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러브레터
강혜선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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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않을 님을 기다리며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는 여인을 상상해 보라. 시나브로 저무는 봄날 붉은 꽃처럼 시들까봐 수심에 젖어 있는 여인을 그려 보라.

  

기약하고 어찌 이리 돌아오지 않나요?

뜰에 핀 매화도 지려 하는데,

문득 들려오는 가지 위 까치 소리에

부질없이 거울 보며 눈썹 그려봅니다.

    

有約來何晩

庭梅欲謝時

忽聞枝上鵲

虛畵鏡中眉

   

매화 필 때 만날 것을 약속했으나 매화가 지려 해도 님은 오지 않는다. 어느 날 아침 나뭇가지 위에서 까치가 울자 행여 님이 오시지 않을까 하는 설렘에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해 본다는 것이 이 시의 내용이다. 님과의 재회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면서도 님을 위해 단장하는 여성의 심리가 잘 드러나 있다. 그래서 이 시의 매력은 마지막 구의 부질없이()’에 응축되어 있다.

   

위의 시를 쓴 여성은 이옥봉(李玉峯)이다 본명은 이숙원(李淑媛). 옥봉은 옥천군수 이봉(李逢)의 시녀로 태어나 조원(趙瑗. 1544~1595)의 소실이 되었는데, 임진왜란 직전 35세를 전후하여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원의 현손인 조정만(趙正萬)이 편찬한 <가림세고(嘉林世稿)>의 뒷부분에 <옥봉집(玉峯集)>이 수록되어 있어 그녀의 시를 아직도 읽어볼 수 있다.

   

허균은 옥봉의 시를 맑고 굳세며 여성의 화장기가 없어 가작(佳作)이 많다.”고 평가했으며, 신흠과 홍만종 역시 옥봉이 허난설헌과 더불어 조선 제일의 여류시인이라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그녀의 시는 <명시종(明時宗)>, <열조시집(列朝詩集)> 등에 실려 중국까지 알려졌다.

그런데 이렇게 시를 잘 쓰는 옥봉이 도리어 시재(詩才) 때문에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다.

   

버들 숲 밖 강 언덕에 다섯 필 말이 우는데

술 깨자 근심에 취하여 누각을 내려왔었지.

붉은 봄꽃처럼 시들까 봐 경대를 마주하고서

매화 핀 창가에서 반달 같은 눈썹 그려보네.

   

柳外江頭五馬嘶

半醒愁醉下樓時

春紅欲瘦臨粧鏡

詩畵梅窓卻月眉

 

-흥에 취해 님에게 보내다(漫興贈郞)-

   

1구와 2구에서는 남편이 떠날 때 버드나무 심어진 강둑길로 떠나는 님을 누대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근심에 취해 술을 마시고, 술이 깨면 근심을 잊으려고 다시 술을 먹다가 해가 기울어 누대에서 내려오는 장면을 그렸다. 3구와 4구에서는 낭군과 헤어진 뒤 그래도 부질없는 화장을 새로 한다고 하여 낭군을 기다리는 심정을 넌지시 전하였다.

   

옥봉이 남편에게 준 <운강에게 주다(贈雲江)>라는 시가 있다. 이 작품은 일명 <꿈속의 넋(夢魂)>이라고 전하고, <자술(自述)>로도 알려져 있다.

   

요사이 안부는 어떠신지요?

창가에 달빛 이르면 제 한은 깊어만 가요.

만약 꿈속의 넋이 자취를 남길 수 있다면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겠지요.

   

近來安否問如何

月到紗窓妾恨多

若使夢魂行有跡

門前石路半成沙

   

-옥봉집-

   

운강(雲江)은 남편 조원의 호다. 쉬운 어투로 편지 쓰듯 쓴 시인데, 오랫동안 찾아오지 않는 님을 은근하게 원망하고 있다. 님을 향한 그리움의 정도를 구상화해 낸 결구가 매우 돋보이는 구절이라 했다.

   

옥봉은 어려서부터 집안일이나 길쌈, 바느질 등에는 관심이 없고 글공부와 시 짓기를 즐겼는데, 시집갈 나이가 되어도 혼처를 쉽게 정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조원의 명성을 듣고 스스로 첩이 되고자 하였다고 한다. 그런 옥봉이 소박을 맞았는데,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는 그 사연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어느 날 평소에 옥봉을 잘 알고 있던 이웃의 백정 아낙이 찾아와서 자기 남편이 남의 소를 잡다가 끌려갔으니, 형조에 소장(訴狀)을 써달라고 애걸했다. 옥봉은 그녀를 위해 소장에 세숫대야로 거울을 삼고, 참빗에 물을 발라 빗습니다. 첩의 몸 직녀가 아닐진대, 낭군이 어찌 견우이겠습니까?”라는 시구를 써 주었다. 이 소장을 본 당상관 들은 곧 남편을 석방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안 조원은 옥봉이 지나치게 재주가 승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그녀를 내쳤다 한다. 아마도 위의 시는 옥봉이 남편 조원에게서 내쳐진 다음 그가 다시 자신을 찾기를 바라며 쓴 것이 아닌가 싶다.

   

후에 위 작품이 널리 알려져 꿈에 다닌 길이 자취 곧 날 양이면, 임의 집 창밖이 석로(石路)라도 닳으련마는 꿈길이 자취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라는 시조로 탈바꿈해 노래로 불리기도 하였다. 또한 서도소리의 대표격인 <수심가(愁心歌)>에는 약사몽혼(若使夢魂)으로 행유적(行有跡)이면 문전석로(門前石路)가 반성사(半成沙)로구나 생각을 하니 임의 화용(花容)이 그리워 어이나 할꺼나.”로 삽입되기도 하였다. P.14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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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향기 2017-04-03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옥봉의 <몽혼(夢魂)>이란 시를 보면 황진이의 <상사몽(相思夢)>이란 작품이 연상됩니다. 둘 다 조선을 대표하는 여류시인이고, ‘꿈 속‘이라는 시의 배경이 비슷해서 그런지 저는 두 작품의 느낌이 아주 비슷하게 다가오네요.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만나볼 길은 꿈길밖에 없는데
내가 임 찾아가면 임도 날 찾아 떠나셨다고.
바라건대 다른 날 밤 아득한 꿈에서라도
똑같은 시각 서로의 꿈길을 떠나 도중에서 만났으면.

相思相見只憑夢
儂訪歡時歡訪儂
願使遙遙他夜夢
一時同作路中逢

시골향기 2017-04-06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6세기는 조선조의 르네상스라 불릴 정도로 문화적 융성기였습니다.
유학자로 이황, 이이, 조식, 서경덕, 이언적, 조광조, 김성일 등이 활약을 펼쳤고, , 문학(예술)가로 이지함, 정철, 한석봉, 유성룡, 허준(의술), 허균 등 쟁쟁한 분들이 있었지요. 그리고 엄격한 성리학의 시대였지만, 신사임당, 황진이, 허난설헌, 이매창, 홍랑, 이옥봉 등 조선의 대표적 여류시인들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기이기도 하고요. 정치적 혼란기임에도 문화적 절정기를 꽃피웠던 것은 수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지방으로 물러난 성리학자들의 문학적 탐구가 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중국의 미래 - 49가지 단서로 예측한
마르테 셰르 갈퉁.스티그 스텐슬리 지음, 오수원 옮김 / 부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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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역사적, 문화적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여태껏 우리는 중국의 진실한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거대한 영토와 인구를 가진 대국이라는 허울만 볼 뿐. 저자는 49가지 관점을 통해 중국을 샅샅이 해부한다. 양면의 중국과 그들의 미래를 알기 위해 꼭 읽어야 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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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김민철.김승은 외 지음, 민족문제연구소 기획 / 생각정원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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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인의 고통과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섬, 군함도, 섬의 모양이 군함을 닮았다고 하여 군함도라 부른다는데, 19세기부터 탄광사업이 번영했던 섬으로 1940년대 초반 태평양전쟁이 끝나가던 무렵 수많은 조선 징용인들이 군함도에 끌려와 강제노역을 당했다.

 

이렇듯 조선사람에겐 수모의 땅인 군함도를 우리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20157월 일본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켰다. 조선 청년들의 한맺힌 사연이나 고된 노동의 아픔을 묻어두고 그들은 군함도를 세계적 관광지로 개발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민의 공분을 샀다. 일제강점기 35년의 기록은 사실적 역사로서의 기록으로 영구히 남아야 한다. 독일의 유대인 수용소가 나치의 학살을 증빙하는 자료로 길이 남겨졌듯, 일제의 강제동원으로 젊은 나이에 쓰러져간 조선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군함도의 진상은 세계만방에 알려져야 하고 강제징용의 자료로써 인류문화재로 길이 보존되어야 한다.

 

일본은 군함도를 등재를 추진하면서 조선인 강제징용 사실은 일절 언급하지 않고,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으로 철강, 조선, 탄광이 세계유산으로 최종 등재하였다. 조선인 57,900여 명이 강제 동원된 바 있는 군함도(하시마 탄광)의 노동착취 사실을 숨기고, 일본의 근대 문화유산을 선전하는데 군함도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바다 한 가운데 군함도라는 작은 섬에 조선인 수 만 명이 강제로 끌려와 하루 12시간 이상씩 탄광 속에서 강제노역을 당한 역사적 아픔을 돌아보면 결코 일본이 군함도를 자신들의 산업화의 일등공신으로 선전하는 일을 좌시할 수 없다. 청운의 꿈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 청년의 꿈을 짓밟고 임금착취 및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 많은 조선인이 죽어간 통한의 섬, 군함도를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다.

 

늦었지만 근래군함도를 영화로 만들어 국민들에게 그 실상을 알린다고 하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 죄 없이 끌려가 이국의 바다 낯선 섬에서 죽어간 원혼을 달래고, 그들의 가족이나 후손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잔악한 실상이 낱낱이 밝혀져야 한다. 일본이라는 민족이 수 천 년 동안 우리나라를 침략하고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듯이, 앞으로도 충분히 역사를 조작하고 침범할 우려가 높다. 한국 고유의 땅 독도를 올해부터 일본의 학생들이 배우는 역사교과서에, 예부터 일본의 땅이라 기술하고 한국이 불법점령하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아마 수 십 년이 지나지 않아 독도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여 세계적 여론을 등에 업고 한국과 영토 전쟁을 벌일지 모를 일이다.

 

군함도가 일제강점기 한국민이 당한 피해상황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망정 이제 당시의 산증인이 하나 둘 사라져가는 현실에서 군함도의 역사적 현실을 길이 후손들에게 남길 필요가 있겠다. 저자는 수 십 년에 걸쳐 현장을 답사하고 기록들을 모아 후대에 길이 남을 군함도의 역사를 생생히 기록했다. 우리 후손들은 다시 있어서 안 될 치욕의 역사를 올바로 배우고, 일본의 끊임없는 역사부정과 영토야욕을 철저히 분쇄해야 할 것이다. 일본은 지금도 위안부 소녀상 설치 반대 및 2016.12.28. 위안부 합의 이행을 요구하고 있는데, 우리는 너무 안이하게 대응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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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새날 - 불교 명절에 담긴 수행 이야기
법륜 지음 / 정토출판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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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 날이 되면 사찰은 물론, 거리 곳곳에 연등을 달고 부처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이렇게 연등을 켜게 된 유래가 되는 이야기가 경전에 있습니다. 부처님이 코살라국의 사위성에 계실 때 일입니다. 프라세나짓왕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이 안거에 드는 석 달 동안 옷과 음식과 침구와 약을 공양했고, 안거가 끝나는 날에는 수천 개의 등불을 켜서 연등회를 베풀었습니다.

  

사위성에는 성실하지만 몹시 가난한 한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연등회가 있던 날, 여인은 문득 왕은 이렇게 큰 복을 지으니 내생에도 큰 복을 받겠구나. 나는 이생에도 박복해 복을 지을 수 없으니 내생에도 박복하겠지. 나도 등불을 하나 켜서 공양을 올리고 싶다.”

  

여인은 그날 남의 집에 가서 일을 해주고 받은 동전 두 닢으로 기름을 샀습니다. 기름집 주인이 기름을 무엇에 쓰느냐고 묻자 여인이 대답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처님을 뵙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가난해서 부처님께 공양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작은 등불이라도 공양할까 합니다.”

 

여인은 작은 등불을 가지고 부처님 처소로 갔습니다. 부처님 처소 주변에는 이미 수많은 등불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구석진 곳에 등불을 걸어놓고 기도했습니다.

보잘것없는 등불이지만 이 공덕으로 다음 생에는 나도 부처가 되겠습니다.” 밤이 깊어가자 휘황찬란한 등불들이 하나 둘씩 꺼져갔습니다. 그런데 워낙 보잘것없어 잘 보이지도 않던 여인의 작은 등불만은 꺼지지 않고 밝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등불이 모두 꺼지기 전에 부처님이 주무시지 않을 것이므로 여인의 등불을 끄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등불은 아무리 해도 꺼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부처님이 아난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질없이 애쓰지 마라. 그것은 비록 작은 등불이지만 마음 착한 여인의 넓고 큰 서원과 정성으로 켜진 것이기에 꺼지지 않을 것이니라. 그 여인은 그 등불의 공덕으로 오는 생에는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다.” 보잘 것 없는 등불 하나를 공양한 가난한 여인이 다음 생애 부처를 이룰 것이라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들은 왕은 급히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부처님, 그 여인은 등불 하나를 켠 공덕으로 부처가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석 달 동안이나 부처님과 스님들께 보시하고 수천 개의 등불을 켰습니다. 저에게도 미래에 부처가 되라는 수기를 주십시오.” 그러자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대왕이여, 불도란 쉽고도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보시로도 백천을 얻을 수 있지만, 백천의 보시로도 하나를 얻지 못하기도 합니다. 불도를 얻기 위해서는 백성을 위해 부디 선정을 베푸십시오. 많은 사람에게 보시하고 선행을 쌓으며 스스로 겸손해 남을 존경해야 합니다. 하지만 절대로 자신이 쌓은 공덕을 내세우거나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이와 같이 오랜 세월을 닦으면 훗날 언젠가는 부처가 될 것입니다.”

  

왕은 부처님을 위해 연등회를 연 것을 자신의 공덕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왕의 공덕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쌓은 공덕은 그 가난한 여인이 쌓은 공덕보다 작습니다. 왕이 올린 음식과 등불은 모두 백성들의 노력이며 백성들의 공덕인 것입니다. 가난한 여인은 비록 동전 두 닢 어치의 등불을 올린 것에 불과하지만, 그 여인에게 동전 두 닢이란 밥을 굶으면서 올린 전 재산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여인은 등불을 밝히며 다음 생에 복을 달라고 빈 것이 아니라, 부처가 되겠다는 서원을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가난한 여인의 서원을 본받아 부처님 오신 날에 나도 부처가 되리라는 큰 서원을 다짐하며 등불을 밝혀야 합니다.

   

등불은 어두울수록 빛이 납니다. 밝을 때에는 밝혀봐야 표도 안 납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혼탁하고 어지러울수록 보살은 빛이 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세상이 이렇게 혼탁하고 어지러운데 나 혼자 잘하면 뭐하나 하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혼탁할수록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은 더 빛이 나게 됩니다.

   

연등을 밝히는 보살은 진흙속에서 피어나는 연꽃과 같습니다. 그러니 자꾸 세상 탓하지 말고, 세상이 혼탁할수록 더욱 귀한 존재가 되십시오, 세상이 어둡다고 말하지 마세요. 내가 등불이 되겠다고 마음먹으면 세상이 어두울수록 나의 등불은 더욱 빛이 납니다. P.6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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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莊子) - 그림으로 쉽게 풀어쓴 지혜의 샘
장자 지음, 완샤 풀어쓴이, 심규호 옮김 / 일빛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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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조상(曹商)이란 사람이 살았는데, 왕을 위해 사신으로 진나라에 갔다. 송나라 왕은 그가 떠날 때 수레 몇 대를 주었는데, 진나라 왕은 그를 반기며 수레 백 대를 주었다. 송나라로 돌아와서 장자를 만난 조상이 말했다. “가난하고 누추한 뒷골목에 살면서 가난하게 짚신이나 삼으며, 비쩍 마른 목에 누렇게 뜬 얼굴로 사는 것은 내가 잘하는 일이 아닐세. 그러나 만승(萬乘 : 일만 대의 수레. 혹은 천자의 자리)의 군주를 한 번 깨우쳐주고, 백승의 수레를 얻는 일은 내가 잘 하는 일이지.” 이에 장자가 대답했다.

 

진나라 왕이 병이 나서 의사를 불렀는데, 종기를 터뜨려 고름을 빼준 자에게는 수레 한 대를 주고, 치질을 입으로 빨아서 고쳐준 자에게는 수레 다섯 대를 준다고 하더군. 더러운 곳이면 곳일수록 수레를 많이 준다고 하니, 그대도 진나라 왕의 치질을 빨아준 것 아닌가 싶네그려. 어찌하여 그렇게 많은 수레를 얻으셨는가? 에이, 더러우니 당장 꺼지게!”<열어구(列御寇)>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운명은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한 부류는 권귀(權貴)에 붙어 온갖 아부를 다 떨며, 총애를 얻기 위해 영혼을 팔아도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춘풍에 돛을 단 듯, 절개를 지키는 청고(淸高)한 이들을 무능한 무리라고 배척하며, 조롱과 풍자를 능사로 삼는다. 이런 부류가 패도(覇道 : 인의를 무시하고 무력이나 권모로써 다스리거나 공리를 탐하는 일. 왕도의 상대어)를 휘두르게 되면, 통치 계급의 환영을 받아 높은 자리를 보장받는다. 이들을 일러 방흉(幇凶), 즉 흉악한 짓거리를 방조하는 무리라고 일컫는다.

   

다른 한 부류는 권귀를 멸시하고 명성이나 이익을 분뇨보다 못한 것으로 간주한다. 차라리 평생 빈궁하게 살망정, 권세 앞에 허리를 굽신거리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양심과 자유를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평생 실의하여 뜻을 얻지 못하니, 이들을 일러 반역(叛逆), 즉 권귀에 거스르는 이들이라고 한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부귀와 현달, 그리고 빈천과 곤궁으로써 사회의 불공평을 폭로하고 있다. 장자는 조상의 예를 들어 권세에 아부하는 자들이 도리어 청렴하고 결백한 자들을 비웃는 세태와 그런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노신(魯迅)이 말한 바와 같이, 세상에는 노예가 되려고 하나 되지 못하는 사람과 그냥 앉아서 노예가 되는 사람이 존재한다. 노예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사람은 노예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동료들에게 비교적 겸손하다. 그러나 그냥 앉아서 노예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다르다. 주인에게 칭찬을 받았다는 이유로, 즉 가장 노예다운 노예가 되었다는 이유로 우쭐거리며 동료들을 깔보고 무시한다.

   

물론 조상은 후자에 속하는 노예다.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진 찬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득의양양하여 우쭐대며 장자를 비웃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자가 볼 때, 조상이 얻은 것(재물)은 일고의 가치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그것은 인격에 대한 모독이었다. 물론 스스로 원해서 노예가 되고자 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모욕이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영광이다. 다른 이들은 아무리 얻고자 해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도 이런 이들이 적지 않다. 누군가의 기만과 억압으로 노예 자리에 안좌(安坐)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오만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다. 말단 관직이라도 일단 관직에 오르면, 자신이 대단한 인물이나 된 양 기고만장하여 다른 사람 위에 서려고 한다. 이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동료에게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아예 모른 척하거나 엄숙한 얼굴로 공무 중임을 주지시킨다. 그는 의도적으로 아는 이들을 피하면서 혹시라도 부탁이라도 하면 어쩌나 꺼려한다. 그런 사람이라면 남이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을 끊임없이 불평하고 비난하는 한편, 자기가 그 자리에 오르면 더 악독하게 하면 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P.22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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