게 두들기는 생활을 시작한 것이 십 년이 조금 넘었을까. 실로 당시 대학 입시를 끝내고 손에 쥔 첫 휴대전화는 딸깍딸깍하는 동작음을 내며 내게 글자를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쓸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런데 웬걸, 컴퓨터와 매한가지로 고장이라도 나는 날에는 머리털을 쥐어 뽑으며 몇 날 며칠을 전전긍긍하게 된 삶 또한 동시에 시작된 날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헨리 페트로스키의 『연필』(더불어 『포크는 왜 네 갈퀴를 달게 되었나』)과 데이비드 리스의 『연필 깎기의 정석』을 지나 이제 제임스 워드의 『문구의 모험』인데, 심지어 그는 영국의 시트콤 <블랙애더>에 나오는 대사 하나를 가져온다. 「부인, 당신 없는 삶은 부러진 연필과도 같습니다. 무의미해요.」(p.148) 이거야 원. 오아시스 없는 사막, 앙꼬(팥소) 없는 찐빵, 김빠진 콜라에까지 비유되는 연필님의 높으신 위상이라니…… 라기보다, 타이틀부터 '문구의 모험'이니 거기에서 연필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이 가당키나 할쏜가. 연필 없는 문구는 줄 없는 거문고요, 구슬 없는 용이렷다.




문구의 역사는 곧 인간 문명의 역사라도 말해도 그리 심한 과장이 아니다. 부싯돌 조각을 나무 자루에 꽂아 원시적인 창을 만들 때 썼던 역청부터 프리트 스틱의 풀 사이에는 (인더스 계곡에서 출토된 자를 써서) 일직선이 그어질 수 있다. 최초의 동굴 벽화에 쓰인 염료와 볼펜에 쓰이는 잉크 사이에도 직선이 그어진다. 이집트 파피루스에서 A4용지 사이에도, 갈대 펜과 연필 사이에도. 생각하기 위해, 창조하기 위해 우리는 뭔가를 적어두어야 하고 생각을 체계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구가 필요하다.

ㅡp.347




하지만 책에서는 연필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고, 공책, 지우개, 엽서, 테이프, 메모지, 스테이플러 기타 등등 하여간 온갖 것들을 죄다 털어놓으려 시도한다. 바로 이 부분에서 400쪽이 채 되지 않는 분량이 아쉽기는 하나, 이마저도 없었다면 몰스킨이란 이름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끝에 지우개가 달린 너무나도 유명한 바로 그 연필의 몸통이 왜 노란색이 되었는지, 도대체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움직이는 것인지 여전히 아리송한 스테이플러의 가뿐가뿐한 동작(그리고 철봉같이 생긴 스테이플러용 침이 어떻게 하나씩 분리되어 내 손가락을 찌르는지)에 대해 누가 말해줄 수 있겠는가. 진공 상태인 우주에서도 잘 쓸 수 있는 펜을 위해 150만 달러를 들여 우주 펜을 개발하거나 vs 같은 문제에 봉착해 그냥 연필을 쓰거나. 이 우스갯소리로 시작되는 '우주 펜'에 관해 읽고 나면 이번엔 우편 봉투와 봉함엽서(봉투 없이 편지지를 그대로 접어 봉하는 방식) 이야기가 쏟아지고, 연필을 쓰는 것 못지않게 깎는 것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고해지면 지우개와 수정액처럼 그 연필의 자취를 흔적 없이 지워버리는 방법이 펼쳐진다. 자, 이쯤 되니 살짝 미안해지기 시작한다. 고작 3백 몇 쪽에 불과한 분량으로 어찌 문구의 모험, 문구의 역사를 왈가왈부할 수 있겠는가 하고 좨치듯 몰아붙였던 것이 조금씩 후회되기 시작한다. 비록 내가 책에 등장하는 문구의 수많은 상표들을 거의 알지 못한다손 치더라도(실제로 모른다), 줄곧 '똑딱이' 모나미 볼펜과 세라믹심을 갈아 끼우는 볼펜, 2B인지 4B인지도 모를 몽당연필 정도만을 사용하고 있는 무지렁이 일반인이라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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