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 영역의 확장
미셸 우엘벡 지음, 용경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흡연실을 나와 전철을 타기 위해 나는 정기권을 찍고 오십 미터쯤을 걸어가 선로 앞에 선다. 츄오센中央線은 쾌속이 많아 집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칸다神田, 오차노미즈御茶, 요쓰야만 거치면 바로 신주쿠新宿다. 노란선 안쪽으로 펑퍼짐한 카고 바지를 입은 남자가 서있다. 나는 설마, 하며 그의 바지 속에 구겨 넣은 오른손을 주목한다. 그 속에는 아마도 권총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몇 발이 장전돼있는지 꼼지락거리며 세고 있는 중이다. 잠시 후 벨이 울리고 전철이 들어와 서면, 한 발짝 앞으로 나가 <젠장! 이렇게도 무료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고 소리치면서 자신의 입 속에 조그만 탄환 하나를 박아 넣을 것이다. 무심코 돌아본 자동판매기에 드링크를 손에 쥔 남자가 싱글싱글 웃고 있다. 그가 들고 있는 건 리포비탄D다. 이걸 마시면 비타민 A인지 B때문에 항상 오줌이 노랗게 나온다. 갑자기 아랍인 하나가 그의 얼굴을 엉덩이로 막으며 리포비탄D를 뽑는다. 저 자는 가뜩이나 얼굴이 누런데다가 치아까지 변색되어 있다. 아마도 저걸 많이 마셔서 그러지 않을까 싶다. 사람들이 웅성대고 벨이 울리고 차량보다 바람이 먼저 내 앞을 지나간다. 칼 같은 전철 시간 때문인지 한꺼번에 올라탄 사람들로 내부는 금세 더워진다. 문이 닫히자마자 중년의 남성이 토악질을 해댄다. 이쪽에서는 까치발을 해야만 보인다. 그가 위를 깨끗이 비울 때까지, 마지막에 약간의 얼굴 경련을 겪을 때까지, 스스로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쏟아져있는 것들을 어느 정도 치울 때까지 사람들은 쳐다만 보고 있다(한국이었어도 그랬을까?). 그러나 그의 손수건은 너무 얇고 작아서 그것들을 다 처리하지는 못한다. 순간,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음을 느낀다.


한 개의 거울이 매일매일 똑같은 절망적인 모습만 비춰 준다면,
평행으로 놓인 두 개의 거울은 밀도 높고 순수한 그물망 같은 상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사람의 시선을 세상의 모든 고통 너머에 있는 무한궤도,
그 우주 공간의 순수성 속으로 끌고 간다.

ㅡ 본문 p.180

아마도 이런 글쓰기였을 것이다. 주인공 <나>는, 자기만의 투쟁 영역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을 확장시키지는 못한다(위의 글은 내가 쓴 허구의 이야기다). 역자는 영화 『생활의 발견』을 언급하지만 닮은 구석이라곤 전혀 없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주인공은 선배가 좋아하는 여자와 놀아나고 유부녀를 만나 참을 수 없을만큼 섹스를 한다. 그러나 그는 정작 한 여인에게 같이 죽지 않겠냐며 진지하게 묻는다. 그는 <사람에게 사람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말라>며 <사람은 되기 힘들어도 괴물이 되지는 말자>는 선배의 말을 영화 속에서 몇 번이나 반복하며 자신의 투쟁 영역을 드러내지만, 그것은 우엘벡의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확장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하고 만다. 『투쟁 영역의 확장』은 위에 내가 쓴 상상 속의 이야기에서처럼, 시간은 무미건조하게 흘러가고 삶에의 욕망 자체도 없다. 결국 소설은 도저히 웃을 수 없는 블랙코미디이면서 비관을 향해 달려가는 <확장되지 못할 한없는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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