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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근 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 - 한 권으로 시작하는 동양고전 핵심 명저 25
신정근 지음 / 동아시아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예의 기원과 확장
‘예(禮)’자는 원래 귀신을 나타내는 ‘시(示)‘부분이 없이 ’풍(豊)’부분만 쓰였다. ‘풍(豊)’은 사람이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과정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두(豆)’는 제물을 올려놓는 제상을, ‘감(凵)’은 제물을 담는 그릇을, ‘봉(丰)’은 산적을 연상시키듯 요리한 제물을, ‘곤(丨)’은 제물을 일정한 격식에 따라 제상 위에 늘어놓은 것을 가리킨다. ‘풍(豊)’자에는 이렇듯 제상을 마련한 뒤 제기 위에 제물을 담아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가 완벽하게 담겨 있다. 예는 처음에 사람이 신 또는 죽은 조상신에게 다가서는 절차를 나타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은 쉽지 않다. 특히 남몰래 사랑을 키운 사람이라면 상대에게 말을 건네기가 더더욱 어렵다. 자칫 말을 잘못했다가 오히려 사이가 틀어질까 봐 걱정하고, 어렵사리 다가가서는 긴장해서 말 한마디도 제대로 건네지 못한다. 고대에 신은 인간의 삶과 역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였다. 사람이 신에게 잘못 다가갔다가 불벼락이라도 맞거나 개인과 종족에 불행한 일이 생기면 큰일이었다. 예는 처음에는 사람이 신에게 부작용 없이 다가가서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고 신의 가호를 받는 의식이었다. 이 의식이 진지하면서도 유쾌했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예가 사람과 신 사이를 원활하게 하는 소통의 절차로 자리 잡게 되자 그 적용 범위가 빨리 늘어나기 시작했다. 예는 일차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용되었다. 사람 사이도 자연적, 사회적 역할에 따라 다양한 관계로 분화되듯이 그만큼의 예가 생겨났다.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는 부자지례가, 군주(지도자)와 관료(전문가) 사이에는 군신지례가 생겨났다. 또 삶의 영역에 따라 병사의 운용과 관련해 군대의 예가, 죽은 이와 관련해 장례가, 혼인과 관련해 혼례가, 성인과 관련해 성인식이 생겨났다.
예의 범위가 널리 확장되자 사람은 예가 없으면 살 수 없게 되었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벗어나면 살 수 없듯이 사람도 예를 벗어나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다. 이를 공자는 재미있는 형식으로 표현한 적이 있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훗날 <예기>에서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했다. “도덕과 인의도 예가 아니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훈과 시속의 교정도 예가 아니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는다. 분쟁과 소송의 분별도 예가 아니면 판가름 나지 않는다. 군신과 상하, 부자와 형제의 차례도 예가 아니면 확정되지 않는다.”
<논어>의 “비례물(非禮勿)X”와 <예기>의 “비례불(非禮不)X”의 문형은 인간 사회의 질서 원칙으로서 예의 절대성을 드러낸다. 예가 없다면 세상이 갑자기 멈추고 사람들이 어리둥절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태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는 인간 규범의 최상위에 있다. <예기>에서는 예의 이러한 특성을 다음처럼 말한다. 예는 사람 사이의 친소(親疎)를 정하고, 혐의(嫌疑)를 가리고, 동이(同異)를 나누고, 시비(是非)를 분명하게 하는 바탕이다.“
예나 지금이나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무례한 사람’이란 단순히 예의범절을 지키지 않는 이가 아니라 인격에 문제가 있는 이를 가리킨다. 이는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인격에 대한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둑의 이미지와 차이의 세계
예는 개별적인 분야에 적용되는 규범이 아니라 사회의 질서 원리로서 포괄적 규범의 특성을 갖는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의 특성을 갖는 만큼 예의 특성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예기> 속의 다수의 지은이들은 다양한 비유와 풍부한 설명을 통해서 예의 전체상을 그려주는데, 그중에서 강물이 물길을 넘어서지 않도록 막아주는 둑이 예의 전체상을 가장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화를 참지 못해 험한 말을 하거나 무심코 건넨 말 한마디로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곤 한다. 대부분 지나고 나서는 자신이 왜 그랬는지 후회하고 다음에는 되풀이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한다. 이와 관련하여 <예기>에서 다루는 가난과 부유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자.
가난과 부유 자체는 부도덕한 것도 아니고 범죄는 더더욱 아니다. 가난이 자기 변신을 위한 자양분이 될 수 있고 부유가 과거의 노력으로 얻은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가난을 저주하고, 더 부유해지기 위해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 보다는 부유한 상태를 남에게 과시하고 남을 무시할 수 있다. 가난하다고 지지리 궁상을 떨다가 남의 물건에 손을 대거나, 부유하다고 잘난 척 하거나 건방을 떨다가 기성 질서를 허물어뜨린다. 가난과 부유가 주위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사회에 고통을 주며 사회악이 되는 것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가난하더라도 즐거울 수 있고, 부유하더라도 상식과 질서를 존중하게 할 수 없을까? <예기>에서는 사람이 예를 따르면 자신의 상태에 도취해서 막무가내로 행동하거나 제 감정만을 앞세우지 않게 된다고 본다. 이를 <예기>에서는 “예는 사람의 정감을 잘 이끌어서 마름질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끓어 넘치는 것을 막는 둑과 같다.”라고 표현한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 없듯이 예는 자신과 남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한다. 예를 갖춘 사람은 비행(非行)을 막는 든든한 둑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예기>에서는 예를 악(樂 : 음악)과 짝지어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둘의 같고도 다른 점을 밝히고 있다. 예는 전근대 신분 사회의 차등적 질서를 뒷받침했으므로 늘 차이를 강조한다. 그런데 악은 함께 들어서 서로 한마음 한뜻이 되게 한다. 가령 각종 기념식에서는 음악이 빠지지 않는데, 이때 음악의 역할이 바로 동심(同心)을 갖게 하는 것이다.
<예기>의 지은이는 예만 강조되면 위계질서가 분명할지 모르나 사람 사이가 경직되고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때 악이 예에 의해서 경화된 사회의의 관계를 부드럽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악만 강조되면 사람 사이가 가까워질 수는 있어도 역할 구분이 흐물흐물해져서 질서가 잡히지 않게 된다. 예는 악에 의해서 흐트러진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을 수 있다. 예와 악은 다르지만 둘이 협력할 때 사회에 따뜻한 질서와 부드러운 리더십이 자리할 수 있다. p.68~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