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아픔 - 투신자살한 아우슈비츠 생존작가의 시집
프리모 레비 지음, 이산하 엮음 / 노마드북스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청년시절 파시즘에 저항하는 이탈리아 레지스탕스 운동과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돼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프리모 레비. 그곳에서 그는 새벽마다 <브스타바치Wstawac!>란 단어 ㅡ <기상>을 뜻하는 폴란드어로 나치가 독일어 대신 즐겨 사용했다 ㅡ 를 들어야만 했다. 명징한 낱말이나 아름다운 은유는 모두 배제되고, 현실감 있는 어구로써 인간의 안락함과 고통과 붉은 피를 노래하기에, 레비의 시는 우리에게 아우슈비츠 철조망의 전기충격을 오롯이 데리고 온다. 

 

왼쪽팔뚝엔 174517번이라는 이름이 새겨지고, 삭발당하고, 구타당하고, 채찍으로 얻어맞았다. 이게 프리모 레비가 아우슈비츠에서 겪은 일상이다. 그러나 위협을 가하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삶의 안락함을 알고 있는 우리 또한 <괴물>이나 다름없다. 그의 시는 고통의 잔상을 서늘하게 전해주며 타인의 고통에 대한 우리의, 즉 살아남은 자들의 악마와도 같은 무신경함을 질책한다. 

 

살점 하나 없이 완벽하게 사라져버린 어린 히로시마의 소녀(「아우슈비츠의 소녀」)를 보고, 100년에 한 번 꽃을 피우고 바로 죽는다는 용설란이 되어 <난 내일 죽음과의 약속을 지킬 거다!>라고 외치고(「용설란」), 밤마다 악몽을 꾸며 먼저 간 동료들에게 애절한 목소리로 잠꼬대를 하며(「살아남은 자의 아픔」) 그 아픔과 슬픔을 역설한 프리모 레비. 그의 시 「그 시절」에서 <함께 걸을 수 있기를 꿈꿨던 / 그 시절의 치열함을 / 난 죽을 때까지 기록하고 싶다>고 했던 그는, 결국 1987년 4월 11일 투신자살 직전에 그 자신의 말대로 유서 대신 「인생연감」이란 작품을 남겼다.

 

 

「인생연감」
ㅡ 프리모 레비


무심한 강물은 하염없이 돌지만 결국은 바다로 흘러가고
거대한 빙하는 표류하면서도 끊임없이 정착을 하려다가
한순간에 미끄러져 어린 생명의 숲들을 지우기도 한다.
바다는 풍요로울수록 더욱 탐욕을 내며 싸우고
태양과 별과 행성들은 언제나처럼 자기궤도를 유지하며
지구별 역시 정교한 우주의 이치대로 돌고 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아니다.
반란의 씨앗에다 지능까지 높다는 그 멍청한 인간들은
항상 불안하고 탐욕스런 나머지 마구 짓밟고 파괴해왔다.
조만간 울창한 아마존 숲과 삶이 꿈틀거리는 이 세상
그리고 마지막엔 따뜻한 인간들의 가슴까지
모조리 황폐한 사막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