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신화 펭귄클래식 14
김시습 지음, 김경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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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금오신화』를 소설사의 첫 장을 연 것과 동시에 또한 비극 소설이라고 본다. 패배를 경험하고 불만을 지닌 작가의 작품을 통해 새로운 카타르시스를 맛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카타르시스는 각각의 주인공인 인간과 귀신이라는 존재를 통해 정서적 ․ 정신적으로나마 현실 타개를 꾀하려 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일련의 이야기들은 범부이면서도 재야인사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의 것이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고, 주인공들은 모두 각기 재주가 있으며 아름답긴 하지만 결국 자신의 욕망을 이룬 다음에는 또 다시 홀로 된다는 점에서도 내가『금오신화』를 비극 소설이라 바라보는 시각에 부합한다. 그렇다면 김시습의 현실에의 불만의 표출이 집약된, 그리고 희비극이 뒤섞여 잘 짜인 시트콤이라 봐도 무방할는지 모르겠다. 이를테면『금오신화』의 다섯 인물들은 결말에 가서도 무엇 하나 손에 쥐고 있는 게 없는 까닭이다. 주인공이 남은 생을 어떻게 살다 떠났는지 알지 못한다든가 아니면 아예 죽음으로써 이야기가 끝나고 만다. 그러니까 그들의 욕망이 이루어지는 순간은 귀신이라는 존재를 만나고부터 시작되는 환상에 불과하다. 그 환상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오면 어김없이 남은 구체적 산물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기껏해야 정신적 위안뿐인 거다 ― 피그말리온의 조각에 대한 사랑에 감동한 비너스가 그에게 선물을 준 것처럼 말이다. 

 

조너선 컬러는 자신의 책 『문학이론』에서 프로이트를 인용하며 동일시를 설명한다. 프로이트에게 동일시는 주체가 타자의 측면을 동화시키고, 그런 타자가 제공하는 모델에 따라 자신을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변형시키는 심리적인 과정이고, 개성이나 자아는 일련의 동일시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동일시와 떨어질 수 없는 ‘욕망’을 미켈 보쉬 제이콥슨의 말로 대신하고 있다. 「욕망(욕망하는 주체)은 욕망의 충족을 허용하는 동일시가 뒤따라오도록 하기 위해 먼저 오지 않는다. 먼저 오는 것은 동일시를 지향하는 경향이다. 즉 욕망을 야기하는 원초적인 경향이다……. 동일시가 욕망하는 주체를 생성시키는 것이지, 그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김시습의 동일시와 욕망이, 환상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금오신화』를 다시 보자. 이것은 현실과 비현실이 포개지는 순간에 탄생한 일종의 흥미로운 한 편의 연극과도 같다(어차피 소설이란 가상의 산물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지 않던가). 왜냐하면 비현실에서의 성공, 즉 현실에서 바라는 것을 작품 안의 비현실에서조차 달성하지 못한다면 이러한 가상의 비현실은 쓸모가 없어지는 것이다. 여기서『금오신화』의 특징 아닌 특징은, 독자는 김시습의 집필 의도를 꿰뚫기 위해 (적어도)안간힘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 이것은 텍스트라는 것이 내포된 독자를 만나 다양한 작품으로 변할 가능성의 여지가 비교적 적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김시습의 실제 삶에 대한 사전정보가 있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다만『금오신화』가 아름답고 소망하던 비현실을 끝내고 결국 현실로 돌아오긴 하지만 여기에 체념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어떤 의지랄까, 인간의 의지와 인간성이란 것을 부정하고 있지 않음과 동시에 문제의식 ― 작가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의 지녀야 할 ‘문제제기’에 대한 인식 ― 이 돋보인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매한 내 머리로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 주인공들의 이름은 각각 양생, 이생, 홍생, 박생, 한생이다. 어째서 죄다 ‘-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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