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역 백낙천 중국고전한시인선 3
장기근 지음 / 명문당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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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林寺桃花 (대림사의 복사꽃)

 

                                              白居易 (백거이. 772~ 846)

 

人間四月芳菲盡 (인간사월방비진)   인간 세상의 4월은 꽃이 다 졌는데

 

山寺桃花始盛開 (산사도화시성개)   산사의 복사꽃은 이제야 활짝 피기 시작하네.

 

長恨春歸無覓處 (장한춘귀무멱처)   봄이 돌아간 곳 찾을 길 없어 못내 안타까웠는데

 

不知轉入此中來 (부지전입차중래)   봄이 산중으로 옮겨온 것을 몰랐네.

 

 

이 시를 읽으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바쁜데, 특히나 봄에는 더욱 부산스럽다. 겨우내 웅크렸던 몸과 마음을 봄에 발산하려니 바쁠 수밖에 없다. 그러는 사이에 4월이면 꽃도 다 지고, 봄도 어느새 돌아가고 없다. 그런데 번잡스러운 인간 세상에서 떠난 봄이 산사(山寺)에는 아직 남아 있다. 산사의 여유로움이 꽃과 봄을 조금 더 붙잡을 수 있는 것이다. 필자가 꽃이라도, 봄이라도 시끌벅적한 인간 세상보다 조용한 산자락에 머물렀다 가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봄이 너무나도 짧아서 산사에 가 봐도 봄이 이내 가버린다. 아니. 산자락과 산사에 봄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안 사람들이 그곳에 몰려가는 바람에 아직 여름이 오려면 멀었는데도 혼비백산해서 도망가 버리고 만다. 사람들의 극성이 계절을 쫓고 있는 셈이다. 자연 재해와 기상 이변도 다 그런 것이 아닌가.

 

한시에 많이 나오는 꽃 중에 하나가 바로 도화(桃花)다. 왜 일찍부터 그네들은 그렇게 복숭아꽃을 동경했을까? 복숭아꽃을 시에서 제일 많이 읊은 것은 역시 <시경(詩經)>에서다.

<주남(周南)>의 ‘도요(桃夭)‘는 “싱싱하고 싱싱한 복숭아나무, 그 꽃이 활짝 피었네. 그 아가씨 시집가면, 그 집안이 화목하리.”로 시작된다. 이 시는 이처럼 복숭아나무의 아름다운 꽃을 노래한 데 이어 탐스런 열매 그리고 무성한 잎을 노래하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이제 막 시집가려고 하는 젊은 처녀에게 보내는 축복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에서는 화사한 복숭아꽃과 아리따운 처녀의 얼굴을 오버랩해서 묘사하고 있다.

 

중국에서 이처럼 복숭아꽃이 미녀의 얼굴을 나타내는 예술적 표현으로 자주 쓰인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나 소설 속에는 남편이 정원의 복숭아꽃을 넋 놓고 바라보자, 질투심에 불타는 부인이 그 나무를 잘라 버렸다는 웃지 못 할 내용도 있다. 이 또한 복숭아꽃에서 여인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복숭아를 미녀에 곧잘 비유하는 한편, 사악한 기운을 떨쳐내고 불로불사(不老不死)를 가져다주는 주술꽃 또는 주술열매라고 믿는 신앙도 있어왔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섣달 그믐날 저녁 문 앞에 커다란 도인(桃人 : 복숭아나무로 만든 인형)을 세워 사악한 귀신을 막는 주술로 삼기도 했다. 그 밖에도 장례식이나 희생으로 쓰인 동물의 피를 뽑을 때 부정을 떨쳐내는 도열(桃茢 : 복숭아나무 가지와 갈대 이삭으로 만든 비)이나 도부(桃符 : 설날 아침에 악귀를 쫓기 위해 문짝에 붙이는 나뭇조각) 등의 주술도구가 등장하는데, 모두 복숭아나무로 만든 것이다.

 

한편 복숭아를 구애(求愛)의 표시로 사용한 흔적도 보이니, 바로 또 <시경>에서다. <위풍(衛風)>의 ‘모과(木瓜)’에는 “내게 큰 복숭아를 던져주기에, 아름다운 구슬로 갚아 주었네. 굳이 갚자고 하기 보다는, 길이 사이좋게 지내자는 거였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시에 복숭아뿐만 아니라 모과와 자두도 던져주는 것으로 봐서 춘추시대 위(衛)나라에서는, 청춘남녀가 자유롭게 만나는 자리에서 여자가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던져주는 과실로 여러 가지가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경요(瓊瑤)란 옥으로 만든 남성용 장신구의 일종으로, 여자가 던져 준 과실을 받은 남자는 상대방 처녀가 마음에 들면, 몸에 지니고 있던 것을 풀어서 답례로 줌으로써 애정을 표시하거나, 혹은 장래를 약속하는 선물로 삼았다.

 

이 밖에도 복숭아에 얽힌 사연은 많지만, 한 가지만 덧붙이기로 한다. 중국어로 ‘도화운(桃花運)‘이라는 말은 남녀의 애정운을 의미한다. 광주(廣州) 등 남방의 따뜻한 지방에서 복숭아는 젊은 미혼 남녀에게는 특별히 새해 애정운의 길흉을 점치는 중요한 꽃이다. 병에 꽃아 둔 복숭아꽃이 시들지 않고 오래 피어 있으면, 그해에는 반드시 이상적인 상대를 만나게 된다고 한다. 이렇듯 복숭아는 이상향을 나타내는 꽃일 뿐만 아니라, 아주 오랜 옛날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중국에서는 연애 그리고 결혼과 대단히 인연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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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강설 사서삼경강설 시리즈 4
이기동 지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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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신사 (都人士)         

  

노란 외투 입고 있는 저기 저 서울 신사       彼都人士(피도인사) 狐裘黃黃(호구황황)

해맑은 얼굴에다 교양 있는 말솜씨             其容不改(기용부개) 出言有章(출언유장)

주나라로 돌아가면 만백성이 바라보리        行歸于周(항귀우주) 萬民所望(만민소망)

  

풀 삿갓에 검은 두건 저기 저 서울 신사       彼都人士(피도인사) 臺笠緇撮(대립치촬)

저분에게 따님 있네 묶은 머리 삼단 같네     彼君子女(피군자녀) 綢直如髮(주직여발)

이제 다시 볼 수 없어 내 마음 울적하네       我不見兮(아부견혜) 我心不說(아심부설)

  

옥돌로 귀를 막은 저기 저 서울 사람           彼都人士(피도인사) 充耳琇實(충이수실)

저분에게 따님있네 윤길이라 이름하네        彼君子女(피군자녀) 謂之尹吉(위지윤길)

이제 다시 볼 수 없어 내 마음 답답하네       我不見兮(아부견혜) 我心苑結(아심원결)

  

헐렁하게 띠 드리운 저기 저 서울 신사        彼都人士(피도인사) 垂帶而厲(수대이려)

저분에게 아리따운 따님 있네                    彼君子女(피군자녀)

말아 올린 머리가 전갈꼬리 같아라             卷髮如蠆(권발여채)

이제 다시 못 보네 그때 따라 갈 것을          我不見兮(아부견혜) 言從之邁(언종지매)

  

늘어뜨린 게 아니라 띠가 커서 그런거네      匪伊垂之(비이수지) 帶則有餘(대칙유여)

말아 올린 게 아니라 머리칼이 위로 났네     匪伊卷之(비이권지) 髮則有旟(발칙유여)

다시는 볼 수 없네 바라만 봐도 좋으련만     我不見兮(아부견혜) 云何盱矣(운하우의

 

 

서울에서 멋있는 분이 부임해 왔다. 그는 순수한 얼굴을 하고 교양 있는 말을 한다. 그러나 그도 매력 있지만 그의 따님이 더욱 매력있다. 그의 따님을 한 번 본 총각은 가슴이 울렁거린다. 그런데 서울에서 온 분이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니 그 따님도 함께 가버린다. 한 마디 감정을 표현해 보지도 못하고 혼자서 짝사랑을 하고 있었던 총각은 그만 가슴이 미어진다. ‘그냥 그녀를 따라가기라도 할 수 있다면, 그럴 용기라도 있다면....’  총각은 마음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일 뿐,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저 냉가슴만 앓고 있을 뿐이다.

  

부녀가 떠나고 난 뒤에도 그들의 모습은 눈앞에 선하다. 이제 생각해보니 그분이 늘어뜨린 허리띠는 일부러 늘어뜨린 것이 아니라 허리띠가 길어서 늘어뜨린 것처럼 보인 것이다. 그녀의 머리가 전갈의 꼬리처럼 올라간 것은 일부러 올린 것이 아니라 머리카락이 위로 나서 그렇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바라만 봐도 황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자꾸 생각하다보니 그런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한 번만이라도 다시 볼 수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은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꼭 사랑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은 소유하려는 욕심이다. 소유욕이 발동하면 그것은 순수한 사랑을 오염시킨다. 그래서 사랑은 바라만 보고 행복해 하는 짝사랑이 가장 순수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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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3 : 학문이 끝나는 곳에 도가 있다 노자, 도덕경 시리즈 3
차경남 지음 / 글라이더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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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도는 마치 활을 당기는 것과 같구나.

높은 쪽은 누르고 낮은 쪽은 올리며,

남으면 덜고 부족하면 보태준다.

 

하늘의 도는 남는 데서 덜어서 부족한 데 보태주나,

사람의 도는 그렇지 않다.

부족한 데서 덜어서 남는 쪽에 갖다 바치나니,

남도록 가지고 있으면서 천하를 위해 내주는 자는 누구인가.

오직 도 있는 이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인은

일을 하고도 자랑하지 않고,

공을 이루고도 내세우지 않으며,

현명함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도 앞에 평등하다. 도는 일체만물의 어버이이며, 삼라만상을 품에 안아 기르는 어머니이다. 어머니가 자식 모두를 평등한 사랑으로 대하는 것처럼, 도는 우주 만물에 대하여 공평하게 대한다. 도는 어느 누구를 특별히 더 사랑하지도, 더 미워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노자가 제 5장에서 이야기했던 ‘천지불인(天地不仁 : 천지는 편애하지 않는다.)’ 사상이다. 노자는 ‘천지불인’을 이야기하기 위해 신도 버리고, 상제도 버리고, 하느님도 버렸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이나 하느님 등은 아무래도 인간적인 관념을 불러일으켜 우주의 참 모습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도는 신도 아니고, 상제도 아니며, 하느님도 아니다. 우리는 결코 도(道)와 통성명을 할 수도 없고, 거래를 틀 수도 없으며, 전화를 걸 수도, 편지를 보낼 수도 없다. 우리는 결코 도에게 ‘뇌물’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는 우주 만물에 대하여 절대평등을 베푼다. 도는 우주 안에서 인간을 다른 동물들보다 특별히 귀한 존재로 대하지도 않으며, 동물을 풀이나 초목보다 더 귀한 존재로 대하지도 않고, 또한 풀이나 초목을 돌멩이나 바위보다 더 귀한 존재로 대하지도 않는다. 도 안에서는 천지만물이 다 평등하다. 도 안에서는 어떤 것도 다른 것의 위에 있거나 아래 있거나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 위에 사람 있거나 사람 아래 사람 있거나 하는 일은 도 안에서는 용납될 수 없다.

 

우리가 우리 인간의 작은 눈으로 세상을 보면 미추가 따로 있고 선악이 따로 있으며, 잘난 자가 따로 있고 못난 자가 따로 있으며, 부자가 따로 있고 가난한 자가 따로 있으며, 현자가 따로 있고 어리석은 자가 따로 있지만, 문득 도(道)의 큰 눈으로 세상을 보면 미추도 분별이요 선악도 분별이며 잘난 자와 못 난자, 부자와 가난뱅이, 현자와 어리석은 자, 모든 것도 다 분별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분별의 막을 한 꺼풀 걷어내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도 앞에서 평등한 존재이고, 존귀한 존재이며, 순수한 존재이다. 거기에 어떤 우열이 있을 수 없고,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노자의 ‘천지불인’에서 나오는 만물평등사상이다.

 

그런데 인간사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도처에 불평등이 있고, 차별이 있으며, 반칙이 있고, 편법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인간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금이 그어지게 되었으며, 보이지 않는 장벽이 생겨났으며, 보이지 않는 계급이 생겨났다. 천지 대자연의 평등원리가 인간사회에 와서 변형되고 왜곡되어 버렸다.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평등원리가 아니라 힘의 논리이고 약탈의 논리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짓누르고, 부자가 가난한 자를 착취하며, 사악한 자가 정직한 자를 괴롭힌다. 인간사회는 노자가 볼 때 도(道)로부터 너무 멀리 벗어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노자는 그대에게 혁명에 나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노자는 그대가 이 인간사회의 모순을 모르는 체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천지자연의 도(道)를 흠모하는 자가 불의(不義)를 보고도 못 본 체하고 그냥 넘어가면 되겠는가! 노자는 도(道)와 무도(無道)를, 평등과 불평등을, 무위와 유위를 병치시켜 그대 눈앞에 보여주면서 그대를 이 상황에서 그냥 못 넘어가게 붙든다. 하늘의 도는 마치 활을 당기는 것처럼 불평등과 불균형을 해소하는 쪽으로 움직이는데, 왜 인간의 도는 이와는 반대로 불평등과 차별을 심화시키는 쪽으로 작동되는가! p.21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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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켜낸다는 것 - 칭화대 10년 연속 최고의 명강, 수신의 길
팡차오후이 지음, 박찬철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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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아마도 옛사람들이 명리를 가볍게 여기고 물아양망(物我兩忘 : 일체의 사물과 나를 모두 잊음)의 경지를 즐긴 것이 오늘날 현실에는 근본적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이야기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극심한 경쟁사회에서 살고 있는 만큼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아마도 시대에 뒤떨어진 낙오자가 될 것이며, 옛사람처럼 유유자적할 여유가 없다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정말 그럴까요?

먼저 나는 한 가지를 강조하고자 합니다. 과거의 엘리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생존의 스트레스가 무척이나 컸고, 심지어는 우리보다 더욱 격렬한 경쟁에 시달렸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미국 하버드 대학교 송사(宋史) 전문가 ‘피터 볼’의 추산에 따르면, 송대의 과거시험에서 매년 시험에 합격한 숫자는 총 응시 인원의 1퍼센트 내외였고, 진사에 합격한 인원은 응시인원의 1000분의 1 내외였다고 합니다. 이 비율을 오늘날 대입시험의 합격률과 비교해 보면 아주 낮은 수치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의 부족한 물자, 어려운 생활 여건, 낙후된 의료 조건, 짧은 수명과 결부시켜 보면 과거 합격은 일생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회였고, 당시 교육 받은 사람들 사이의 경쟁은 오늘날의 격렬함에 비해 훨씬 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어느 사회든 생존의 스트레스와 격렬한 경쟁이 없는 사회란 없고, 다만 다른 시대나 다른 문화에서 수양한 사람들은 동일한 스트레스와 경쟁적인 심리상태에 직면하여 다른 처리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이어 왜 마음이 피로한지 한 번 분석해 보기로 합시다. 몸이 바쁘다고 마음이 꼭 피로한 것은 아닙니다. 근심이 너무 많거나, 혹은 불필요한 미련들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할 때 마음이 피로한 법입니다. 심리적 문제의 대부분은 자세히 생각해 보면, 모두 근심을 떨쳐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비롯되는 것입니다. 근심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은 세속적인 욕망과 스트레스에 파묻혀 스스로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비롯된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본심(本心)’을 잃은 것이라 불렀고, 때문에 학문을 하는 주요한 목표는 자신의 본심을 다시 찾는 데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맹자의 말로 하면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구방심(求放心)’입니다.

 

자세히 생각해 보면, 여러분이 인생의 각 단계마다 반복해서 물욕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학생 시절 부모님은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야. 지금이 바로 인생의 앞날을 결정하는 시기인데,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인생은 끝난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면 지금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졸업하고 막 일을 시작하는 단계에 있기 때문에 여기서 한 발 잘못 내딛으면 인생 전체가 실패하거나 최소한 여러 우여곡절을 겪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중년이 되면 중년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중년은 인생에서 혈기왕성하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기이고,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절정기에 속하기 때문에 인생과 사업의 성패는 중년에 결정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중년이 지나면 아마도 중년 이후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한평생을 얼마나 조화롭게 살 수 있었는지는 바로 이 시기에 전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 단계를 지나면 아무리 애써도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업, 가정, 자녀, 건강 등의 문제로 인해 초조하고 불안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년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다시 생길 것입니다. 이 시기는 인생의 마지막 시간이라고 하늘이 언제라도 생명을 거두어 갈 수 있는 시기이기에, 이보다 더 중요하고 더 아까운 시기는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당연히 이 시기는 초조함이 가장 심할 것입니다. 한편에서 자신의 능력에 한계가 있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한편 걱정하고 초조해하며 시간과 정력을 쓰는 것조차 아까울 정도로 귀중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노인들은 인생의 끝자락에서 어쨌든 희망이라도 보인다면 꽉 붙잡고 놓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누가 쉽게 손을 떼고 떠나려 하겠습니까? 그래서 다시 한 번 기회가 오길 고대하며, 마지막 불꽃을 태울 수 있기를 갈망할 것입니다. 하지만 운명은 종종 무정해서 마음속에 우수와 고통만을 더하게 될지 모릅니다. 이때 누가 자신의 인생을 이해해 줄 수 있을까요? 때문에 우리가 현재 처한 인생의 모든 단계가 인생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결정적인 시기라고 말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근심을 선택하는 한 늙어 죽을 때까지 영원히 근심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문제의 관건은 일이 많거나 심리적 부담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조절할 수 있는지 여부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나는 선인들이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가 결코 우리보다 작지 않았음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특히, 옛날 사대부들이 겪은 생명을 잃을지도 모를 우려와 앞날에 대한 걱정은 결코 우리보다 못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수신의 학문과 양생의의 도가 그런 어려운 조건하에서 제시한 처방약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과거와 똑같은 문제에 직면한 현대인들이 선인들의 학문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여길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닭이나 개를 잃어버리면

곧 찾을 줄 아나,

잃어버린 마음은

찾을 줄 모른다.

학문의 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잃어버린 마음 찾는 것뿐이다.

 

人有鷄犬放, 卽知求之, 有放心, 而不知求.

學問之道無他, 求基放心而已矣. <맹자 고자편>

 

이것이 바로 <맹자>의 명언 ‘구방심’입니다. ‘방심’이란 잃어버린 마음입니다. 맹자가 말한 의미는 만약 집에서 닭이나 개를 잃어버렸다면 지체 없이 그것을 찾아 나설 것인데, 닭이나 개보다 1만 배 더 귀중한 것을 잃어버렸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찾아 나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만약 갑자기 지갑이 없어졌거나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았다면 조급해할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 여러분은 아마도 곧바로 뜨거운 가마솥 안의 개미처럼 허둥대며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맹자>는 지갑이나 휴대전화보다 1만 배 더 귀중한 물건을 잃어버렸는데도 몇 년이 됐는지도 모르고 여태껏 그것을 찾으려고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이 물건이 바로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이 돈지갑이나 휴대전화보다 1만 배 이상 귀중한 것임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갑을 잃어버렸다면 뜨거운 가마솥 안의 개미처럼 안절부절 못할 텐데 마음을 잃어버리고도 태연자약하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맹자는 마지막 결론으로 “학문의 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일 뿐이다.” 라고 한 것입니다. 그가 말한 ‘학문’이란 오늘날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목 같은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학문을 말합니다. 이런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 즉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잃어버린 마음을 찾으려면 그것을 잘 지키고 소중히 여겨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게 해야 합니다. 학문을 하는 배경을 결코 학교에 한정하지 않고, 일과 일상생활에서 매 순간 체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p.146~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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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록 - 동양고전총서 4
주희, 여조겸 엮음 | 이기동 옮김 / 홍익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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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명도(정호) 선생은 “부귀함으로 남에게 교만한 것은 본래 옳지 못한 일이지만, 학문으로 남에게 교만한 것도 그 해(害)가 적지 않다.”고 했다.

 

재산이 많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거나 멸시하는 자세는 옳지 못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지식으로 남과 비교해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무시하는 경우를 생활에서 자주 볼 수가 있다. 특히 조금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잘못을 흔히 저지른다. 즉, 동료와의 대화 도중에 동료가 어떠한 사실을 자신보다 모른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를 무시하는 말을 한다거나 하는 등이 바로 그 예이다. 이렇게 보면 학식으로 남을 무시하거나 교만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라고 볼 수 있다.

 

 

20 사람은 자신의 의식주에 대해서는 매사에 좋은 것을 구하면서도,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해서는 오히려 좋은 것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진실로 의식주에서는 좋은 것을 얻었다 할지라도 오히려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이 이미 바르지 못하게 되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몸보신을 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좋은 집이나 차, 옷 등에도 많은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 정서에 도움이 되는 책이나 영화, 음악에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는 않는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사람들이 마음보다는 몸, 정신보다는 육체적인 것을 더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예전과 오늘날의 공통된 문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예를 들어 보자. 비가 오는 날 길을 걷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정면에서 차가 그를 향해 달려와 금방이라도 그를 치려고 하는 순간, 그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이 차를 피하려고 옆으로 넘어지다가 진흙탕에 옷을 버리면 안 되는데.....’ 이렇게 망설이고 있던 사람은 결국 차에 치이고 말았다. 여기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중요한 것과 부차적인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옷보다는 몸이 소중하고 몸보다는 마음이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바로 진정한 수양의 길이다. 진정으로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학문의 길이요, 성인의 가르침이다.

 

 

22 이천(정이)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계를 다루는 일을 오래하게 되면 반드시 기계에 의지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이것은 기계를 다룰 때 즐거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즐거움을 느끼면 씨를 뿌리는 것과 같아서 기계에 의존하는 마음이 싹트고 자라난다.”

 

생활에서 우리는 많은 도구를 사용한다. 그런데 이 도구들은 우리에게 많은 편리함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반면에 우리의 능력을 제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매일같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의 경우를 보자. 이 사람은 보통 키보드를 사용해 글을 쓴다. 이러한 것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나중에는 글을 쓸 때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으면 글을 전혀 쓸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린다거나, 혹은 간단한 철자나 띄어 쓰기도 혼동하는 경우가 생기고 만다. 또 라디오를 들으며 공부하는 버릇이 있는 학생이 라디오가 고장이 났을 때 공부를 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기계나 도구를 이용하더라도 그것에 너무 의존하지 말라는 말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더욱 절실한 교훈이라고 생각된다. P.474~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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