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읽는 전국책 1 - 술책편
조성기 지음 / 동아일보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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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孟子)>의 등문공 장구(滕文公章句)에 보면 공도자(公都子)라는 제자가 맹자에게 묻는 장면이 나온다.

“다른 사람들이 다들 선생님을 보고 변론을 좋아하는 자라고 하는 데 어째서 그러하옵니까?” 그러자 맹자는, “내가 어찌 변론을 좋아하겠는가. 부득이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변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변론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하여 길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성왕(聖王)>이 나오지 않고 제후는 방자해져가고 학자들이 불온한 사상들을 내세우고 있다. 그 중에서도 묵적(墨翟. BC480년~BC390년 추정)과 양주(楊朱. BC395년경~BC335년) 의 이론이 천하에 가득 차서 천하의 사람들이 양주 이론을 찬성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묵적의 이론으로 돌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양주는 위아(爲我)를 말했으니 임금을 무시하는 것이요, 묵적은 겸애(兼愛)를 주장했으니 부모를 무시하는 것이다. 자기 아비를 무시하고 임금을 무시하는 것은 금수들이나 하는 짓이다.

 

양주, 묵적의 이론들이 없어지지 않으면 공자의 도가 드러나지 않게 되니 그것은 사설(邪說 : 올바르지 않은 논설)이 백성을 속이고 인의(仁義)의 길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인의의 길을 막는 것은 곧 짐승을 몰아다가 사람을 잡아먹게 하고 장차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게 하는 것이 된다. 나는 이것이 두려워서 첫 성인의 도를 지키고 양주와 묵적의 이론을 배격하여 방자한 이론이 다시는 나오지 않게 하고자 한다. 그래서 변론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할 수 없이 변론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볼 때 맹자는 묵자와 양자(양주)의 사상을 이단 사설의 대표적인 것으로 꼽고 있다. 맹자의 말대로 그 당시 묵자와 양자의 사상이 민간에 널리 퍼지고 있었다. 그 사상들은 두고두고 맹자를 비롯한 유가(儒家)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들의 호기심은 더욱 불붙게 마련이었다.

 

양주는 묵자와 비슷한 시기에 생존했던 위나라 사람으로 노자(老子)의 제자였다는 풍문 이외에 그 생애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기록된 문헌이 없다. 다만 <열자(列子)>라는 책의 뒷부분에 양주편(楊朱篇)이라는 것이 붙어 있어 양주의 생애와 사상을 어느 정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양주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위아지의(爲我之義), 즉 철저한 자기를 중심으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것은 묵자의 겸애사상과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는 내용이었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묵자의 그것과는 다른 이유로써 효(孝)나 충(忠)에 매여서도 안 되기 때문에 유가에서 양자를 적대시할 만하였다.

 

하루는 양주의 제자인 금자(禽子)가 양주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선생님 몸에서 한 터럭을 뽑음으로써 세상을 구제할 수 있다면 한 개의 털을 살갗에서 뽑겠습니까?” 그러자 양주는 자기 손등의 털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세상은 본시부터 한 개의 터럭으로 구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한 터럭으로 구제될 수 있다고 가정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금자는 집요하게 양주의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나 양주는 굳게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 짧은 대화야말로 양주의 자기중심주의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할 것이다.

 

양주는 사족(士族) 중에서도 하층에 속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외진 시골의 관리로서 성실하게 일하며 가족들을 먹여 살리느라 애를 썼다. 무엇보다 아버지는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다. 아버지는 그렇게 일생 동안 근면하게 살았지만 그 당시 세습 귀족 집단인 대부(大夫)의 위치로는 올라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사(士)는 사로 끝나야만 하였다.

 

아버지가 과중한 업무를 몸과 마음을 바쳐 감당하다가 순직하였을 때, 양주의 가족들에게는 하루 끼니에 해당하는 곡식조차 남아 있지 않은 형편이었다. 양주는 아버지가 나라를 위해 그토록 성심성의껏 일한 결과가 고작 이것인가 하고, 고지식하게 살다 간 아버지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까지 생겼다. 아버지는 나름대로 나라에 충성을 다했지만 나라는 전혀 알아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양주의 식구들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몰랐다.

 

어머니와 동생들이 기아와 병으로 죽고 난 후 양주는 전쟁터로 끌려가 사병으로 복무하게 되었다. 양주가 똑똑하다는 평판이 났는지 양주는 장군의 시병(侍兵)으로 발탁되어 시중을 들게 되었다. 그런데 병사들은 생고생을 하는 전쟁 중인데도 장군은 틈만 나면 점령한 마을에서 여자들을 데리고 연회를 즐기며 호의호식하였다. 얼굴이 좀 반반한 여자들은 다 장군의 밥이 되었다. 그렇게 진탕 놀고도 병사들 앞에서는 병사들을 누구보다 염려하는 지휘관임을 누누이 강조하며 나라를 위해 더욱 분발하여 싸우도록 독려하였다.

 

나중에 적군에 의해 군대가 포위되었을 때 그 장군은 자기 부대를 이끌고 적국에 투항함으로써 적국으로부터 포상을 받고 높은 지위까지 얻었다. 반면에 아무것도 모르고 그를 따랐던 병사들은 적국에서 포로생활을 하며 노예처럼 살았다. 양주는 장군의 배려가 있었는지 포로 생활에서 곧 빠져나와 자유의 몸이 되었다.

 

양주는 이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의로움이라든지 충성이라는 것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충성이라는 것은 임금을 편안하게 해주지도 못하면서 자기 몸만 상하게 하기 십상이다. 의로움이라는 것도 외부 상황을 호전시키지도 못하면서 자기만 손해 보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충성이니 의로움이니 하는 것은 허울 좋은 이름에 불과하다.

 

양주는 이런 생각들을 굳혀갔다. 그리고 가족들의 죽음과 전쟁터에서의 죽음들을 경험한 양주의 내면에, 인생이란 죽으면 그만이라는 관념이 깊숙이 자리 잡게 되었다. 십 년 만에 죽어도 역시 죽음이요, 백 년을 살다 죽어도 역시 죽음이다. 어진 이와 성인도 역시 죽고 흉악한 자와 어리석은 자도 역시 죽는다. 살아서는 요(堯) ‧ 순(舜)이라도, 죽어서는 그저 썩은 뼈일 뿐이다. 걸왕(桀王)과 주왕(紂王)도 살아서는 걸 ‧ 주이나, 죽으면 역시 썩은 뼈일 뿐이다. 썩은 뼈는 한 가지인데 누가 그 다른 점을 알겠는가? 그러니 현재의 삶을 즐겨야지, 어찌 죽은 뒤를 걱정할 겨를이 있느냐.

 

이러한 죽음관은 역사관까지도 바꿔놓고 말았다. 공자가 <춘추(春秋)>에서 엄격하게 춘과 추로 나누어 심판한 역사 기술도 양주가 보기에는 억지인 것만 같았다. 어떤 왕은 살아생전 성군이 도기 위해 자기를 절제하며 고생하다 죽었으므로 칭송을 듣고 어떤 왕은 살아생전 실컷 즐기다가 죽었으므로 비난을 받는데, 이미 죽은 자에게 칭송과 비난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결국 성왕이라고 칭송을 받는 왕들은 사후에 칭송을 받고자 하는 명예욕으로 인해 살아생전 고생만 했을 뿐이다. 그 칭송이 수백 년 이어진다 한들, 어찌 죽어 마른 뼈를 윤택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양주는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지 못한 왕들이 오히려 어리석게만 생각되었다. 죽으면 곧 썩어질 몸인데 몸이 원하는 바대로 해주는 것이 좋지 않으냐는 것이 양주가 주장하는 삶의 철학인 셈이다. 백 년이란 사람 목숨의 최대 한계이므로 백 년을 사는 사람은 천에 하나 꼴도 안 된다. 설사 백 년을 산다 한들, 어려서 안겨 있는 기간과 늙어 아무 힘도 없이 있는 기간이 그 절반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잠자는 시간, 헛된 생각을 하는 시간, 아프고 병들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시간들을 제하고 나면 정작 아무 걱정 없이 즐겁게 자득(自得)한 시간은 조금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는 동안 무엇을 중심적으로 해야 하느냐, 기회만 있으면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을 즐길 것인가.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 음악과 여인을 즐겨야 한다. 미인을 데리고 놀면서 음악을 듣고 춤추는 그 완문(翫聞)의 재미라니. 이것이 인생에 있어 추구해야 할 최고의 목적이 아닌가. 죽은 뒤의 명예 같은 것이야 구더기에게나 주어라. 죽게 되면 불에 태워도 좋고, 물속에 가라앉혀도 좋고, 땅에 묻어도 좋고, 들에 버려도 좋고, 나무 섶에 싸 가지고 깊은 골짜기에 버려도 좋고, 곤룡포에 수놓은 바지를 입혀 돌로 만든 덧관에 넣어도 좋다. 그저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해도 좋다. 그런데 인생에 있어 즐길 수 있는 기간도 얼마 되지 않으니 즐길 수 있는 때에 실컷 즐기는 게 낫다. 기력이 쇠하여 미인들을 데리고 놀 힘도 없을 때에는 즐기려고 해보았자 소용없는 일이다.

 

양주는 여러 가지 인생 경험을 한 후에 사람들의 마음이 안식을 누리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네 가지도 정리하게 되었다. 수명과 명예와 지위와 재물, 이 네 가지가 사람들로부터 안식을 빼앗아가는 것들이었다. 이렇게 볼 때 양주가 극단적인 쾌락주의나 허무주의에 빠졌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하루는 이런 면에서 양주를 오해하게 된 맹손양(孟孫陽)이라는 제자가 양주에게 물었다. “여기 한사람이 있어 삶을 귀중하게 여기고 몸을 사랑하므로 죽지 않기를 구한다면 어떻습니까?” “죽지 않는다는 이치는 없다(理無不死).” “그럼 오래 살기를 구한다면 어떻습니까?”

“오래 산다는 이치도 없다(理無久生). 삶이란 귀중히 한다고 해서 존속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몸이란 것도 사랑한다고 해서 건강을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오래 살아서 무얼 하겠다는 것인가. 여러 가지 감정이나, 좋아하고 싫어하는 느낌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며 몸의 편안함과 위태로움, 세상의 괴로움과 즐거움, 세상의 변화와 혼란, 정치 상황, 이 모든 것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되풀이 되고 있다. 이미 그런 것들을 보았고 경험하였으니 백 년 수명을 사는 것도 지겨울 판인데 그보다 더 오래 살기를 구하니 그 지루함을 어떻게 견디려고 그러나.”

 

맹손양은 당황해하며 약간 비아냥거리는 조로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속히 죽어버리는 것이 오래 사는 것보다 나을 것이니 창끝이나 칼날을 밟든지 물이나 불속으로 뛰어 들어가든지 하면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겠군요.”

양주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렇지 않다. 이왕 태어났으면 목숨을 다하기까지 그대로 살아나가야 한다. 그리고 죽음이 다가오면 죽음에 자신을 맡기는 자세로 받아들이면 된다. 인위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려 한다든지 늦추려 한다든지 하면 안 된다. 어찌 나서 죽는 일에 빠름과 더딤의 구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빠름과 더딤에 구애되지 말고 정해진 운명에 맡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의 이치를 따라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순민(順民)이라 불렀다.

 

여기서 볼 때 양주는 생애의 집착도 거부하고 생의 포기도 거부하는 가운데 그 둘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인생을 즐기는 철학을 지니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은연중에 스승 노자의 무위사상이 배어든 것을 알 수 있지만 아무튼 양주는 개인주의적인 성양을 짙게 띠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 사회적인 면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p.295~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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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율곡 선생을 낳으심이 당연하다 하겠다.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은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어머니로 강릉에서 나고 자라 19세에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하였다. 시서화(詩書畵) 모두에 뛰어난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문인으로 현행 오만 원 권 지폐의 초상이기도 하다. 사임당이라는 호는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사모한다는 뜻이다. 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는 당대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 명화로 꼽히고 있다. 율곡은 어머니의 행장(行狀)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글짓기에 능하고 농필(弄筆)을 잘하며 침선(針線), 자수에 이르기까지 정묘하지 않은 것이 없으셨다. 7세 때부터 안견의 그림을 모방하여 산수도를 그렸고 초충, 영모, 포도를 잘 그려 세상에 적수가 없었다.

  

사임당의 작품으로는 초충도 화첩 서너 점과 산수, 포도, 묵죽, 묵매 등 전칭(傳稱) 작품이 몇몇 전하고 있다. 그중 <초충도>8폭 화첩이 가장 유명하며, 이들은 대개 비슷한 유형으로 구성된다. 오이와 메뚜기 물봉선화와 쇠똥벌레 수박과 여치 가지와 범의 땅개 맨드라미와 개구리 가선화와 풀거미 봉선화와 잠자리 원추리와 벌 등이다.

  

사임당의 초충도는 섬세한 필치와 미려한 채색으로 고상하면서도 우아한 품격이 있다. 그림의 주제인 풀과 벌레를 보면 모두 사생에 기초했다고 생각될 정도로 토속적인데, 나비, 벌 등의 표현이 마치 곤충채집을 한 것처럼 좌우대칭을 이룬다. 이는 자수의 본으로 그렸기 때문이며 그런 조용한 정지감 속에서 우리는 정서의 해맑은 표백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사임당은 작품에 낙관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확증할 수 있는 작품이 없다. 사임당의 그림에 도서낙관이 없는 것은 당시의 풍조가 그러했던 전도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여인이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 자체가 흉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이원수의 사랑방에 친구들이 찾아와 노닐다가 자네 아내 그림 솜씨 좀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이에 안채로 사람을 보내 그림을 그려 보내라고 하였더니 사임당은 한사코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러기를 재삼 재사에 이르자 사임당은 남편의 청을 무작정 거절하는 것도 아내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결국 그림을 그려 보냈는데 백자 접시 위에 그린 것이었다. 나중에 지워서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러니 사임당의 조서낙관은 애당초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임당의 작품 감정은 화풍, 재료뿐만 아니라 그 그림의 내력과 증언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중 신빙할 수 있는 작품은 오죽헌 소장본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이다. 오죽헌 소장본은 본래 율곡을 모신 강릉 소담서원에 전래된 것으로 숙종 때의 문신 정호(鄭澔)1655년 송담서원을 방문했을 때 그림을 보고 사임당의 그림 솜씨에 감격하였다는 발문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에는 사임당 신씨의 방손(傍孫. 먼 친척)으로 신립 장군의 6대 손인 신경(申暻)이 작품을 소장하게 된 동기를 자세히 기록하였다. 한편 우암 송시열(宋時烈)도 사임당의 초충도에 발문을 붙인 것이 있어 그 글이 <송자대전(宋子大全)>에 실려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이 작품은 전하지 않는다. 우암은 이렇게 말했다.

  

이 화첩은 좌찬성 이원수의 부인되는 신사임당의 그림이다. 그 손가락 아래서 표현된 것이라면 능히 혼연히 자연스러움을 이루어 사람의 힘을 빌어서 된 것이 아닌 것 같을진대 하물며 오행(五行)의 정수를 얻고 또 천지의 근본이 되는 기운의 융화를 모아 참된 조화를 이룸에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저 율곡 선생을 낳으심이 당연하다고 하겠다.

  

선생의 종증손 되는 동명(東明) 이백종(李百宗)이 판관이 되어 평안도 안주 병영으로 나가면서 이 화첩을 내게 보이며 글을 써달라고 한다. 그런데 이 화첩이 남의 집으로 흘러가 이씨의 소유가 되지 않은 지 벌써 오래다. 이백종이 사임당의 그림을 찾아 나서기를 마다하지 않더니 마침내 금년 어느 날에 한양의 어느 집에서 이것을 얻어 옛 모양으로 장황(裝潢 : 표구)하여 다시 이씨 집안에 전해 내려갈 백대(百代)의 보배로 삼으니 그 뜻이 과연 부지런하고 도 지극하다고 이를 만하다.....

  

이 그림이 다행히 보존되어 없어지지 않았기에 지금 이 화첩을 보며 사람들은 부인(사임당)의 어머니 됨과 선생(율곡)의 아들 됨이 진실로 근본과 가지가 서로 이어져 있다는.....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백종은 소홀히 하지 말지어다.

기해년(1659) 섣달에 우암 송시열 쓰다.

  

우암 송시열 같은 도학자가 이 화첩을 대한 것을 보면 선현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사물로서 그림을 보았다. 초충도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임당과 그 아들 율곡의 모습까지 그려본 것이었다. 그것은 그림의 또 다른 효용 가치이며, 그림을 보는 또 다른 눈이다.

  

그러나 우암 송시열이 소중히 보존하라고 그렇게도 신신당부한 사임당의 화첩은 불행히도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다 유홍준 <명작순례>  p.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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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정호승 지음, 황문성 사진 / 비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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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책상 앞에 붙어 있는, 토성에서 찍은 지구 사진을 늘 바라봅니다. 그 사진은 신문 1면에 머리기사로 난 토성 사진으로, 말하자면 토성에서 본 지구사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은 지구를 찍은 사진이 아니라 토성을 찍은 사진인데 일곱 개 토성의 고리 너머 머나먼 곳에 지구가 조그마하게 찍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구가 잘 보이지 않을까봐 편집자가 일부러 지구 주변에 네모 표시해 놓고 그 안에 점으로 보이는 게 지구라는 설명까지 덧붙여 놓았습니다.

  

저는 그 사진을 처음 본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 지구가 저렇게 작다면 우주는 얼마나 큰 것인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우주의 그 수많은 별 중에서 지구라는 작은 별, 그 지구에서도 넓은 우주의 그 수많은 별 중에서 지구라는 작은 별, 그 지구에서도 아시아, 아시아에서도 대한민국, 그 속에서도 서울이라는 곳의 한 작은 아파트에 사는 나는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그런데 무엇을 더 얻고 소유하기 위해 욕심 가득 찬 마음으로 매일 전쟁을 치르듯 아옹다옹 살고 있는가. 저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한동안 가슴 멍한 느낌이었습니다.

  

언젠가 우주비행사가 달에서 지구를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사진 속의 푸른 지구는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지구의 지평선 너머로 달이 보이는 게 아니라 달의 월평선 너머로 지구가 보여, 지구가 마치 지평선에 뜬 달처럼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구를 마냥 아름다운 존재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진은 지구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보여준 것이지 좁쌀만 한 지구의 크기를 보여준 건 아니었습니다. 지구의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과 지구의 크기를 깨닫는다는 것은 확연히 다른 문제였습니다.

  

저는 토성 사진을 신문에 난 무수한 사진 중의 하나로 치부해버릴 수 없었습니다. 정성껏 코팅해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붙여 놓았습니다. 지금도 책상 앞에 앉아 고개만 들면 그 사진이 보입니다. 저는 그 사진을 볼 때 마다 마음의 위안을 얻습니다. 우주의 크기를 생각하면 지구는 얼마나 작고, 지구 속에 사는 나는 또 얼마나 작은가, 그러니 욕심내지 말고 주어진 여건 속에서 모든 걸 받아들이며 열심히 살자,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통스러워 견디기 힘든 일이 있을 때는 그 사진을 더 오랫동안 들여다봅니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광활한 몽골의 초원도, 그랜드 캐니언의 웅장한 협곡의 위용도 볼펜똥만 한 지구 속에 존재해 있는 것이란 생각을 하면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집니다. 무엇보다도 그 사진은 고통의 근원인 내 욕망의 고리를 잘라버립니다. 욕심이 적으면 적을수록 고통도 적어진다는 평범한 사실을 문득 깨닫게 해줍니다.

  

우주인들은 우주에서 귀환한 후 환경주의자나 생태주의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것은 우주의 크기를 직접 체험하면서 지구가 얼마나 작고 위태로운 존재인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제 인생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제 인생을 지구라고 생각하고 우주의 크기에 빗대어 생각해보면 지금 제 삶에서 일어나는 고통스러운 일들, 결코 원하지 않은 슬픔이나 비극들은 아주 사소한 먼지 같은 의미를 지닐 것입니다.

    

저는 요즘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눈앞의 사소한 일들 때문에 낙담하고 좌절하는 가까운 벗들에게 우주의 크기를 한번 생각해보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넓은 우주 속에 떠도는 모래알보다 작은 지구, 거기서 또 티끌보다 작은 나라에 살면서 마음 상한다고 마음 상하고, 절망에 빠진다고 절망에 빠지는 내가 그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깊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말하곤 합니다. 우주는 지구가 얼마나 작고, 그 지구 속에 사는 인간이 얼마나 작고, 그 인간이 이루는 삶 또한 얼마나 사소한가를 증명하는 존재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살아가는 사소한 일에 별로 관심이 안 가요. 우주가 이렇게 넓은데 왜 이 좁은 데서 서로 으르렁대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런지 저는 국가 간 스포츠 경기를 보면서 열 내는 사람은 이해가 잘 안돼요.”

  

이 말은 국제적 명성을 떨친 우리나라의 젊은 천문학자 이영욱 박사의 말입니다. 저는 이 말에 크게 공감합니다. 개인적인 삶의 크고 작은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분단된 우리의 정치, 사회 곳곳에도 해당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크기를 생각하면 지구는 얼마나 작고, 지구에 사는 나는 또 얼마나 작은가.‘

 

오늘도 이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평화로워집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우주가 있다고 하지만 마음이 평화로워야 마음속에 우주를 담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우주의 크기에 비해 먼지보다 작지만 우리의 마음만은 광활한 우주를 담을 수 있을 정도로 큽니다. 인간은 보잘 것 없은 물리적 크기와는 달리 마음만은 우주를 품을 수 있는 광활한 존재입니다.

  

언젠가 먼 우주로부터 내 방 문틈으로까지 흘러 들어온 햇살 속의 먼지를 보고 저 자신이 얼마나 감사한 존재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무슨 대단한 존재인 줄 알았으나 햇살에 떠도는 먼지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하고, 또 그런 먼지에 불과한 나를 햇살이 찬란하게 비춰주시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p.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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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莊子) - 그림으로 쉽게 풀어쓴 지혜의 샘
장자 지음, 완샤 풀어쓴이, 심규호 옮김 / 일빛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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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나비 꿈

 

언젠가 장주(莊周 : 장자의 본명)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며 마치 한 마리 나비처럼 즐겁기만 했다.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자신이 장주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문득 깨어나 보니 자기는 틀림없는 장주가 아닌가. 그렇다면 장주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일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장주가 된 것인가.

 

당대의 시인 이상은(李商隱. 812~858)은 칠언 율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금슬은 공교롭게도 현(絃)이 오십 개, 현마다 슬기둥마다 화려했던 세월을 생각한다. 장주, 꿈에서 깨어 나비었나 헷갈리듯, 망제 춘심을 두견새에 기탁한 듯, 창해의 달빛 아래, 맑은 구슬 반짝이는 눈물 같고, 따사로운 날 남전(藍田 : 색료로 쓰이던 쪽을 기르는 밭) 옥에 연기 피어나는 듯 한데, 이런 정회는 추억으로 남을 것이나, 그때는 실로 망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네.“ 이 시에 나오는, ”장주, 꿈에서 깨어나 나비었나 헷갈리듯“이라고 노래한 대목은 <장자> ‘제물론’의 호접몽에서 유래했다. 이상은은 이를 통해 자신의 회재불우(懷才不遇 : 재주는 지녔으되 때를 만나지 못함)와 비극적인 사랑의 안타까움, 그리고 꿈같은 인생에 대한 아쉬움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상식적으로 장주가 나비 꿈을 꾼다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나비가 장주를 꿈꾼다는 것은 황당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사실 인간과 대상의 관계는 대립적이기도 하고 통일적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대립적인 측면이 있는가 하면, 서로 융화하는 통일적인 측면도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객관 사물을 인식하고 파악하는 방법에는 논리적인 추론에 따른 이성적 사유도 있고, 직접적인 체험과 깨달음을 통한 직각 사유도 있다. 전자는 인간의 이지에 편중하고, 후자는 정감적 요소를 강조한다. 장주의 ‘나비 꿈’은 인간과 자연의 화해와 통일의 측면을 강조한다. 그리고 예술적인 직각 사유를 운용하여 정감적 체험을 통해, 내재적 인식방법으로, 인간과 자연이 생명의 근원에서는 같은 뿌리를 지니고 있다는 심오한 철리를 설파한다.

 

꿈이란 인간의 잠재의식이 자유롭게 드러남이다. 현실에서 인간은 온갖 이해관계 속에서 하루 종일 더 많은 이익과 공적을 얻기 위해 분주하다. 생활의 무게와 문화 규범의 제약은 개체의 자유로운 자아의식을 구속하고 억제한다. 하지만 꿈속에서는 모든 이해관계와 세속의 잡념이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춘다. 꿈에서는 생각과 마음이 탁 트이고, 정감이 활발하게 움직이며, 풍부한 상상력이 발휘되면서 시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천지에서 노닐 수 있다.

 

평소 억압되어 있던 잠재의식이 드러나면서 아주 명료하고 생동감 있는 형상으로 인간의 심리 세계에 표출된다. 장주의 ‘나비 꿈’은 현 사회에서 억압되어 있던, 자유를 갈망하는 잠재의식을 반영한다. 이는 개인의 이상 속에 존재하는 ‘자유 왕국’의 예술적 재현이다. 또한 소박하고 돈후하며 무사무욕을 갈망하는 장자라는 개인의 감정과 자유로운 창조활동의 이상과 소원을 반영하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나비’는 아름다운 삶의 화신이자 자유로운 인생의 상징이다.

 

 

이정(移情)과 물화(物化)

 

사람과 사물은 구별된다. 사람은 대상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지만, 대상은 인간의 오묘한 심리를 감지할 수 없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다. 그렇다면 ‘장자의 나비 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는 공리적이고 논리 분석적인 각도에서 사람과 사물의 대립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심미적인 시각, 예술적인 시야로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은 오랜 세월 자연을 관찰하고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자연물의 특징과 본질을 탐구했다. 외형적인 구조나 운동 변화 속에서 자연물이 지닌 여러 가지 형태로 인해 사람들은 정감이나 이지가 더욱 풍부해 졌다.

 

사람들은 자연물과 생명 정감을 교류하는 가운데 일종의 정신적 즐거움과 심리적 보상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일러 ‘이정(移情)’이라고 한다. 장자는 사회규범의 제약과 인간의 공리적 욕구의 간섭을 배제한 자유로운 꿈의 경계에서 자유로운 삶을 갈망하는 정감 의식을 아무런 구속도 없고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나비에게 옮겨 놓았다. 이로써 나비는 사람의 속성을 지니게 되고, 아름다움의 화신이자 자유의 상징으로 변화한다. 심미적인 태도, 예술적인 관점을 지닐 때 비로소 인간과 자연만물이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동질성을 지닌다. 이를 깨달아야 ‘장자의 나비 꿈’이 지닌 합리성을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독특한 객관적 체계에 대한 인식방법은 정감의 체험이자 직각적인 깨달음이므로 그것을 말로 전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의회(意會)’ 즉 마음으로 깨닫는, 일종의 직각 사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안정한 사회 현실의 참혹한 상황과 삶에 대한 감개로 인해 사람들은 때로 ‘장자의 나비 꿈’이 지닌 의미를 오해했다. 특히 후대의 문인이나 사대부들은 환로(宦路 : 벼슬길)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을 때, ‘인생은 꿈과 같다.’는 식으로 소극적인 정서를 표출하곤 했다. 이처럼 ‘인생은 꿈과 같다.’는 뜻이 점차 ‘호접몽’ 자체를 대체하면서 인생의 어려움에 봉착하거나 뜻을 이루지 못했을 때 ‘장자의 나비 꿈’을 이야기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어쩔 수 없는 숙명론이 심미적인 이상과 인생의 희구를 생동적으로 표현한 ‘장자의 나비 꿈’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장자의 나비 꿈에서 그가 강조하고 있는 또 하나의 사상은 ‘물화(物化)’다. 사람과 자연의 뿌리는 다르지 않다고 본다면, “천지와 나는 함께 태어나고 만물과 나는 하나가 된다.(天地與我同生, 萬物與我爲一).“ 나와 외물이 서로 변화하여 ‘물아양망(物我兩忘 : 일체의 사물과 나를 모두 잊음)으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세속의 잡념을 떨쳐 버리고, 정신을 하나로 집중하여 자아와 외물이 떨어질 수 없는 특수한 지경에 이르러야 한다. 일종의 심미정취인 이것은 직각(直覺)을 통해 사람과 자연 만물이 혼연일체임을 깨닫고 경험하는 것이다. 특히 이는 예술 감상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자연의 왕성한 활력을 맛보고, 가장 완미한 삶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고요하고 아름다운 의경 속에서 비로소 장자의 나비 꿈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P.97~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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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독서 전략 - 21세기 글로벌 인재를 키우는
권영식 지음 / 글라이더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온 세상에 무슨 소리가 가장 맑을꼬.                   天地可聲第一淸

눈 쌓인 깊은 산속의 글 읽는 소리로세.               雪山深處讀書聲

신선이 패옥 차고 구름 끝을 거니는 듯                仙官玉佩雲端步

천녀가 달 아래서 거문고를 퉁기는 듯                 帝女謠絃月下鳴

사람 집에 잠시라도 끊겨서는 안 되는 것             不下人家容暫絶

당연히 세상 형편과 함께 이룩될 일이로세.          故應世道與相成

북쪽 산등성이 오막살이 그 뉘 집일꼬.                北埯甕용云誰屋

나무꾼도 집에 가길 잊고 정 보낼 줄 안다네.        樵客忘歸解送情

 

                        정약용. <부득산북독서성(賻得山北讀書聲)>

 

다산은 세상의 그 어떤 소리보다 책 읽는 소리가 가장 맑고 좋은 소리라고 생각했기에 책 읽는 소리를 예찬하는 시를 지었다.

 

 

1. 내면을 키우는 묵상

 

한 권의 책을 읽어 나갈 때 모든 내용을 정독으로 읽을 수는 없다. 내용에 따라서 읽는 속도가 달라진다. 천천히 깊이 읽는 독서를 통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천천히 읽는 방법 중에는 묵상이 있다. 묵상은 침묵하는 가운데 깨끗하고 은혜로운 단어에 귀를 기울이거나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묵상(黙想. meditation)의 어원은 '메디켈루스(medicelus)'라는 단어로 약(medicine)의 어원이기도 하다. 약이 몸에서 녹아 혈관을 통해 온 몸으로 퍼질 때 치료가 되듯이 거룩한 언어들이 묵상을 통해 우리의 생각과 의식, 무의식, 잠재의식, 영혼 속에 깊이 스며들 때 비로소 우리는 온전히 내 것으로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묵상은 라틴어로 메디타리(meditari)라고 하는데, ‘마음에 품다, 상상하다, 음미하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신중히 생각하는 것, 반복하여 중얼거리는 것, 깊이 연구하는 것’을 묵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묵상의 영어 단어와 비슷한 말로는 ‘되새김질(rumination)’이 있다.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들은 아침 일찍 풀밭에 나가 자신이 먹을 수 있는 만큼의 풀을 뜯어 먹는 데 온전히 집중한다. 그들은 일단 풀을 대강 씹어 삼킨 뒤 해가 뜨거워지면 그늘에 누워 위 속에 저장해 두었던 풀들을 다시 꺼내어 꼭꼭 씹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작업을 한다. 묵상도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말들을 다시 떠올려 조용히 음미하며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지 상고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명언, 좋은 글, 좋은 시, 특히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 내면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인격과 성품이 변화된다. 우리의 속사람이 새롭게 탄생하는 변화가 일어난다. 닭이 온몸으로 정성을 다해 알을 품으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듯이 마음으로 귀한 말씀을 품으면 새로운 내가 탄생한다. 우리는 그런 자신의 탄생에 감탄하게 된다.

 

묵상을 하면 마음이 맑아지고 평안해진다.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 묵상은 깊이 있는 사람을 만든다. 깊이 있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고, 깨달음이 깊은 사람이며, 깊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다. 깊이 있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현상보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 안에 있는 본질을 추구한다.

 

 

2. 온몸으로 읽는 낭독

 

낭독은 소리 내어 읽는 것을 말한다. 유럽의 중세 시대나 우리나라의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낭독을 의미했다. 로마시대에는 낭독을 건강에 도움이 되는 운동의 하나로 보기도 했다. 낭독은 묵독과 달리 육체적인 에너지가 필요하다. 예전에 동화구연을 배울 때 목소리 훈련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모든 글을 큰 소리로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면 소화가 빨리 되어 금방 배가 고팠다.

 

낭독은 온몸으로 읽는 것이다. 책 읽는 소리에 정신이 맑아지고 몸에 있는 모든 세포들이 깨어나 힘을 얻고 글의 의미는 내면에 조용히 스며들게 된다. 낭독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평상심을 찾아주는데 효과적이다. 또한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내용은 크게 소리 내어 읽으면 이해가 훨씬 더 빨라진다.

 

마음에 위로가 되는 글은 그냥 큰 소리로 읽었을 뿐인데 새로운 힘이 솟아오르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요즘은 발표나 스피치 훈련을 위해서 큰 소리로 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은데 꽤 도움을 받을 것이다.

 

집안에서의 낭독은 가족관의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만들어준다. 서로의 관심과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아이들은 엄마 또는 아빠가 책 읽어주는 시간을 좋아한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휘력과 기억력, 집중력이 좋아지고 언어능력이 발달된다. 또한 평생 책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독서습관이 길러진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낭독하는 책을 통해서 아이의 관심사와 좋아하는 단어, 이해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부족한 부분은 메워주고 좋아하는 건 함께 나눌 수 있게 되니 사이가 더 돈독해질 수밖에 없다.

 

아침 밥상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글을 읽어 주고 함께 아침을 먹는다면 아이들에게는 밥 먹는 시간이 특별해질 것이다. 가족이 서로 돌아가면서 좋은 시나 문구를 서로에게 낭독해주면 매일매일 특별한 이벤트가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집중력이 떨어지는 아이가 있다면 책을 읽어주고 큰 소리로 따라 읽게 하면 집중력과 학습능력이 좋아진다.

 

 

3. 반복읽기

 

반복에는 특별한 힘이 있다. 생명을 지속시키는 힘이 있고, 둔재를 천재로 만드는 신비한 능력이 있으며, 가난한 사람에게는 신분상승이라는 선물을 주기도 하고, 총명한 사람을 위대한 인물로 만들기도 한다.

 

조선 중기의 시인인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은 어릴 때 둔재로 유명했다. 주변 사람들은 온 동네에 바보로 소문난 김득신을 가르치는 일은 시간낭비라며 부친이 김치(金緻)에게 당장 그만두라고 말렸다. 하지만 김치는 아랑곳하지 않고 김득신에게 되풀이해서 글을 가르쳤다. 김득신은 스물이 되어서야 비로소 글 한 편을 지어 부친에게 올렸다. 김치는 그 글을 받아보고 크게 감격했다. “더 노력해라. 공부란 꼭 과거를 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을 들은 김득신은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리고 더욱 분발해서 밤낮없이 글을 읽고 또 읽었다. 김득신에게는 독서록이 있었는데, 천 번을 읽지 않은 것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사마천의 <사기> 중 ‘백이전’ 같은 것은 1억 1만 3천 번을 읽었다고 한다. 그 당시의 1억은 10만의 숫자를 나타낸 것이니 11만 3천 번을 읽은 것이다. 여기에서 연유하여 김득신의 서재는 ‘억만재(億萬齋)’라 이름이 붙여졌다.

 

김득신이 죽기 살기로 책을 읽었다. 그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남들보다 한참이나 늦긴 했지만 서른아홉 살에는 진사과에 합격했고, 쉰아홉 살에는 과거에 급제했다. 무엇보다 그는 누구보다도 빼어난 작품을 남긴 조선 중기의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미련하고 둔한 김득신이었지만 독서를 반복함으로써 글을 암송하고 시를 쓰는 재주를 갖추게 되었으며 후세까지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이다. 부족한 사람은 있어도 부족한 재능은 없음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보다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겠지만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 데 달렸을 따름이다. <김득신의 묘비명>

 

세종대왕은 사서오경을 100번씩 읽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대학>을 좋아했다. <대학>은 송나라의 사마광이 사서오경 중 <예기>에 있던 내용을 따로 떼어 만든 것이다. 이 책에서는 덕을 밝히는 일,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 지극히 착한 것에 머무르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또한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드는 격물, 사물의 도리를 깨닫는 치지, 정성을 다하는 성의, 마음을 올바르게 하는 정심,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닦는 수신, 집안을 바로잡는 제가, 나라를 잘 다스리는 치국, 천하를 평온하게 하는 평천하에 대해 말하고 있다.

 

특히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바로 세우고 집안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였다. 세종대왕은 이 책을 수백 번이나 읽었다. 이런 책을 수백 번 읽으면 그 누구라 하더라도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다만 수백 번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드물 뿐이다.

 

세종은 경전뿐만 아니라 조선의 악기, 음악 정비, 음운학, 한글 창제, 국방과 과학에 관한 수많은 책을 읽었다. 조선의 오백년 역사는 그의 독서력 위에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왕, 가장 열심히 노력하고 부지런히 일한 왕, 수많은 업적과 귀중한 발명품을 후손들에게 선물로 남긴 왕이 바로 세종이다. 그 위대한 업적을 뒷받침했던 것이 바로 방대한 독서력이었다. p.118~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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