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설 수 없다면 - 장애우 내 딸 성은이와 함께한 좌충우돌 일본선교이야기
한혜숙 지음 / 강같은평화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신성남 목사님의 사모님께서 일본에서 사역했을 때 느낀 경험들을 엮은 책이다. 부제가 「장애우 내 딸 성은이와 함께 한 좌충우돌 일본 선교 이야기」인 만큼 장애우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보통 장애우를 낳은 사람들을 볼 때면 그들이 느끼는 자책이 얼마나 심할지,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겨울지 상상이 안 된다. 사람은 역시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의 처지를 쉽게 이해할 수가 없는 지라 장애에 대한 다큐멘터리나 인생 극장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보더라도 그들에 대해 연민의 감정은 느끼지만 사실 그들을 깊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나 같은 이기적인 인간으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만 들 뿐이다. 그런데 이 책에는 사모님이 장애우를 낳았다는 자책을 한다거나 자식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양육의 힘겨움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만 봐도 사람 자체가 나랑은 다른 종류의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니, 솔직히 그리 크게 와닿지는 않았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해놓으신 것대로 진행되는 과정을 보노라니까 어쩌면 저런 시스템이 있었기에 그리 힘겹지도 안타깝지도 않았을 거란 생각도 들기는 한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을 준다시는 하나님이시니 아마도 그런 자책이나 후회까지도 미리 계획해놓으시지 않으셨을까 생각해본다.

 

사실 첫째 딸 성은이가 지적 장애아로 태어나고 둘째 딸 예은이가 6개월이 채 되지 않았던 때에 일본 선교지에 파송된 것만을 보자면 인간적으로 너무 불합리한 처사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말이 제대로 통하지도 않는 일본에 장애아까지 데리고 가서 생고생 시키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그 옛날 일본은 우리나라보다도 장애아동에 대한 시스템이 훨씬 잘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일본 선교에 대해서만 생각했지, 특별히 특수교육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점차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선교가 아니라 성은이를 제대로 양육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에 가 있는 것이 훨씬 그들에게는 나을 뻔 했던 일인데, 그것을 이런 식으로 묶어서 해결해주신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당장 신 목사가 필요했던 상황이었고, 성은이에게도 일본의 특수교육 시스템이 필요했던 것이었으니까. 마치 미리 입을 맞춰놓았던 것처럼 신 목사의 어머니까지 선교 비자가 발급되었고, 오사카에서 처음 얻은 집 주소로 소개받은 아이젠바시 보육원이 기독교 재단의 보육원이었고, 거기서 알게 된 장애인 재활센터에서 성은이가 말을 배울 수 있었고, 정들었던 오사카 교회를 떠나 도쿄로 가라는 명을 받았을 때는 숲이 있는 히가시도야마 소학교에 성은이가 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처럼 착착 맞아들어가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옛날부터 사역을 떠나는 사람들을 뭔가 나랑은 다른 정말 대단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로 생각했다. 선교 여행이라도 잠깐 다녀온 사람은 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알고는 있지만 사실 다른 의미로 대단한 분이시긴 하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제 의지를 맡긴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땅끝마을 해남에 자그마한 교회가 하나 있는데 그 교회에서 한 오십 명쯤 되는 청소년들이 모이는 작은 공부방을 운영한단다. 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한 그 곳은 어쩌면 능력있는 사람들이 달려들어 후원도 해주고 무언가를 주어야만 할 것 같은 곳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 부부는 쌀통에 쌀이 있는지 확인을 해보는 것조차 죄송스럽다고 하셨다. 처음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들려주시는 이야기를 들으니 무슨 말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만약 쌀이 없으면 그들은 기도한다. 그러면 다음 날 쌀이 포대로 배달되어 온다. 그리고 옷이 없으면 또 기도를 한다. 그랬더니 베네통에서 200벌의 옷이 배달되어 오기도 했다. 이런 사소해보이는, 하지만 정말 중요한 먹을 것, 입을 것을 하나님께서 모조리 책임져주실 거라고 믿는 것은 그 만큼의 믿음의 성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한다. 한 목사님의 사모님께서 누군가에게 선물로 화장품을 드리고 나면 또 어디선가 그것이 선물로 들어오게 된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실 정도로 아주 세심하게 신경쓰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들은 담대하게 사역을 나간다.

 

그러니 이 책의 제목처럼 우리는 혼자 설 수 없다. ‘없다면’도 아니다, 그냥 ‘없다’. 그것을 인정하게 된다면 남들을 부러워만 했던 그 담대함을 선물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그런 믿음만 있다면 말이다. 내가 돈을 내서, 혹은 내가 봉사를 잘해서, 내가 노력을 많이 해서 무언가가 얻어지거나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만 의지해서, 그저 하나님 안에만 거해서, 그저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해서야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결과가 나타나리라고 믿는다. 아주 근본적인 것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이 글을 쓰면서 깨닫게 되었다. 아마도 이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이 책을 내게 주셨나보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성남 2012-09-15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http://blog.daum.net/jesuscielo/12
예수가족교회 신성남목사가 본교회 여자 전도사 성추행 수사중
 
걷지 마 뛰지 마 날아오를 거야 - 행복을 유예한 우리 시대 청춘들에게
안주용 지음 / 컬처그라퍼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라다크란 곳에서 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풀어쓴 글이 등장했다. 라다크 맞춤 여행 가이드 서비스를 제공하는 안주용 씨가 바로 그 글의 주인공이다. 어르신들이 보시기에는 너무나 거침없고 적나라한, 우리 젊은이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동경의 대상이 될 만한 내용의 글이었다. 그럼, 내겐 어떴을까. 다른 사람도 아닌, 순전히 내게는 이 글이 그리 적나라하지도, 그리 멋지지도 않았다고 하면 맞을 것 같다. 닫힌 삶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아온 현대인들에겐 현재 그녀가 살아가고 있는 노마드적인 삶이 멋지고 동경이 될 만할 것이다. 예전의 나도 그랬고, 지금 현대인의 대다수는 그런 마음을 품을 테니까.

 

서울과학고와 포스텍 생명과학과를 졸업하고, 한국 극지연구소 바이오센터 연구원으로 일했던 능력있는 그녀는 아마 소위 말하는 ‘엄친딸(엄마 친구 딸)’이었을 것이다. 머리도 좋아서 과학고를 들어갔고 대단한 분야를 공부했으니 얼마나 집안의 자랑거리가 되었겠나. 그녀도 추억하길 엄마의 통제 아래서 착한 딸이기만 했다고 했으니 그녀의 과거는 말 안해도 다 상상될 만한 것이었을 것이다. 허나 그녀의 삶이 그렇게 닫혔고, 통제되었고, 끔찍할 정도로 불행했을까. 난 조금은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삶이니 내가 가타부타 할 계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 마디 하고 싶어졌다. 자신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아왔다고 말하는 그녀의 삶을 가만히 들어보면 뭐, 연봉이 몇 억씩 되는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이었던 적도, 자신만의 스펙을 잘 쌓아서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정도도 아니고 엄마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에 연구소를 그만둔 후, 겨울엔 쌍안경을 들고 서울 시내 곳곳에서 둥지 짓는 까치들을 관찰하고 여름엔 녹음기를 메고 전국 곳곳에서 청개구리 노랫소리를 수집하는 등 자유로운 영혼 비스무리한 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렇게나 타율적이고 수동적이고 남들의 눈치를 보며 생활하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평범한 가정에 태어나서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내고 평범한 대학을 들어가 평범하게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렇다 할 스펙도 쌓지 않았고, 대단한 연봉도 못 받으며 그저 하루하루를 주어진 일을 하며 틀에 박혔다면 박힌 생활을 하고 있는 평범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 시절에도 특별히 꿈이 있어서 휴학을 하고 자신을 돌아볼 여유나 인생의 진로를 변경할 숙성기를 가지지도 못했고, 졸업하고도 특별히 노는 시간을 가지지도 못했던 그저 대학 가야할 때가 되어 갔고, 돈을 벌어야 할 때가 되어 버는 그저 그런 생활이라고 하면 될까나. 이런 나에 비하면 그녀의 생활은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자신이 추구하는 연구에 쏟아부을 수 있었고, 자신이 버는 용돈을 그저 제 앞가림만 하면 되는 생활이지 않았나. 나는 그녀가 한국에서 누렸던 생활만큼만 따라해봐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투정 섞인 - 내게 보인 시각에서는 - 글을 읽으면서 말이다.

 

물론 그녀가 가진 여유가 진정 여유가 아니였음이 나중에 깨닫게 되지만, 그녀가 했던 사고, 그녀가 했던 행동 등이 모조리 그녀만을 위한 것이 아니였던 것이 드러나긴 했지만 그래도 내겐 그녀의 삶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녀에겐 그녀를 무지 사랑하고 무지 이해해주는, 자유에 향한 근본적인 성향이 같은 엄마가 계셨기 때문이다. 그런 대단한 머리를 가진 딸이 놀겠다고 하는데, 세계여행을 떠나겠다고 하는데 누가 반기겠나. 아마도 그녀가 지금 진정한 삶을 찾을수 있는 것은 이때까지 그녀를 지지해주었던 그녀의 엄마 때문이었을 것으로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물론 처음에는 무척이나 반대를 하셨지만 말이다. 나중에 엄마가 이해해주셨을 때, 엄마가 겪은 성장통이 어마어마했을 거라고 그녀 본인이 이해했던 것보다도 더 엄청난 깊이로 이해해주셨을 것이다. 그것은 그녀 본인 자체가 겪어야 하는 경험보다도 더 깊고 더 컸을 테니까. 그런 머리로 벌 수 있는 연봉을 생각한다면 좀 아깝지 않을까. 아무런 관계없는 내가 이렇게나 아까운데 말이다.

 

일단 그녀에게 벌어진 인생의 대전환 사건을 보자면, 그것이다.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자유롭게 사는 것. 집을 소유하고, 땅을 소유하고, 차를 소유하고, 대단한 연봉을 받고, 대단한 사람과 결혼하고, 아이를 대단하게 키우는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말이다. 그것이 어디에서 일어났냐 하면 '찰스 다윈에 대한 오마주'로서 떠난 세계여행 중 인도의 라다크에서였다. 그 여행에서 한 남자, 바로 믹을 만나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도 즐겨 몰던 BMW도, 뮌헨 교외의 그림 같은 집도, 승승장구 쌓아올리던 커리어도 뒤로 하고 자연 속으로 뛰어든 자유인이었기에 두 영혼이 공명한 순간, 그녀는 딱 알아버렸다. 그가 자신의 운명이고, 자신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물론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이 어딘가, 자유가 기다리는데...

 

그래서 그녀는 21세기 노마드로서 자유롭게 철새를 따라 이동하는 생활을 한다. 여름엔 라다크에서 살고, 겨울엔 남쪽 바다에서 사는... 그런 삶 속에서 얻은 자유를 만끽하며 진정한 자신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상에 매인 우리에겐 꿈 같은 일이지 않을까. 일단 내겐 영어가 안된다는 아주 크나큰 벽이 존재하니까 말이다. 국제 연애를 하려고 해도 언어의 소통이 가장 큰 문제이니, 부러워만 할 수 밖에. 아쉽긴 하다. 그녀가 머리가 좋았고, 공부도 잘했다는 것은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것에서 큰 도움이 되었으니 그녀는 정말 엄마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결국 그녀가 말하는 엄마의 족쇄 덕분에 믹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더의 길 - 인내와 순종으로 완성된다
이철신 지음 / 두란노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아무래도 교회에서 얻은 직책 때문이었을 게다. 나를 오스왈드 챔버스와 만나게 한 것도 바로 그 직책 때문이었고, 나를 울게 하고 성장시킨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이 직책을 계속 가지고 있는 한 나는 계속 ‘리더’란 화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예측해볼 만도 하다. 그러나 내게 ‘리더’란 단어는 그리 좋은 이미지는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진정한 ‘리더’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구를 말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리더’로 세움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 마음 편히 다가올 수는 없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그렇게 평소 ‘리더’라는 단어를 혐오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내 손에 들린 것은 저자의 가슴 아픈 고백이 내 손을 잡아끌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종으로 리더의 길에 접어들었으나 뼈아픈 실패를 경험한 후 리더는 단순히 직책이 주어진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는 이철신 목사님의 고백이 내 아픈 영혼을, 혹은 내 아픈 과거를 위로해주실 수 있겠다 여겨졌다. 물론 그 위로는 하나님께서 오는 것이지만 말이다.

 

책을 계속 가지고서 처음 책장을 넘겨들었던 것은 일주일동안 내 멋대로 살아가 육신을 피곤에 찌들게 한 죄를 범하고 금요일에 있었던 리더 모임에서 회개를 통해 조금씩 치유를 받고 난 후의 주일 오전이었다. 교회에 가려고 버스를 타고서 펼쳐든 그 책은 나를 끊임없이 울게 했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그 당시에 들었던 생각은 내게 이 책을 보게 하신 것이 감사했고, 내 죄악성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감격했고, 나는 나를 죄악의 길로 이끌며 나를 무너뜨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이끄신 이는 하나님이셨기에 내 주제로는 감당키 어려운 리더의 자리를 감당하게 해주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때 이 책을 다 본 것이 아니기에 며칠 후에 이어서 뒷 부분을 보고 난 후에는 그 때 내가 왜 울었는지 잘 기억은 안 난다. 그저 감격해서 울었을 뿐. 누군가, 낙심되어 낭떠러지에 떨어져 아무도 나를 도와줄 이가 없다고 느꼈을 때 위로가 되었던 오스왈드 챔버스의 글을 읽고, 그도 이런 암흑의 길을 걸었다는 알았을 때 위로가 되었고 감격했다는 일을 읽은 적이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이철신 목사님의 뼈 아픈 패배를 들었을 때 - 비교는 안되는 일이지만 - 내 이전의 실패가 생각나 위로가 되었다. 그 당시에 내가 실패했던 것도, 이철신 목사님께서 실패했던 것도 다 내 힘으로만 무언가를 하려고 했다는 공통점이 있었기에, 아마도 더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좋았던 것이 아니라 그 일을 또다시 되풀이하지 않도록 마음에, 골수에 새기게 해주었으니까 말이다.

 

이 책은 이스라엘의 위대하지만 비운의 주인공이었던 지도자, 모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세의 인생을 따라가며 그의 실패와 아픔과 두려움, 그리고 승리를 조망해주면서 이철신 목사님이 얻었던 리더십에 대해 알려준다. 만약 책 제목인 〈리더의 길〉외에도 부제로 〈모세를 따라가며 리더십을 배운다〉 라고 뭐, 이런 언질이라도 주었다면 선택하기나 내용을 예측하기가 쉬웠을 거라는 아쉬움이 들긴 했다. 다 읽고 나니까 책 표지에 자그마한 목자와 양 그림이 내용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아 재미있었기는 했지만 말이다. 많은 학자들이 ‘비운의 리더’라고 부른다는 모세에 대해 목사님께서 주목하신 것은 그의 인생 전체가 ‘리더’의 모습에 합당했기 때문이었단다. 보통은 그가 하나님께 부여하신 권위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섬기며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내고도 끝내 가나안 땅에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죽은 것 때문에 안타까운 리더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모양이 우리 ‘리더’가 따라야 할 모양이라고 하셨다. 모세에게서 살펴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중요한 리더십이 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것이다.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 목사님이 말씀하시길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면 많은 백성들에게서 인정도 받고 하나님께서도 인정을 하셨을 때였기에, 아마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모세가 훨씬 더 큰 영광을 받았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아는가, 양처럼 우둔한 이스라엘 백성(그리고 나도)들은 그를 추앙하는 마음을 가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니 참된 리더는 소리 소문없이 사라져야 맞는 것이란다.

 

모세가 얼마나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자존감이 낮아서 ‘리더’로 서는 데만도 오래 걸린 것과 그가 아홉 번이나 출애굽시키는 데 실패한 것,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서 받은 권위에 대한 도전에 대해 대처하는 그의 방식이 그가 하나님 앞에 합당한 리더로 성장하는 과정이었다는 것도 놀라운 깨달음이었지만 그보다도 역시 나는 마지막에 모세가 무덤조차 전해지지 않는 ‘비운의 리더’로 남는 것에 대한 의미가 더 놀라웠다. 아, 리더인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바라는 마음이 있어선 안 되겠다는, 그 당연하게 알고 있었던 원칙이 생생한 현실로 재탄생되었다고나 할까. 생각해보면, 모세의 무덤이 현재까지 전해진다고 했을 때 거기가 성지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 우리가 아무리 위대하다 말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조차도 -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라고 봤을 때,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해서 받은 벌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모세가 이 땅에서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을 때 하늘에서 위대한 자리에 오른 것을 우리는 신약에서 볼 수 있다. 마태복음 17장 1~4절을 봐라. 좀 더 깨끗해진 시야로 하늘의 상급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내 욕심 많은 마음을 다시금 정리해야 할 때인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 S. 루이스 - 그의 삶, 그의 세계 세계 영성의 거장 시리즈 3
더글라스 길버트 & 클라이드 S. 킬비 엮음, 정성묵 옮김 / 가치창조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내가 C. S. 루이스를 아는 것은 물론 <순전한 기독교>,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와 같은 신앙서적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흥미를 끌었던 것은 그가 <나니아 연대기>란 판타지 동화를 썼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친구의 손에 끌려가서 본 영화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에서 사자 아슬란이 한 소년의 잘못을 대신하여 제 목숨을 내주고 끝내 부활하는 장면이 너무나도 인상적이고 강렬해서, 또는 기독교와 긴밀한 연관이 있어 보여서 그것을 쓴 작가가 너무나 궁금했다. 알고 보니 기독교 영성에 관해서는 일인자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동화를, 그것도 판타지를 쓸 수 있다는 점이 정말 놀랍고 그 문화적인 파급력이 대단해보였다. 이런 과정을 놓고 볼 때,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궁금증이 들었다. 그래서 이것 저것 사놓고 혹은 사기로 마음먹고 손꼽아둔 책들이 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은 이제껏 접했던 책과는 조금 다르다. 일단 사진이 많아서 그에게 영향을 주고 받았던 많은 사람들과 그가 거닐었던 장소들을 빠짐없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옥스퍼드에서 강의를 하고 있을 때 지냈던 모들린 칼리지는 그곳이 도시란 것도 잊게 만들 만큼 대단히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었다고 아버지께 편지를 쓰기도 했다니까 그것이 그에겐 더없이 만족스러운 요소였을 것이다. 옥스퍼드란 아름다운 곳에서 학문을 가르쳤으니 얻을 수 있었던 부수적인 요소였겠지만 일단 인간으로서 부러운 마음은 감출 수가 없다. 하긴 부럽다는 것으로 따지자면, 그의 천부적인 글쓰기 재능과 그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을 따라갈 수 없긴 하지만 말이다.

 

그의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일단 내 게으름 때문에 그의 저작들을 끝까지 읽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아쉽게도 그의 책은 몇 권이나 진열해놓고서 꼭 읽겠다고 다짐하고는 있지만 작심삼일이 된 지는 이미 오래이다. 아마도 너무나 대단해보이는 명성 때문이었을까. 부담스럽지 않다고 하면 또 그것도 거짓말이라 뭐라 단언할 순 없지만 아마도 그의 글을 완벽하게 내 것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이유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언급해두는데 이 책은 그의 책에 대해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그가 썼던 여러 권의 책에서 짤막하게 인용을 해둔 것은 더러 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그가 생각한 신앙의 근본을 알아차릴 수는 없으니 열외로 해두겠다. 그저 이 책은 C. S. 루이스란 기독교 영성의 대가의 일대기를 차분히 사진으로 따라가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보다 많은 것을 기대하다간 조금은 실망할 수도 있겠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C. S. 루이스와 관계된 책은 모조리 다 모아두고 있으니 그리 실망할 것도 행복할 것도 없지만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사람이 어떻게 기독교 영성의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그의 인생 자체는 신비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 모든 것이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개입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 과정이 간략하게나마 기록되어 있으니 C. S. 루이스에 대해 이제 막 알게 되었거나 <나니아 연대기>가 너무 재미있어 작가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면 주저없이 선택해도 좋을 것 같다.

 

철저한 무신론자이면서 지성인이라 자부하는, 또한 그에 걸맞게 수석도 여러 번 하고 수상도 여러 개를 탔던 그였기에 아마도 무신론자에서 철저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그의 말이 아주 인상적이고 믿음직한 느낌이 든다. 물론 인간의 지성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성을 뛰어넘을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그가 일반인들보다야 훨씬 높은 지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임에는 분명하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일지라도 그가 깨달아 고백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쉽사리 부정하지는 못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나도 그의 저작을 많이 읽지 못했는데 불신자들이 그의 저작을 일부러 찾아서 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정말 문화의 위력이 대단한 것이, 정보에 어두운 나도 영화로 인해 C. S. 루이스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 단 몇몇이라도 그의 저작을 통해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철저하게 부정했던 사람에게서 나온 하나님에 대한 글이니까 그의 글에는 불신자들을 이해하는 마음이 담아있을 것이다. 사람들이라면 다들 의심하고 부정할 수 있는 부분을 꼭 집어서 말할 테니. 그래서 그를 회심시켰던 걸까. 그렇게 의심했던 많은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어쨌든 수십 년 전에 나와 같은 힘들어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이런 위대한 사람 하나 세워놓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놓았다고 생각하면 참 감사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일로 하나님을 높이라
존 오트버그 지음, 오현미 옮김 / 두란노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나의 일로 하나님을 높이라고~!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들었던 첫 생각은, 기쁨이었다. 내 일로 하나님을 높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내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 되는 그 경지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살지 않는가. 물론 매일 같이 넘어지고 무너지고 교만하고 성내고 자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되고, 내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이 되는 그 날이 오리라고 굳게 믿는다, 내가 주님 안에 거하기만 한다면. 이쯤에서 전에 봤던 『예수님의 임재 연습』이란 책을 안 언급할 수가 없는데, 그 책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서부터 차근하게 알려주셨다. 특히 ‘임재’라는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포도나무 비유를 들지 않을 수 없다고. 우리가 항상 들어왔던 말씀 중에 포도나무 비유는 내겐 사실 너무 어려운 비유였다. 그 비유가 생각만큼 딱 내 마음에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이 책 덕분에 조금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다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그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이다. 가지에 열매가 많이 맺히기 위해서는 당연히 포도나무에게 붙어있지 않을 수 없다. 그 가지가 자신이 가지이기만을 분명히 한다면, 즉 포도나무에 붙어있어 포도나무임을 인정하지 않고 가지로서의 정체성만 분명히 갖고 있다면 그 가지에는 열매가 맺힐 수 없다. 포도나무가 뻗은 뿌리에서부터 양분과 물을 빨아들이지 않는다면 가지는 곧 말라 죽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우리인 것은 내세우지 말고 우리 안에 예수님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역설한다. 그래서  ‘임재’라는 것은 우리가 포도나무가 되는 것, 그것으로 이해하면 알맞겠다.

 

그 책에서 얻었던 정말 획기적인 깨달음은 가지가 포도나무를 필요로 하는 것 같이 포도나무도 가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있어 아무 상관이 없어서, 혹 나 같이 먼지 같은 인간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만 하지 영광을 돌리는데 사용될 수 없어서, 혹 나 없어도 충분히 하나님의 영광, 섭리는 다 이루어질 것인데, 왜 나를 태어나게 하셨을까 하는 자책을 하곤 했었다. 정말 내가 태어난 이유를 알 수가 없어 정말 답답하기도 했었다. 나라는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입히는 피해만 보이고 나란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없던 가장 극심한 시기를 겪었더랬다. 가장 바닥을 쳤던 때가 바로 중국에 다녀오기 직전이었다. 그러다 중국에 다녀오고 하나씩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면서 변화되었던 이후에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지만, 왠지 이 책이 그 때의 내 의문에 답해주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나님은 나를 필요로하시다고. 내가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기 위해서는 내가, 꼭 내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 말, 그 뜻이 너무나 기뻤고 감격스러웠다. 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있는 경험인지는 모르겠지만 꼭 그런 모양이 아니더라도 내 삶이 너무 팍팍해서 혹은 곤고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고통스러운 날이 한 번쯤은 다들 있을 것이다. 사람은 미련해서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그 상황과 그 시기의 감정을 생생하게 느끼지는 못하지만, 만약 나와 비슷한 경험이 있는 분들이 있다면 꼭 말씀드리고 싶다. 하나님은 천하보다 한 영혼을 더 귀히 여기신다고 말이다.

 

경건서적을 여러 권을 겹쳐서 읽으니까 각각의 말하는 바와 문체가 상당히 다름을 느낄 수 있다. 이전에 봤던  『예수님의 임재 연습』은 1800년대의 사람이 쓴 것이고, 이번의 책은 2000년대에 썼던 글이라 확실히 깊이가 좀 얕다고 느껴진다. 과거의 글은 딱 하고 싶은 말만 정리해서 상당히 들어가기가 쉽지 않지만, 요즘의 글은 문체가 가볍고 수필 같아서 오히려 읽기에는 부담이 없었다. 깊은 내용이 나올 때는 그것도 쉽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이 책의 핵심은  ‘비교’ 같았다. 저자의 체험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나를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는데 그것을 고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과거보다는 많이 나아져서 나 자신을 인정하고 예뻐해주고 있으나 아직도 갈 길은 멀다. 그런데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붙으시면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 즉 내가 짜증나고 싫어하는 부분을 완전히 변화시켜서 새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만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내게 있는 독특한 성격이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그런 기질은 변하지 않는다. 내 안에 있는 탐욕, 질투, 미움, 자책, 정죄, 음란, 분노 등의 악한 것들은 사라질지라도 내 본연의 성격, 즉 소심하거나 대범한 것, 머리가 좋거나 나쁘거나, 내향성이거나 외향적이거나 등 이런 것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누구나 하나님께서 만드신 제 자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절대 다른 인격으로 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 말이 너무나 내겐 위로가 되었다. 나 자신을 부정했던 과거의 상처도 상처지만, 정확하게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어서 시야가 밝아진 느낌이다.  그러니까 나의 일로 하나님을 높일 때는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포함되지 않겠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할 수도 있는 말이지만.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혹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높인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 아닐까. 헨리 나우웬은 말한다. 기도는 내가 사람이고 당신이 하나님임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그의 말대로 당신은 하나님이심을 진정으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인 나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나를 사랑하고 나를 인정하는 것부터 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은혜는 매일 새롭게 구하는 것이란 것도 깨달았다. 다른 기도모임을 하고 돌아와선 기도 많이 했다고 기도생활에서 게을러지는 나를 인식했을 때, 놀랐다. 아, 내가 과거의 은혜만 붙잡고 살았구나. 기도를 게을리하고 즐겨하지 않았구나. 다시 말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가슴이 덜커덕했다. 즉각 회개를 하곤 다신 그 길을 가지 않고자 한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omimi 2014-11-19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매니아님의 글을 읽으면서 제 얘기같아 눈물이 났습니다.
매일매일 하나님께 다가가는 삶 사시길
존 오트버그 목사님의 책을 직접 읽어 볼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