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지 않고 이기는 기술 묵자 - 고전에서 배우는 지혜 01 고전에서 배우는 지혜 1
친위 지음, 이영화.송철규 옮김 / 예문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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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금 여기에 한 사람이 있는데, 자식이 열 명 있다 하자. 한 사람이 농사를 짓고 아홉 명은 들어앉아 있다면 농사짓는 사람은 더욱 다급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먹는 사람은 많은데 농사짓는 사람은 적기 때문이다. 지금 천하엔 의로움을 행하는 이가 없으니 그대는 마땅히 내게 의로움을 권해야 할 것이거늘 어째서 나를 말리는가?

 

今有人於此, 有子十人, 一人耕而九人處, 則耕者不可以不益急矣. 何故?

則食者衆而耕者寡也. 今天莫爲義, 則子如勸者也, 何故止我? <묵자・귀의>

 

 

윗글은 묵자(墨子.BC480~BC390)의 친구가 “지금 천하에 의를 행하는 자가 아무도 없는데 자네는 왜 하필이면 죽을 고생하면서 의를 행하려 하는 것인가?” 라고 묻자 묵자가 친구에게 한 대답이다 . 묵자의 말은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사람들의 사상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며 오늘날에는 물질을 중히 여기고 정신을 가벼이 여기는 황금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묵자는 남의 장단에 춤을 추어서는 안 되며, 사회가 홀대하고 경시하는 일일수록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이 포기한 것을 취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영리한 사람의 현명한 선택이다. 하지만 이를 해내기란 쉽지 않다. 사람의 사유 능력은 제한되어 있고 사회환경의 영향과 유혹을 물리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사회에는 조급하게 무언가 이루어내려는 유행병이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룻밤 사이에 이름을 날리려 하고, 하룻밤 사이에 벼락부자가 되려 한다. 많은 젊은이들이 스타를 꿈꾸고 텔레비전 아나운서를 꿈꾼다. 해마다 방송학원, 희극학원, 영화학원 등에서는 수천 수만의 미남 미녀들을 학생으로 모집한다. 그들 가운데 대다수가 스타의 화려함만 보았지 그 배후에 숨겨진 노력과 피땀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진정한 스타가 되기 위해서는 꾸준히 노력하는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무대 위에서 1분을 서려면 무대 아래서 10년간 열심히 배워야 한다. 아름다운 꽃은 하룻밤 사이에 피어난 것이 아니다. 이런 젊은이들은 에디슨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나는 지금까지 잔꾀를 부리지 않았다. 내가 발명한 것들 중 사진술 이외에는 한 번도 행운을 맞이한 적이 없다. 나는 일단 결심하면 어느 방향으로 노력해야 할지를 알고 용감하게 전진한다. 실험을 거듭하여 성공할 때까지 계속한다.”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고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꾸준히 움직이는 거북이가 영리한 토끼를 능가하듯이 무슨 일이든지 멈추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지 않으면 실패한다. 영국 극작가 세익스피어는 "도끼는 작지만 여러 번 내리 찍으면 결국에는 크고 굳는 나무를 잘라낼 수 있고, 힘과 인내심이 싸우면 인내심이 항상 이기게 되어 있다."고  말했다. 작은 벌레가 수백 년 된 나무를 쓰러뜨릴 수 있었던 것도 꾸준히 나무 뿌리를 파고 드는 인내심 때문이었다.  P.122, 12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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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향기 2015-07-30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국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 중에서 저는 묵자를 제일 좋아합니다. 남의 부모를 자신의 부모처럼 사랑하고, 남의 아이를 자기 아이같이 돌보기를 주창했던 묵자, 정강이의 털이 다 닳도록 남을 위해 몸소 봉사를 실천했고 전쟁을 지독히도 싫어했던 평화주의자인 묵자는 다른 어떤 사상가보다도 뛰어나다는 생각입니다. 겸애와 박애, 근검절약를 주장했던 그의 사상이 현실과 동떨어진 너무 이상주의에 치우쳤다는 평가는 있지만요^^
 
왕안석시선 - 당대편 305 중국시인총서(문이재) 305
류성준 지음 / 문이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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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라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많이 들어온 우리나라 사람들은 권학문을 읽으면 너무 진부해서 싫증이 날 수도 있겠다. 그래도 요즘 사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공부와 경쟁의 연속이니, 배우지 않고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의 영향 아래 문()을 중시하는 풍조 때문인지,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기술대국을 외치면서도 문()을 숭상하는 관료주의 문화가 팽배해 있다. 그렇다고 해도 기술이든, 학문이든 열심히 배우지 않고는 일류가 될 수 없다. 책을 읽지 않으면 깊은 지식과 지혜를 얻기 어렵다는 뜻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권학문을 남긴 사람은 숱하게 많지만 동양에선 순자, 도연명, 진종황제, 주자, 왕안석 등이 뭇사람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나는 그 중에서도 왕안석의 권학문을 가장 좋아한다.  

 

 

                  勸 學 文 (권학문 : 배움을 권하는 글)

 

                                           왕안석( 宋.1021~1086)

 

 

讀書不破費 讀書萬倍利 (독서불파비 독서만배리)

독서는 비용도 들지 않고 책을 읽음으로 만 배의 이득이 생긴다.

 

書顯官人才 書添君子智 (서현관인재 서첨군자지)

글은 사람들의 재능을 밝혀주고 글은 군자들의 지혜를 더해 준다.

 

有卽起書樓 無卽致書櫃 (유즉기서루 무즉치서궤)

돈이 있으면 서재를 짓고 돈 없으면 서궤라도 갖춰라.

 

窓前看古書 燈下甚書義 (창전간고서 등하심서의)

창가에서 옛글을 보고 등 밑에서 글 뜻을 찾아라.

 

貧者因書富 富者因書貴 (빈자인서부 부자인서귀)

가난한 사람은 글을 통해 부유해지고, 부유한 사람은 글을 통해 귀하게 될 것이니

 

愚者得書賢 賢者因書利 (우자득서현 현자인서리)

어리석은 사람은 글로 어질게 되며 어진 사람은 글로 이롭게 될 것이다.

 

只見讀書榮 不見讀書墜 (지견독서영 불견독서추)

다만 글을 읽어 영화를 누리는 것은 보았어도 글을 읽어 실패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賣金買書讀 讀書買金易 (매금매서독 독서매금이)

금을 팔아 책을 사 읽어라. 책을 읽어두면 금을 사기 쉬우리니

 

好書卒難逢 好書眞難致 (호서졸난봉 호서진난치)

좋은 책은 죽을 때까지 만나기 힘든 것이고 좋은 책은 정말 얻기 어려운 것이니

 

奉勸讀書人 好書在心記 (봉권독서인 호서재심기)

글 읽는 사람들에게 받들어 권하노니 좋은 책은 마음에 기억해 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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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창 평전 - 시와 사랑으로 세상을 품은 조선의 기생 한겨레역사인물평전
김준형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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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창과 홍랑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에게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미친 듯 몸부림쳐 천릿길 달려가 겨울 한철 아끼듯 품었던 사랑. 봄날에 문득 풀꽃처럼 내놓고 돌아선 여인이, 돌아보고 돌아보다 못내 아쉬워 길가의 버들가지를 꺾어 들고는 저 멀리 가고 있을 그에게 보내네. 왜 하필 버들가지던가? 피리곡인 <절양류>를 떠올린 것이라네. 고죽이 마지막으로 불어주던 그 곡조, 버들가지 보니 눈물이 왈칵 솟았네. 왜 가려 꺾어 보냈던가? 저마다 물오른 가지건만 더욱 귀한 것을 보내고 싶었네. 내 마음 한 가닥 같은 가지를 골랐다네. 왜 자시는 창 밖에 심어두라 하였는가? 굳이 님더러 방안에 두라고는 못하겠네. 세상의 이목이 있으니 한데라도 심어주오. 다만 동침하던 그 눈길로 가끔씩만 보아 주오. 왜 새잎을 날 인가도 여기소서라 했던가? 여자 많은 서울에서 어찌 나만 생각하랴? 가끔씩 나를 잊어도 나무라지 않겠으니, 가끔은 저 버들을 홍랑이라 여겨주오.

 

이 시조는 조선 선조때 홍원 출신 기생 홍랑(洪娘)이 한결같이 사랑했던 사람, 최경창(崔慶昌, 1539~1583)과의 이별을 하고 나서 보낸 시조다. 홍랑은 선조 때의 이름난 기생으로 태어난 때와 죽은 때는 알려져 있지 않다. 홍랑이 유명한 이유는 최경창과의 사랑 때문이다. 최경창은 호는 고죽(孤竹)으로 선조 6(1573), 함경도 북도평사(北道評事)로 근무하였을 때 홍랑을 만나 사랑하게 되었다. 이들의 사랑에 대한 일화는 조선시대 기생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조선 해어화사에 소개되어 있는데, 홍랑은 최경창과 사랑에 빠지지만 최경창이 임기가 끝나 경성을 떠날 때 홍랑은 최경창을 따라서 함경도 함흥까지 따라와 이별하고 나서 앞의 시를 최경창에게 보내 자신의 마음을 전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화답 시로 쓴 송별시에도 고죽(孤竹)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송별(送別)

 

말없이 마주보며 난초를 주노라 (相看脉脉贈幽蘭)

이제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랴 (此去天涯幾日還)

함관령의 옛노래를 부르지 말라 (莫唱咸關驀時曲)

지금까지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至今雲雨暗靑山).

 

왜 하필 유란(幽蘭 : 그윽한 난초)를 주었나? 그대가 피리곡인 <절양류>를 청했으니, 나는 거문고곡인 <유란곡>을 청했다네. 버들피리 위에 난초 잎이 슬프게 하늘거리네. 왜 비구름은 까맣게 모였는가? 지난 겨울 나눈 석달의 운우(雲雨 : 남녀의 사랑). 이 봄에는 눈물과 한숨으로 변했네. 한꺼번에 몰려든 슬픔에 눈앞이 캄캄하다네.

 

서울로 돌아간 최경창은 몸져 눕게 되었다. 어쩌면 상사병인지도 모르겠다.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7일 밤낮을 걸어 한양에 도착한다. (그런데 이런 두 사람의 이야기가 조정에 들어가 최경창은 파직을 당한다. 때는 명종비의 죽음으로 국상기간, 더욱이 동 서인으로 나뉘어 당쟁이 자리 잡던 시절이라 이들의 행각이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 홍랑의 일로 파직 당한 뒤, 최경창은 평생을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 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만다. 이승에서 그들의 사랑은 신분의 차이와 죽음으로 계속될 수 없었다. 최경창이 죽은 뒤 홍랑은 스스로 얼굴을 상하게 하고 그의 무덤에서 무려 9년 동안의 시묘살이를 시작한다. 평생 세 번을 만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산 홍랑은 결국 죽고 만다. 홍랑이 죽고 난 뒤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한 집안 사람으로 여겨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유희경과 계랑(이매창)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 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계랑(癸娘or桂娘.1573~1610)은 조선시대 3대 기생 중 하나로 호는 매창.

부안의 기녀로 고을 아전의 딸. 계유년(癸酉年)에 태어났기에 계생 또는 계랑이라 불렸다고 한다. 시와 노래에 능하고 거문고를 잘 탔다. 특히 한시에 능했는데 시조 및 한시 70수가 전해져 내려온다. 기녀의 신분이었기에 많은 사대부와 교류하였으나, 그녀의 성품은 고결하고 절개를 지켰다고 한다.  

 

매창은 촌은 유희경(劉希慶. 1545~1636)과 각별한 애정을 나누었다.

촌은은 일찍이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는데 매창을 보고 파계하였으며 서로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계속될 수 없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촌은이 의병을 이끌고 전쟁터로 나갔기 때문에. 그를 그리워하며 매창은 시조를 지었고 그 중 유명한 작품이 이화우 흩뿌릴 제로 시작되는 시조다. 매창에 대한 촌은의 사랑도 각별하여 그는 매창을 그리는 시 여러 편을 지었다. 그 중 <도중억계랑>은 매창과 헤어진 후 객지에서 길을 가다 문득 매창이 그리워 쓴 시라고 한다.

 

도중억계랑(途中憶癸娘 : 길에서 계랑을 생각하다)

 

고운 임 이별한 후 구름이 막혀 (一別佳人隔楚雲)

나그네 길 심사가 어지럽다오. (客中心緖轉紛紛)

파랑새가 오지 않아 소식 끊기니 (靑鳥不來音信斷)

벽오동 찬비 내리는 소리 차마 듣지 못하겠네. (碧梧凉雨不堪聞)

 

매창은 촌은과 헤어진 뒤 실의에 잠겨 삶의 의미를 잃었고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병을 얻었다. 훗날 허난설헌의 동생인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도 매창과 오래 교류하였으나 남녀관계가 아닌 시문과 인생을 함께 논하는 교우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허균이 매창을 처음 만난 것은 1601년인데 그는 매창이 재주와 정이 있어 더불어 이야기할만하여 종일 시와 노래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10년간 서로 돈독한 우의를 다져왔고 매창은 허균의 영향을 받아 선계를 지향하는 시를 몇 편 짓기도 하였다.

 

중우인

 

일찍이 동해에 시선(詩仙)이 내렸다는데

지금 보니 말은 고우나 그 뜻은 서글퍼라.

구령선인 노닐던 곳 그 어디인가.

 

삼청 세계 심사를 장편으로 엮었네.

호중 세월은 차고 기울지 않지만

속세의 청춘은 소년시절 잠깐이네.

 

훗날 만일 선계(仙界)로 돌아가게 되면

옥황 앞에 청하여 임과 함께 살리라.

 

그녀가 죽은 뒤 허균은 그녀를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계랑은 부안의 기생이다. 시를 잘 짓고 문장을 알았으며 노래를 잘 부르고 거문고를 잘 탔다.

성품이 고결하여 음란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여 거리낌 없이 사귀었다. 비록 우스갯소리로 즐기긴 했지만 어지러운 지경에까지 이르진 않았다." 는 주가 있어 매창의 성정이 개끗하고 맑아 몸가짐이 정숙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가 죽은 지 45년만인 1655년에 무덤 앞에 비가 세워졌고, 58년 뒤인 1688년에는 시집 <매창집>이 간행되었다.

 

 

백석과 자야

 

일제시대의 시인 백석(1912~1996)의 본명은 백기행. 일본 아오야마 학원에 유학한 영문학도이자 시인이었던 백석은 귀국후 조선일보에 잠시 입사하였다가 사퇴하고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전근한다. 함흥은 백석에게 바리끼노(지바고와 라라가 마지막 며칠을 지냈던)였다. 자작나무가 둘러친 그의 시세계로 무작정 걸어 들어온 여자가 있었다. 22세의 기생 자야(본명 김영한. 1916~1999). 자야는 생활고때문에 권번으로 들어가 예인의 길을 걸었던 신여성이었는데, 독립운동혐의로 감옥에 갇힌 그녀의 후원자를 만나러 함흥으로 갔었다. 백석과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불꽃이었다.

 

"단 한 번 부딪힌 한순간의 섬광이 바로 두 사람의 영원한 사랑의 시작이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가도 매듭이 없는 슬픈 사랑의 실타래는 이미 그때부터 풀려가고 있었다" (김자야,<내 사랑 백석>) 그들의 바리끼노, 함흥의 시간은 짧았다. 부모의 강권으로 세 번이나 결혼을 했기 때문이었다그때마다 백석은 도망쳐 태연히 자야의 곁으로 돌아왔다. 자야는 홀로 함흥을 떠났다. 경성 청진동에 은거하던 자야를 찾아 백석은 태연하게 시 한 편을 전했다. 자야가 <삼천리>에 발표했던 '눈 오는 날'을 시화한 백석의 사랑 고백이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에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 .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1938.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

 

백석은 누구에게도 침해받지 않는 사랑의 공동체 '마가리'로 떠나고 자야는 경성에 남았다. 자야는 그가 또 태연하게 나타날 것으로 믿었을 거다백석은 만주에서 몇 년 방랑 생활을 하다가 1945년 해방이 되자 고향 정주로 돌아갔다. 언제라도 자야에게 갈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팔선이 그어지고 전쟁이 터졌다. 재북 작가가 된 백석은 사회주의풍의 시를 자주 써야했지만, 그것의 배경에는 항상 자작나무가 둘러친 토방의 공동체가 있었다. 자야가 남한에서 전기 형식의 사랑 얘기를 출간한 무렵(1995), 백석은 북녘의 어느 산골에서 죽었다. 자야가 지은 옷을 그대로 입은 채였을 게다.

 

세속적 평가를 버리고 자신이 선택한 사랑에 평생을 헌신하는 것이야말로 보통 이상의 사람됨이다. 자야는 시인 백석과 나눈 3년의 사랑에 생의 의미를 모두 바쳤다. 그래서 자야는 보통 이상의 사람됨으로 높은 수준의 인간만이 얻을 수 있는 성취를 이루었다. 그녀는 평생 백석을 그리워하다가 자신이 일생을 바쳐 일군 대원각을 헐고 그 자리에 길상사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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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5-07-28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석의 시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좋아합니다^^

시골향기 2015-07-31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의 제목이 하도 특이해서 찾아보니 이렇게 풀이되어 있네요.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의 유동은 신의주 남쪽 지역에 있는 동네이름이고, 박시봉은 시의 문맥상 화자가 세 들어 사는 집주인의 이름이다. ‘方’은 편지에서 세대주나 집주인 이름아래 붙여 그 집에 거처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예전에 한 번 읽었는데 전혀 기억을 못하고 있다가 ‘붉은돼지’님 덕분에 다시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이(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참 마음에 와 닿네요^^ (백석 정본 시집. p.169~171)
 
오PD의 논어오디세이 1084
오성수 지음 / 어진소리(민미디어)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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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자왈) 智者(지자)樂水(요수)하고 仁者(인자)樂山(요산)하며

智者(지자)()하고 仁者(인자)()하며

智者(지자)()하고 仁者(인자)()하니라. <논어 옹야 6-21>

 

공자가 말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기며 살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

* : 즐길 락, 풍류 악, 좋아할 요(세 가지 음과 뜻이 있음)

    

<해 설>

공자가 아니면, 들으면 들을수록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런 한 폭의 산수화 같은

말을 누가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구절만 늘 가슴에 담고 다녀도 좋겠다.

처음 이 장을 접하는 사람들은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선은 <지자(智者)><인자(仁者)>가 확연하게 새겨지지 않을 것이다.

 

지자? 무엇을 아는 사람? 사람이 무엇을 안다는 것하고 지혜롭다는 것하고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아주 오래 전에 중학교만 나온 사촌형이 한 분 계셨다. 비록 학벌은 남한테

뒤졌지만 세상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현명하고 지혜롭게 대처했다.

그것은 사람 자체가 남보다 슬기롭기도 했고, 그 당시 그러니까 몇 십 년 전의 중학교

교육이 요즘과는 많이 달랐다는 것을 실감케 해 준다.

 

요즘은 대학교를 나와도 누가 지혜롭다고 하지 않는 세상이다.

지혜와 배움과는 커다란 관계가 없다.

고등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 중에서도 지혜로운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이 장의 지자(智者)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많이 알면서 지혜로운 사람을 뜻한다.

 

그럼 다음에는 인자仁者? 인자한 사람? 인자하기만 해서, 너그럽기만 해서 인자는 아니다.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무지무지 착하기만 한 사람이 있다고 치자.

남한테 도움도 안 되고, 누구한테 베풀 줄도 모른다. 그런데 심성은 너무 착하다.

그렇다고 이 사람을 인자(仁者)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래야 옳은가.

이 장의 인자어질면서도 덕을 갖춘 사람을 뜻한다.

 

종합하면,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움직이고, 즐기며 산다. 인자는 산을 좋아하고, 고요하고 오래 산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의 이치에 밝아서 물과 같이 널리 흐른다.

그래서 막힘이 없기 때문에 물을 좋아한다. 어디에고 흘러가기 때문에 늘 움직인다.

그래서 늘 돌아다니면서 즐기며 사는 것이다.

어진 사람은 늘 의리에 젖어 살기 때문에 의젓하게 행동한다.

그래서 심경이 흡사 산과 같아서 저절로 산을 좋아한다.

그래서 고요하다. 그렇게 늘 조용히 편하게 살기 때문에 오래 사는 것이다.

 

이런 몇 마디 말로 지자와 인자가 설명이 되거나,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윤곽은 잡았으리라 여겨진다. 이제는 그 윤곽을 따라 세상을 살아 볼 일이다.

p.31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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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근담 (상) - 세상을 읽는 천 년의 기록
홍응명 지음, 양성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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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내게 복을 박하게 준다면, 나의 덕을 두텁게 하여 맞서겠다. 하늘이 내 몸을 수고롭게 한다면,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하여 내 몸을 도울 것이다. 하늘이 내 처지를 곤궁하게 생각한다면, 나의 도를 형통케 하여 그 길을 열 것이다. 이러하니 하늘인들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天薄我以福 吾厚吾德以迓之 天勞我以形 吾逸吾心以補之

天厄我以遇 吾亨吾道以通之 川且奈我何哉?

 

 

<해 설>

 

사람마다 정해진 운명은 공평할 수 있고 불공평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정해진 운명에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채근담>에는 이러한 운명에 대처하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처세법이 제시되어 있다. 불행이나 시련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불행을 피해 가려는 마음과 시련 앞에 쓰러져 포기하려는 정신이다. 맹자가 말했다.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중대한 임무를 내리게 할 적에는 반드시 먼저 그 심지(心志)를 괴롭게 하고, 그의 육신을 수고롭게 하며, 그의 배를 굶주리게 하고, 그의 몸을 궁지에 처하게 하며, 하는 행위마다 그가 하려는 바에 어긋나고 어지럽게 한다. 그 까닭은 그의 마음을 분발시키고 그의 성질을 인내하게 만들고, 그의 할 수 없는 능력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告子章句 下 15). 마찬가지로 정말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인재가 되려면 반드시 오랫동안 힘겨운 단련을 이겨내야 한다. 보검의 예리함은 부지런히 갈고 닦은 결과이며, 매화의 은은한 향기는 고통과 추위를 견뎌낸 것에 대한 보상이다.

 

사마천(司馬遷 : BC145~BC86)이 세상에 품은 울분을 안으로 삭이고 ‘사기’를 완성한 것이 그 대표적인 본보기이다. 사마천은 역사학자이자 문학가로, 서한시대 좌풍익(左馮翊 : 장안의 북부를 가리킴) 하양 사람이며, 한 무제(BC156~BC87) 때 중서령을 지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다방면의 지식을 두루 갖춘 인재로 성장했다. 동중서에게 춘추(春秋)를 배우고, 공안국에게 상서(尙書)를 배웠다. 사마천은 마흔두 살부터 ‘사기’ 편찬을 시작했는데, 얼마 후 이릉(李陵 : ?~BC74)을 변호하다가 관직을 박탈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그 후 사마천은 궁형(宮刑 : 생식기를 거세하는 형벌)을 받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큰 충격에 휩싸였다.

 

감옥에서 풀려나고 얼마 후 다시 중서령에 임명되었을 때, 사마천은 절친한 친구 임안(任安)에게 편지를 받고, 곧바로 답장을 썼다. 거기에 오랫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로 시작하여 우울한 마음에서 오는 고통과 끝없는 억울함과 분노를 모두 털어놓았다. 사마천의 편지 중에 이런 글도 씌어 있다.

 

“나는 이미 조정에 관련된 일이라면 조금도 관심이 없네. 지난날의 모욕은 가슴 깊이 새겨져 하루에도 장이 아홉 번씩 뒤집히는 듯하고, 정신이 문득문득 몽롱해지네. 밖으로 나가면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네. 이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식은 땀이 등줄기로 흘러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네.”

 

사마천은 죽더라도 의롭게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반드시 한 번 죽는다. 그것은 태산보다 무거울 수 있고 기러기 털보다 가벼울 수도 있으니, 사람마다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마천이 모든 굴욕을 참아내고 구차하게 살아남은 이유는 가슴에 품은 오랜 바람이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생일대의 커다란 불행을 겪었는데도 끝내 ‘사기(史記)’를 완성해냈다. 그 결과 사마천은 후세에 가장 훌륭한 인물로 길이 남을 수 있었다.  p.192~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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