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집
마크 해던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리스 레싱이나 아이라 레빈스럽게― 기괴한 모양으로 뒤틀린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가족이란 무지막지한 명제를 끌어다 쓴 수작 중의 하나라 할만하다. 특히 현실성 있는 이야기가 내 가족과 겹쳐 보였던 까닭에 더욱 그렇게 느꼈을지도. 같은 공간에 거주하는 동시에 함께 밥을 먹으며 지낸다는 사전적 측면에서 보건대, 사실 혈연이든 아니든 간에 얼마든지 가족이 형성될 수 있는 현실세계는 정말이지 그럴싸해 보인다. 오죽하면 식구라는 말의 의미가 ‘한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으로 풀이되고 있을까― 따라서 한자도 ‘食口’라 쓴다. 누군가는 홀로 요양원 수발을 하고, 누군가는 돈을 내며, 누군가는 종교문제로 다투는가하면 또 다른 누군가는 소소한 일탈을 꿈꾸기도 한다. 딱히 손에 잡히는 유형의 무언가가 아니더라도 가족 내부 공동체에서는 언제든지 무형의 분란과 어두컴컴한 그림자가 존재할 수 있다. 도저히 화해의 분위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가족이 여행을 떠난다는 설정에서 미약하나마 웃음거리를 찾으려는 시도를 해 볼 수도 있겠으나, 어딘지 모르게 나는 이 소설에서 당최 그런 것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물론 외양만 보자면 일견 가벼운 느낌의 티격태격함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앞서 말했듯 가족이란 언제나 외부의 것들과는 단절되어 있는 공동체인 까닭이다. 마치 섬에 갇혀 밖으로는 나갈 수 없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때문에 다툼거리가 생기면 언제든 그 갈등은 공동체 내부에서 삭여야만 하건만, 대부분 하나의 갈등은 그대로 없어지지 않고 얼마든지 새로운 갈등으로 대체되곤 한다. 이 갈등은 저 갈등을 가져와 없앨 수 있지만 새로 발생한 문젯거리는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해야만 소멸될 수 있는 거다. 그러므로 꾸준히 그리고 단속적으로 일어나는 갈등은 외부와 차단된― 제한된 공간 안에서 소화해내야만 할 텐데 그것이 말처럼 쉬울 리 없다. 더군다나 그 좁디좁은 공간 안에서는 마치 정치꾼들처럼 편을 가르는 등의 계파싸움이 벌어지기도 하니 말이다. 이처럼 이 영원한 평행선을 구부릴 수 있는 실마리는 좀처럼 찾아내기가 힘들지만, 희한하게도 때때로 외부의 공격에 맞서는 순간이 오면 그들은 하나로 똘똘 뭉쳐 언제 그랬냐는 듯 단결력을 과시하기도 하고……. 지구가 멸망하는 날까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그러나 이해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분명 그건 이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것일 게다. 그게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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