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위의 딸 펭귄클래식 29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심지은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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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브게니 오네긴』의 오네긴이 ‘쓸모없는 사람’의 원형이라면 『대위의 딸』은 그리뇨프의 성장소설이라 봐도 무방할 듯하다. 역사와 판타지(작가의 이상향이라는 점에서)를 버무려 건실하게, 그리고 끝까지 촘촘하고 확고한 의지를 잃지 않기 때문이다 ― 그럼에도 독자의 뒷덜미를 잡는 반전의 통쾌함이 없다는 것에는 첨예한 의견의 차이를 보이겠지만. 끈질기게 삶을 붙잡고 늘어지는 유의 소설은 아닐지라도 그에 못지않게 질긴 사랑 이야기를 보인다는 점에서도 또한 그럴 수 있겠다. 『대위의 딸』은 크게 그리뇨프와 푸가쵸프, 그리뇨프와 마샤, 이 두 가지의 큰 줄기를 지니고 있는데 한편으론 진부한 전형성의 외투를 입었다는 것에 평범성을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하인으로 등장하는 사벨리치의 인물성이 오히려 생동감 있게 다가오기도 한다. 

 

(독자들에게) 제아무리 근거 없는 믿음을 경멸한다 하더라도 인간은 원래 미신에 빠지기 쉬운 존재라는 걸 경험상 다들 잘 알고 계시리라. 

ㅡ 본문 p.26 

 

이로써 이 『대위의 딸』이 다분히(상당히) 유토피아적 결말을 맺게 되는 것도 다소 이해가 간다. 또한 사벨리치의 언행에 맞먹을 정도로 이 작품에 하나의 키포인트를 던져준 것은 바로 ‘토끼가죽 외투’인데, 이것은 훗날 그리뇨프로부터 푸가쵸프에게로, 다시 푸가쵸프로부터 그리뇨프에게로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생명수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1)사벨리치가 작품의 한 변(邊)을 차지하고 있다면 2)토끼가죽 외투는 그 중 하나의 꼭짓점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나는 『대위의 딸』의 진정한 주인공은 그리뇨프보다는 푸가쵸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삼국지』의 주인공이 유비와 조조 중 누구인가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물론 『대위의 딸』의 주인공은 누가 봐도 그리뇨프로 보인다. 작품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며 이야기를 매듭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내러티브를 이끌어나가는 힘은 푸가쵸프에게서 나온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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