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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읽는 전국책 1 - 술책편
조성기 지음 / 동아일보사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맹자(孟子)>의 등문공 장구(滕文公章句)에 보면 공도자(公都子)라는 제자가 맹자에게 묻는 장면이 나온다.
“다른 사람들이 다들 선생님을 보고 변론을 좋아하는 자라고 하는 데 어째서 그러하옵니까?” 그러자 맹자는, “내가 어찌 변론을 좋아하겠는가. 부득이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변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변론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하여 길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성왕(聖王)>이 나오지 않고 제후는 방자해져가고 학자들이 불온한 사상들을 내세우고 있다. 그 중에서도 묵적(墨翟. BC480년~BC390년 추정)과 양주(楊朱. BC395년경~BC335년) 의 이론이 천하에 가득 차서 천하의 사람들이 양주 이론을 찬성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묵적의 이론으로 돌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양주는 위아(爲我)를 말했으니 임금을 무시하는 것이요, 묵적은 겸애(兼愛)를 주장했으니 부모를 무시하는 것이다. 자기 아비를 무시하고 임금을 무시하는 것은 금수들이나 하는 짓이다.
양주, 묵적의 이론들이 없어지지 않으면 공자의 도가 드러나지 않게 되니 그것은 사설(邪說 : 올바르지 않은 논설)이 백성을 속이고 인의(仁義)의 길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인의의 길을 막는 것은 곧 짐승을 몰아다가 사람을 잡아먹게 하고 장차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게 하는 것이 된다. 나는 이것이 두려워서 첫 성인의 도를 지키고 양주와 묵적의 이론을 배격하여 방자한 이론이 다시는 나오지 않게 하고자 한다. 그래서 변론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할 수 없이 변론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볼 때 맹자는 묵자와 양자(양주)의 사상을 이단 사설의 대표적인 것으로 꼽고 있다. 맹자의 말대로 그 당시 묵자와 양자의 사상이 민간에 널리 퍼지고 있었다. 그 사상들은 두고두고 맹자를 비롯한 유가(儒家)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들의 호기심은 더욱 불붙게 마련이었다.
양주는 묵자와 비슷한 시기에 생존했던 위나라 사람으로 노자(老子)의 제자였다는 풍문 이외에 그 생애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기록된 문헌이 없다. 다만 <열자(列子)>라는 책의 뒷부분에 양주편(楊朱篇)이라는 것이 붙어 있어 양주의 생애와 사상을 어느 정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양주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위아지의(爲我之義), 즉 철저한 자기를 중심으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것은 묵자의 겸애사상과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는 내용이었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묵자의 그것과는 다른 이유로써 효(孝)나 충(忠)에 매여서도 안 되기 때문에 유가에서 양자를 적대시할 만하였다.
하루는 양주의 제자인 금자(禽子)가 양주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선생님 몸에서 한 터럭을 뽑음으로써 세상을 구제할 수 있다면 한 개의 털을 살갗에서 뽑겠습니까?” 그러자 양주는 자기 손등의 털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세상은 본시부터 한 개의 터럭으로 구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한 터럭으로 구제될 수 있다고 가정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금자는 집요하게 양주의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나 양주는 굳게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 짧은 대화야말로 양주의 자기중심주의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할 것이다.
양주는 사족(士族) 중에서도 하층에 속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외진 시골의 관리로서 성실하게 일하며 가족들을 먹여 살리느라 애를 썼다. 무엇보다 아버지는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다. 아버지는 그렇게 일생 동안 근면하게 살았지만 그 당시 세습 귀족 집단인 대부(大夫)의 위치로는 올라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사(士)는 사로 끝나야만 하였다.
아버지가 과중한 업무를 몸과 마음을 바쳐 감당하다가 순직하였을 때, 양주의 가족들에게는 하루 끼니에 해당하는 곡식조차 남아 있지 않은 형편이었다. 양주는 아버지가 나라를 위해 그토록 성심성의껏 일한 결과가 고작 이것인가 하고, 고지식하게 살다 간 아버지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까지 생겼다. 아버지는 나름대로 나라에 충성을 다했지만 나라는 전혀 알아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양주의 식구들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몰랐다.
어머니와 동생들이 기아와 병으로 죽고 난 후 양주는 전쟁터로 끌려가 사병으로 복무하게 되었다. 양주가 똑똑하다는 평판이 났는지 양주는 장군의 시병(侍兵)으로 발탁되어 시중을 들게 되었다. 그런데 병사들은 생고생을 하는 전쟁 중인데도 장군은 틈만 나면 점령한 마을에서 여자들을 데리고 연회를 즐기며 호의호식하였다. 얼굴이 좀 반반한 여자들은 다 장군의 밥이 되었다. 그렇게 진탕 놀고도 병사들 앞에서는 병사들을 누구보다 염려하는 지휘관임을 누누이 강조하며 나라를 위해 더욱 분발하여 싸우도록 독려하였다.
나중에 적군에 의해 군대가 포위되었을 때 그 장군은 자기 부대를 이끌고 적국에 투항함으로써 적국으로부터 포상을 받고 높은 지위까지 얻었다. 반면에 아무것도 모르고 그를 따랐던 병사들은 적국에서 포로생활을 하며 노예처럼 살았다. 양주는 장군의 배려가 있었는지 포로 생활에서 곧 빠져나와 자유의 몸이 되었다.
양주는 이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의로움이라든지 충성이라는 것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충성이라는 것은 임금을 편안하게 해주지도 못하면서 자기 몸만 상하게 하기 십상이다. 의로움이라는 것도 외부 상황을 호전시키지도 못하면서 자기만 손해 보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충성이니 의로움이니 하는 것은 허울 좋은 이름에 불과하다.
양주는 이런 생각들을 굳혀갔다. 그리고 가족들의 죽음과 전쟁터에서의 죽음들을 경험한 양주의 내면에, 인생이란 죽으면 그만이라는 관념이 깊숙이 자리 잡게 되었다. 십 년 만에 죽어도 역시 죽음이요, 백 년을 살다 죽어도 역시 죽음이다. 어진 이와 성인도 역시 죽고 흉악한 자와 어리석은 자도 역시 죽는다. 살아서는 요(堯) ‧ 순(舜)이라도, 죽어서는 그저 썩은 뼈일 뿐이다. 걸왕(桀王)과 주왕(紂王)도 살아서는 걸 ‧ 주이나, 죽으면 역시 썩은 뼈일 뿐이다. 썩은 뼈는 한 가지인데 누가 그 다른 점을 알겠는가? 그러니 현재의 삶을 즐겨야지, 어찌 죽은 뒤를 걱정할 겨를이 있느냐.
이러한 죽음관은 역사관까지도 바꿔놓고 말았다. 공자가 <춘추(春秋)>에서 엄격하게 춘과 추로 나누어 심판한 역사 기술도 양주가 보기에는 억지인 것만 같았다. 어떤 왕은 살아생전 성군이 도기 위해 자기를 절제하며 고생하다 죽었으므로 칭송을 듣고 어떤 왕은 살아생전 실컷 즐기다가 죽었으므로 비난을 받는데, 이미 죽은 자에게 칭송과 비난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결국 성왕이라고 칭송을 받는 왕들은 사후에 칭송을 받고자 하는 명예욕으로 인해 살아생전 고생만 했을 뿐이다. 그 칭송이 수백 년 이어진다 한들, 어찌 죽어 마른 뼈를 윤택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양주는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지 못한 왕들이 오히려 어리석게만 생각되었다. 죽으면 곧 썩어질 몸인데 몸이 원하는 바대로 해주는 것이 좋지 않으냐는 것이 양주가 주장하는 삶의 철학인 셈이다. 백 년이란 사람 목숨의 최대 한계이므로 백 년을 사는 사람은 천에 하나 꼴도 안 된다. 설사 백 년을 산다 한들, 어려서 안겨 있는 기간과 늙어 아무 힘도 없이 있는 기간이 그 절반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잠자는 시간, 헛된 생각을 하는 시간, 아프고 병들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시간들을 제하고 나면 정작 아무 걱정 없이 즐겁게 자득(自得)한 시간은 조금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는 동안 무엇을 중심적으로 해야 하느냐, 기회만 있으면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을 즐길 것인가.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 음악과 여인을 즐겨야 한다. 미인을 데리고 놀면서 음악을 듣고 춤추는 그 완문(翫聞)의 재미라니. 이것이 인생에 있어 추구해야 할 최고의 목적이 아닌가. 죽은 뒤의 명예 같은 것이야 구더기에게나 주어라. 죽게 되면 불에 태워도 좋고, 물속에 가라앉혀도 좋고, 땅에 묻어도 좋고, 들에 버려도 좋고, 나무 섶에 싸 가지고 깊은 골짜기에 버려도 좋고, 곤룡포에 수놓은 바지를 입혀 돌로 만든 덧관에 넣어도 좋다. 그저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해도 좋다. 그런데 인생에 있어 즐길 수 있는 기간도 얼마 되지 않으니 즐길 수 있는 때에 실컷 즐기는 게 낫다. 기력이 쇠하여 미인들을 데리고 놀 힘도 없을 때에는 즐기려고 해보았자 소용없는 일이다.
양주는 여러 가지 인생 경험을 한 후에 사람들의 마음이 안식을 누리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네 가지도 정리하게 되었다. 수명과 명예와 지위와 재물, 이 네 가지가 사람들로부터 안식을 빼앗아가는 것들이었다. 이렇게 볼 때 양주가 극단적인 쾌락주의나 허무주의에 빠졌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하루는 이런 면에서 양주를 오해하게 된 맹손양(孟孫陽)이라는 제자가 양주에게 물었다. “여기 한사람이 있어 삶을 귀중하게 여기고 몸을 사랑하므로 죽지 않기를 구한다면 어떻습니까?” “죽지 않는다는 이치는 없다(理無不死).” “그럼 오래 살기를 구한다면 어떻습니까?”
“오래 산다는 이치도 없다(理無久生). 삶이란 귀중히 한다고 해서 존속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몸이란 것도 사랑한다고 해서 건강을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오래 살아서 무얼 하겠다는 것인가. 여러 가지 감정이나, 좋아하고 싫어하는 느낌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며 몸의 편안함과 위태로움, 세상의 괴로움과 즐거움, 세상의 변화와 혼란, 정치 상황, 이 모든 것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되풀이 되고 있다. 이미 그런 것들을 보았고 경험하였으니 백 년 수명을 사는 것도 지겨울 판인데 그보다 더 오래 살기를 구하니 그 지루함을 어떻게 견디려고 그러나.”
맹손양은 당황해하며 약간 비아냥거리는 조로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속히 죽어버리는 것이 오래 사는 것보다 나을 것이니 창끝이나 칼날을 밟든지 물이나 불속으로 뛰어 들어가든지 하면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겠군요.”
양주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렇지 않다. 이왕 태어났으면 목숨을 다하기까지 그대로 살아나가야 한다. 그리고 죽음이 다가오면 죽음에 자신을 맡기는 자세로 받아들이면 된다. 인위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려 한다든지 늦추려 한다든지 하면 안 된다. 어찌 나서 죽는 일에 빠름과 더딤의 구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빠름과 더딤에 구애되지 말고 정해진 운명에 맡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의 이치를 따라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순민(順民)이라 불렀다.
여기서 볼 때 양주는 생애의 집착도 거부하고 생의 포기도 거부하는 가운데 그 둘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인생을 즐기는 철학을 지니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은연중에 스승 노자의 무위사상이 배어든 것을 알 수 있지만 아무튼 양주는 개인주의적인 성양을 짙게 띠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 사회적인 면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p.295~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