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3 : 학문이 끝나는 곳에 도가 있다 노자, 도덕경 시리즈 3
차경남 지음 / 글라이더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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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 굶주리는 것은

위에서 세금을 많이 거두기 때문이요,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위에서 일을 벌이기 때문이며,

백성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위에서 너무 잘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삶에 집착하지 않는 것,

이것이 삶을 지나치게 귀하게 여기는 것보다 현명하다.

  

民之飢, 以其上食稅之多, 民之難治, 以其上之有爲, 是以難治,

民之輕死, 以其上求生之厚, 是以輕死, 夫唯無以生爲者, 是賢於貴生.

    

 

노자는 고대사회의 수탈체계에 대해서 권력자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던지고 있다. ‘세금을 많이 거두기 때문이다.’라고 번역한 한문 원본은 ‘식세(食稅)‘이다. ’식(食)’자는 잘 알다시피 '먹을 식'자다. 그러므로 이를 직역하면 ‘세금을 너무 많이 받아먹기 때문이다.’란 의미이다. 표현이 적나라하다. 제왕된 자의 입장에서 이런 문장을 읽게 되면 얼마나 가슴이 뜨끔하겠는가. 세금은 나라를 살리라는 것이지 권력자가 먹으라는 것이 아니다.

    

그 다음 문장도 첫 문장 만큼이나 날카롭다. 다스리기 어려운 이유는 백성이 말을 안들어서가 아니라, 반대로 지배자들이 쓸데없이 이런저런 일을 벌이기 때문이라고 노자는 말하고 있다. 지배자들이 가만있어도 될 일을 괜히 왕궁을 건립한다느니, 새로 성벽을 쌓는다느니, 운하를 판다느니, 4대강 사업을 한다느니 하면서 국민을 괴롭히고 또 한편으로는 법령과 제도를 새롭게 정비한다느니, 국민의 기강을 세우고 새 정부의 면모를 일신한다느니,구정부의 잘못된 점을 뜯어 고치고 새롭게 개혁한다느니 등등 끊임없이 인위의 정치를 행하다 보니 국민적 저항에 부딪히고 결국 다스리기가 어려워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지배자 계층들이 지나치게 자기들만 잘살려고 집착하며, 탐욕을 부려 재산을 긁어모으며, 사치와 방탕을 일삼고 호화로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은 허탈과 좌절을 이기지 못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특히 백성들이 죽음을 가볍게 여긴다는 이 문제는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심각한 문제점 중의 하나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가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벼랑 끝에서 목숨을 내던지고 있다. 그들의 죽음에 임금과 정승, 환관과 측근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인가?

  

이 장에서 노자는 백성들의 평온한 삶을 해치는 지배자들의 세 가지 악덕을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이것은 법가는 물론이고 유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대범한 발언이다. 이런 점에서 노자는 유(柔)하고 부드럽기만 한 사람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노자를 잘못 이해하면 안 된다. 노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제자백가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위험하고 선동적인 인물일지도 모른다. 그의 사상 속에는 국가권력에 항거하는 저항정신이 들어있다. 이 점을 놓치면 노자 이해는 불완전해진다.

  

노자의 말을 다시 정리해보면 지배자들의 세 가지 악덕이란 첫째가 수탈, 둘째가 허세, 셋째가 탐욕이다. 그런데 노자의 말을 가만히 듣다보면 이 이야기들이 그저 고대 중국 춘추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돈이 아니라고 세금을 제멋대로 쓰는 자들, 자기가 책임지지 않는다고 이런저런 온갖 터무니없는 사업들을 벌이는 자들, 또 탐욕으로 재산을 모아 호화판 생활을 일삼는 자들ㅡ이들은 과연 대한민국을 이끄는 자들인가 망치는 자들인가?

 

  

귀생(貴生)

 

우리 인간은 누구나 다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 우리 모두는 다 그럴 권리가 있다. 그러나 자기애(自己愛)가 너무 지나치게 되면 그것은 병이 되고 집착이 된다. 집착을 버리는 것 그것이 지혜롭게 사는 길이다. 노자가 지금 하는 말이 그것이다.

  

삶에 집착하지 않는 것,

이것이 삶을 지나치게 귀하게 여기는 것보다 현명하다.

  

우리의 병은 자기의 생(生)을 지나치게 귀하게 여기며, 자기의 실존(實存)을 지나치게 중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노자가 꺼리는 개년 중의 하나가 ‘귀생(貴生)’이란 개념이다. 귀생이란 자기의 생을 귀하게 여긴 나머지 결국 집착에 이른 상태를 말한다. 인간은 무엇보다 자기의 생을 사랑하고 아껴야 하지만, 그것이 지나쳐 집착에 이르면 안 된다.

  

집착은 개인적으로는 모든 병의 근원이요, 사회적으로는 모든 악의 근원이다. 우리는 악착같이 살려고 덤벼들지만, 우리 인간이 보다 잘 살기 위해서는 도리어 삶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집착이 남아있는 한 우리는 생의 본래적인 기쁨과 평온을 누릴 수 없다. 자기의 생을 사랑하지만, 그러나 ‘귀생(貴生)’에까지 이르지는 마라. 귀생은 유위(有爲)이며 작위(作爲)이다. 결코 무위가 아니다. p.199~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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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혜민 님들이 생각한 말
김옥림 지음 / 북씽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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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삶을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법륜)

 

세상을 행복하게 살고 싶은 건 사람들의 공통된 바람이다. 그러나 바란다고 해서 행복하게 산다는 보장은 없다. 바람은 그저 바람일 뿐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는가에 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가 보다는 무엇을 위해 사느냐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이에 대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을 꼽는다면 첫째는 물질을 위해 살고, 둘째는 직위를 위해 살고, 셋째는 명예를 위해 살고, 넷째는 권세를 위해 산다.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무엇을 위해 살다보면 욕심을 부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 욕심이 자신을 추락시킬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욕심을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사는 것은 잘 사는 것이 아니다. 정말 잘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느냐이다.

 

어떻게 살기 위해서는 봉사활동을 하는 일도 있고, 자신의 물질로 후원할 수도 있고,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는 일도 있다. 이처럼 자신만이 아닌, 함께 사는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런 삶을 추구하다보면 ‘행복’이라는 선물을 받게 된다. 세상은 더불어 살아야 한다. 슬픔도 기쁨도 즐거움도 함께 나눠야 한다. 함께 하는 행복이 참 행복하다. p.20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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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불행한 이유는 나보다 잘난 사람과 항상 나를 비교하는 버릇 때문이다.(혜민)

 

“저 친구는 키가 큰데 나는 왜 키가 작지.“ 또는 ”저 사람은 잘 났는데 나는 왜 이렇게 바보스럽지.“ 하고 비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스스로를 열등감이란 감옥에 가두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상대성을 가진 존재이다. 친구가 키는 큰데 공부는 잘 못하고, 나는 키가 작지만 공부는 잘하는 것처럼. 그런데 잘난 사람과 비교함으로써 왜 자신을 못난이로 만들려고 할까. 이것처럼 자신에게 무책임한 일은 없다. 행복과 불행은 모두 자신이 만든다. 자신보다 잘난 사람과 비교하여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은 바보 같은 일이며 불행에 빠지는 일이다.

 

자신이 행복하고 싶다면 잘난 사람을 올려다보지 말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내려다보라. 그래야 열 받을 일도, 스트레스 받을 일도 줄고 스스로를 못난이라고 푸념할 일도 없다.

 

인간의 불행은 대개 자신보다 잘난 사람을 올려다 볼때 생긴다. 따라서 잘난 사람과의 비교는 절대 금물이다. 다만 그처럼 닮아가기를 배우는 일에 힘쓴다면 훗날 자신에게도 반드시 좋은 일이 찾아올 것이다.p.228~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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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진실한 사람은

모두에게 진실하지만,

자신에게 불성실한 사람은

모두에게 불성실하다.

세상은 자신에게 진실한 사람을 원한다.

그 어떤 시련 앞에서도 진실을 버리지 마라.

 

선행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환기시키는 일이다.

즉, 내가 이 땅에 있는 존재로서의 가치를 스스로

확인하는 행위인 것이다.

또한 나아가 선행은 덕을 쌓는 일이다.

덕이란 곧 한 인간에 대한 내밀한 가치적 평가이다.

 

인생에 연장전은 없다.

전반전에서 승부를 내던

후반전에서 승부를 내야 한다.

 

자동차는 수시로 점검을 해야 한다.

엔진오일은 충분한 지,

브레이크는 이상이 없는지,

그래야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지금 잘하고 있는지를

수시로 살펴야 실수가 없고,

현재를 잘 헤쳐 나갈 수 있다.

 

인간의 참된 자유를 가로막는 것은

물질에 대한 끝없는 욕망이다.

물질의 욕망이 인간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인간의 본성을 속박한다.

진정한 자유인이 되길 원한다면

물질의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무소유의 마음이 진정한 자유이다.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늘 즐겁고,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하는 그런 사람,

꽃이 향기를 주듯

누군가에게 꿈의 향기를 주는 사람,

당신은 그런 사람이 싶지 않은가?

그런 사람이 진정 향기로운 사람이다.

p.236~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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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정호승 지음, 황문성 사진 / 비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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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시절에는 누구나 방황하게 됩니다. 방황은 어쩌면 청춘의 특권인지도 모릅니다. 내일을 위하여 오늘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진정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고민을 거듭하다 보면 그 고민이 방황의 양상을 띠게 됩니다.

 

방황하지 않는 청춘은 없습니다. 청춘의 방황은 마치 시각장애인이 흰 지팡이도 짚지 않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도시의 거리를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 시기의 방황은 암중모색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지만 청춘 시절에는 방황이 깊어간다고 해서 좌절이 깊어 간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시절에는 방황이 깊어갈수록 인생이 깊어갈 수 있습니다. 진정한 방황을 통해 인생의 길을 찾고 내적 성장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청춘의 방황은 누구에게나 필요조건입니다. 방황을 하고 방황이 끝나야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언제까지 방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청춘의 시기가 지났는데도 방황하고 있다면 그것은 인생의 방해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즈음 나이 서른이 넘어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청춘들을 만나게 됩니다. 인생에 일정한 형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런 청춘들은 방황의 시간이 비교적 긴 편입니다. 인생에는 원래 방황이라는 요소가 자리 잡고 있어서 중년기에도 장년기에도 방황의 시기는 있습니다. 방황하지 않는 세대는 없고, 방황하지 않는 인생은 없습니다. 길게 보면 청춘의 방황도 인생의 한 시점에서 야기되는 방황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방황이라고 할 수 있는 청춘의 방황이 너무 길어 청춘이 지나가버리면 문제입니다. 아무 데로도 나아갈 수 없다 싶어 쉽게 좌절하게 됩니다. 물론 방황은 한 존재의 자아를 들여다보게 해주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깨닫게 해줍니다.

 

방황이라는 과정을 통과함으로써 인생의 올바른 방향을 찾게 됩니다. 특히 청춘의 방황이 그렇습니다. 청춘의 방황은 다음 시기의 방황을 위한 디딤돌입니다. 디딤돌이 굳건해야 다음 인생의 방황기에 그것을 딛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디딤돌이 너무 허약하면 앞으로 나아갈 힘을 잃게 됩니다.

 

따라서 청춘의 방황은 짧고 깊게 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 시기에는 필요조건으로서의 방황의 시기를 가능한 한 빨리 끝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단력 있게 방황에 종지부를 찍고 일단 앞으로 나아가야 다시 새로운 길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방황한 시간의 양이 많았다고 해서 준비와 고뇌의 양이 반드시 많아지는 건 아닙니다. 방황한 기간이 길었다고 해서 인생의 깊이가 깊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방황은 어느 정도 오래, 많이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위해 방황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청춘 시절엔 방황하되 너무 오래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봄날에 피는 꽃을 한번 보십시오. 꽃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황하지 않습니다. 꽃을 피우려고 애쓰지 않으면서도 꽃을 피우고, 피어난 꽃은 그대로 방황하지 않고 열심히 삽니다. 누가 보든 말든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하늘을 향해 피어 있다가 때가 되면 시들어 열매를 맺습니다. 베트남의 탁낫한 스님은 “한 송이 꽃은 남에게 봉사하기 위해 무언가 할 필요가 없다. 오직 꽃이기만 하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한 사람의 존재 또한 그가 만일 진정한 인간이라면 온 세상을 기쁘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꽃은 존재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이미 아름다운 것입니다. 무엇을 이루려 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피어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 자신도 존재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이미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꽃은 피기 때문에 아름다운 게 아니라 지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꽃이 지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엔 봄날에 가장 먼저 산수유가 피는데, 그 연노란 산수유도 꽃이 져야 붉은 열매가 익어 겨울엔 새들의 먹이가 될 수 있습니다.

 

인생의 방황도 꽃과 같습니다. 내 인생에 방황이 존재하는 것도 결국 한 인간으로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 방황 속에서 인생의 열매가 여물게 됩니다. 방황의 꽃이 여물어 열매라는 씨앗을 맺어야 그 씨앗이 땅에 떨어져 새로운 삶을 꽃 피우게 됩니다.

청춘 시절에는 방황을 너무 오래 함으로써 열매를 여물게 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을 버리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꽃은 자기를 버리지 않습니다. 시들지언정 스스로 자신을 버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향기조차 의식하지 않고 겸손히 살아갑니다. 만개한 꽃보다 만개 직전의 꽃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인생의 방황도 그와 같으면 좋겠습니다. p.183~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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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습관이다 - 부정의 나를 긍정의 나로 바꾸는 힘
박용철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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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익숙한 것을 선호한다.

 

잠시 다이어트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조금 엉뚱한 이야기처럼 들릴 지 모르겠으나, 다이어트와 요요현상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뇌의 특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비만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건강을 위해 열심히 다이어트를 하고 운동을 합니다. 많은 노력으로 살을 빼고 건강에 좋다는 적정 체중까지 감량합니다. 그런데도 결국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주된 이유는 요요현상 때문입니다. 일단 체중은 원하는 만큼 감량하였지만, 그 이후가 문제인 것이지요. 허기가 지고, 칼로리 높은 음식이 자꾸만 눈에 들어옵니다. 음식을 먹고 나면, 몸은 칼로리를 소비하기보다 지방으로 저장부터 합니다. 의욕이 떨어져 활동량이 줄어들고, 따라서 에너지 소비도 감소합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 정도 하면 됐지’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나옵니다. 이렇게 우리 몸은 요요처럼 원래 체중으로 되돌아옵니다.

 

이처럼 원치 않는 요요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뇌가 다이어트 이전의 체중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몸과 마음에 강하게 명령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뇌는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건강에 좋은 체중으로 만들어 놓았음에도 이전의 비만 상태로 돌아가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니 말입니다. 다이어트와 요요 현상으로 고생하신 분들은 이런 자신의 뇌가 너무 답답하고 미울 것입니다. ‘내 뇌가 진짜 내편인가?’하는 생각도 드실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뇌가 지키고자 하는 중요한 원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뇌는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뇌의 원리 : 무의식적으로 뇌는 나에게 이로운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평소에 유지했던 익숙한 상태를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한다.

 

이런 뇌의 원리는 왜 생겨난 것일까요?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이 최대 목표였던 원시인 뇌의 작동원리가 현대인의 머릿속에도 남아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위협과 위험 속에서 지내야 했던 원시 인류에게는 ‘웰빙’이라든지 ‘삶의 질’ 따위가 고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가만 고민하던 뇌는 지금까지 해 오던 것을 웬만하면 바꾸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면 적어도 죽지는 않는다.’라고 믿기 때문이지요. 새로운 것은 나에게 이득이 될 수 있지만, 만에 하나 죽음과 직결될 수도 있기에 웬만해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뇌는 새로운 것보다는 익숙한 것을 선택합니다.

 

이런 식으로 뇌 안에 굳어진 익숙함들이 바로 ‘습관’입니다. 오랜 기간 유지되어 왔다는 것만으로도 뇌 안에서 표준으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화날 때 화 푸는 방식, 심심할 때 나타나는 행동들, 잠버릇, 식사할 때 보이는 행동, 일 처리하는 방법, 좋아하는 노래 장르, 좋아하는 음식 등 내 안에는 수많은 습관이 깊숙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의식하지 못한 채 이런 습관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런 습관의 힘은 참으로 강력합니다. 뇌가 새로운 것을 싫어하고 기존 습관을 필사적으로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이지요. 한번 뿌리박힌 습관은 여간해서 바뀌지 않습니다. 비만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을 의식적으로는 이해해도, 무의식적으로 뇌는 그저 오랫동안 익숙했던 비만 상태를 유지하려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저 익숙한 상태를 지키고 습관을 유지하려는 뇌의 원리가 나타납니다.

 

이건 행동이나 체중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동안 익숙했던 감정은 뇌 속에 표준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오랜 기간 불안하게 지냈던 분들은 불안이 표준감정으로 자리 잡고, 행복하고 감사해하며 지내온 분들은 행복과 감사함이 표준 감정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래서 순간순간 여러 감정이 나타나겠지만, 뇌는 표준으로 잡아 놓은 감정을 더욱 선호하고 거기에 집중합니다.

 

 

습관이 된 감정은 점점 더 강해진다.

 

“오늘 기분이 어떠십니까? 혹시 기분이 나쁘신가요? 그럼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오늘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부터 살펴봅니다. 그런 뒤 ‘아, 그래!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기분이 이렇구나.‘ 하고 판단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지금의 내 기분을 현재의 상황이나 오늘 일어난 일들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체중을 급속히 감량한 이후 요요 현상이 시작되면 식욕이 주체할 수 없이 증가합니다. 음식만 봐도 입에 저절로 침이 고입니다. 그럴 때 먹는 음식은 참으로 맛있습니다. 요요 현상으로 고민하시는 분들은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예전엔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던 음식인데, 너무 먹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시켜 먹었어요. 그럴 때는 정말 자제하기가 힘들어요.

 

뇌가 체중을 다시 늘리기 위해 요요 현상을 만들 때는 먼저 식욕을 증가시킵니다. 그래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음식도 너무 맛있게 느껴집니다. 음식의 실제 맛을 뇌가 원하는 방향으로 확대, 강화한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뇌는 습관이 된 감정을 더 확대하고 강화합니다. 뇌가 ‘불안’이란 감정에 습관이 들어 있으면, 우리는 불안을 유발하는 일에 더 신경을 쓰고, 안 좋은 일이 발생하면 실제보다 훨씬 큰 걱정과 불안을 느낍니다. 반대로 행복이란 감정에 습관이 들어 있으면, 기분 좋은 일이 발생했을 때 뇌는 훨씬 큰 관심을 두며 그 느낌을 확대해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느낀 감정은 실제 오늘 일어난 사건들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뇌는 익숙한 감정을 어디서 다시 느낄지 주위를 살핍니다. 오늘 일어난 수많은 일 중에 그 감정에 어울리는 일을 찾아 의미를 부여하고 확대합니다. 감정습관에 어울리는 사건이 발생하면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하며, 오랫동안 기억하게 하는 것이지요. 반대로 낯선 감정을 유발하는 일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하고 무시하려 듭니다.

 

불안이 습관이 된 분들은 하루를 되돌아보면 걱정거리만 기억에 남습니다. 그러곤 이런 일들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며 자신의 불안을 합리화합니다. 반면 감사함이 몸에 밴 분들은 감사한 일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또한 같은 일에 대해서도 감정습관에 따라 어떤 사람은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불안에 휩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화부터 나기도 할 것입니다.

 

내 감정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 조절하기 위해서는 ‘감정도 습관이다.’라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됩니다. 앞서 나온 뇌의 원리를 감정 측면에서 다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뇌는 유쾌하고 행복한 감정이라고 해서 더 좋아하지 않는다. 유쾌한 감정이건 불쾌한 감정이건 익숙한 감정을 선호한다. 불안하고 불쾌한 감정일지라도 그것이 익숙하다면, 뇌는 그것을 느낄 때 안심한다. p.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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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고 피어나는 마흔은 없다
김병수 지음 / 프롬북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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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나이와 관계가 없다.

 

지혜는 나이가 들면서 저절로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정신과 의사로서 살아오면서 나이로는 측정할 수 없는 것이 꽤 많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젊은 사람에 비해 항상 통찰력이 더 뛰어날 것이라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나이가 들어간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성숙되는 것은 아니며 배려와 관용의 태도는 나이가 들면 그냥 저절로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사람도 만났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나이와 지혜는 항상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혜에 관한 연구결과를 보더라도 지혜의 정도와 나이는 아주 작은 상관성만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일반인을 대상으로 지혜를 측정한 연구결과를 보더라도 지혜가 높다고 평가된 경우는 전체에서 5% 정도에 불과했다.

 

지혜로운 사람과의 대화는 느낌이 다르다. 지혜로운 사람과 대화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확 달라지는 느낌을 받는다. 마음이 편안해질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귀중한 존재라는 것을 새삼 다시 깨닫게 된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지고, 자신의 이야기를 그 사람에게 더 많이 들려주고 싶어진다. 지혜로운 사람과는 오래 있고 싶어진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거나 큰 성공을 거둔 사람 중에도 대화를 해보면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사회적 지위나 성취가 인격적 약점을 숨겨주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의사인 내가 그런 느낌을 받을 정도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지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사람을 만날 때도 있다.

 

중년 연구의 대가인 레빈슨 박사는 중년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중년은 자기와 세상에 대해 더 많이 탐색하기 위해, 이후 시기에 형성될 구조에 대한 기초를 만들기 위해 기존 생활구조를 재평가하는 시기다.” 이전보다 더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갖고 있던 삶의 태도나 자세를 다시 평가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나는 중년이 되어서도 젊은 시절의 삶의 방식이나 생각을 버리지 못한 사람에게 “베테랑 투수는 강속구만 던지려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곤 한다. 아무리 뛰어난 투수라 해도 나이가 들면 젊은 투수에 비해 구속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나이 들어서도 강속구만 던지려 하면 어깨도 상하고, 체력도 떨어져 오래 버틸 수 없다.

 

만약 젊었을 때의 영광만 기억 속에 담아둔 채 계속해서 직구나 강속구로만 승부하려 든다면 그는 얼마 가지 않아 선수생활을 접어야 할 지 모른다. 현역에서 오래 뛰고 싶다면 더 유연하고 다양한 시각, 남을 배려하는 마음, 그리고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는 나이와 상관없다. 다만 과거를 버리고, 변하려 애쓰는 사람만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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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이 뻣뻣해지지 않도록

 

심리적 유연성이 떨어지는 사람은 “반드시 해야 한다.” “나는... 사람이다.” “사람이라면 반드시...해야 한다.”는 당위적 사고에 빠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사람은 모든 것을 흑 아니면 백과 같이 나누어 보기 때문에 모호한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

 

특히 사람의 마음이나 정서를 다루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곤 한다. 사람 마음이란 것이 원래 흑백으로 구분되기 힘들고 항상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이 섞여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좋기도 했다가, 때로는 나쁘게 보이기도 하는 것이 다반사다.

 

모호하고 모순적인 사람 마음을 다룬다는 것은 심리적 유연성이 떨어지는 사람에게는 고역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심리적 유연성이 떨어지는 사람은 인간관계도 매끄럽지 못하다. 자신에게 엄격할 뿐만 아니라 남들에게도 “이래야 한다, 혹은 저래야 한다.”며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생각과 맞지 않으면 이내 원망하고 비난을 쏟아 낸다. “세상에 믿을 놈 없다.”거나 “내가 너에게 어떻게 했는데 이것밖에 못하냐.”는 식이다. 심리적으로 유연하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 마음의 고통을 많이 안고 살아가야 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도 편하게 해주지 못한다. 정해놓은 틀 안에 자신과 다른 삶을 모두 끼워 맞춰야 하기 때문에 모두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심리적 유연성은 행복의 중요한 열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오히려 고집스러워지고, 까다로워지기는 쉽다. 나이가 들면 몸이 뻣뻣해지듯 마음도 굳어지게 마련이다. 결국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마음이 가는대로 놔두면 심리적 유연성은 점점 떨어져 언행이 완고해지고 경직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수록 마음의 유연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심리적 유연성을 기르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우선 마음을 관찰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마음을 고치거나 바꾸려 애쓰지 말고 그냥 마음이 흘러가는 것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연습을 규칙적으로 하는 것이다. 마음을 흘러가는 강물이라 생각하고, 조금 떨어져서 찬찬히 감상해본다. 내 마음에 어떤 생각들이 떠돌아다니고 있는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유연성을 키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완벽주의 사고에 자기를 너무 옭아매는 사람이라도 ‘나는 완벽해‘가 아니라 ’나의 머릿속에는 완벽해야 한다는 경직된 생각을 갖고 있구나.‘라고 생각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생각에 휘말리지 않도록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연습을 하면 심리적 유연성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두 번째 방법은, 사람과 세상에 대한 관점을 다르게 갖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상황에 따라 나쁘기도 했다가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항상 좋거나 나쁠 수는 없으며, 상황이 사람을 나쁘게 만들거나 좋게 만들기도 한다. 똑같은 사람이라도 시간의 흐름이 그 사람을 다르게 평가하게 만든다. 변하지 않는 악, 변하지 않는 선은 없다. 따라서 한 가지 관점으로 사람을 평가하거나 세상일의 시비를 가리려 하면 문제가 생기고 만다.

 

중년쯤 되면 ‘내가 심리적으로 유연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 스스로에게 물어 볼 필요가 있다. 중년이 되어서도 자기 생각만 고집하고, 다른 사람이나 초월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줄 모른다면 삶의 활력도 사라지고 만다. 조그만 스트레스나 정신적 충격에도 크게 마음을 다칠 수 있다. 그러다 주위 사람들도 하나둘씩 떠나가고 만다. 결국 행복한 중년이 되려면 몸의 유연성보다 마음의 유연성이 더 중요하다. p.153~155/ 246~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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