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의 길 - '주님은 나의 최고봉' 오스왈드 챔버스 전기 오스왈드 챔버스 시리즈 17
데이빗 맥캐스랜드 지음, 스데반 황 옮김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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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스왈드 챔버스를 알게 된 것은 우연히 그의 책 『주님은 나의 최고봉』을 선물받고 나서였다. 그 책을 선물해준 때가 아주 시기적절했던 때였는데, 그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을 읽으면서 어쩌면 그가 그렇게 놀라운 영적 체험과 깊은 인간적인 절망을 느낄 수 있었는지 내가 경험했던 깊은 나락을 거기서 다시금 느끼는 듯 했다. 그렇게 그 책을 읽으면서 그는 어떻게 이런 것을 깨달았을까 하는 오스왈드 챔버스에 대한 인간적인 관심과,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사랑했던 하나님, 그보다 앞서 그를 이끄신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그가 남긴 55권의 책을 보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 것이지만, 이 책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완전히 쓰임 받은 인간 오스왈드 챔버스를 알 수 있는 아주 훌륭한 도구가 되어 준다. 이 책을 보면 그가 어떻게 영적인 깊은 절망을 느꼈는지, 그리고 어떻게 내가 경험한 영적 무지와 두려움과 외식과 절망을 위로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는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후, 15살의 어린 나이에 찰스 스펄전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회심하고 그로부터 13년 동안 완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받기 위해 찬양의 시간과 괴로운 고난의 시간을 겪고 나서야,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삶을 살다가 43살에 하늘나라로 갔다.
 
내 인생에 회심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라면 작년 8월에 일어났는데, 그는 15살의 나이에 회심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또 그처럼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을 받으려면 지금부터 13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조금은 기가 질리기도 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다가오지 않던 하나님이 실체의 모습으로 보여진 것 같아서, 그러니까 13년이라는 구체적인 기간이 보여져서 조금은 마음이 놓이기도 한다.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어려운 것일 테니까 말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생각해서 이제는 머릿속에 박힌 생각이 하나 있다. 다른 사람은 나와는 다르다는 것이라는 것, 분명히 다른 사람들보다도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고 하나님과 원만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내가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교회 안에서 자라면서 보고 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영향 때문인데, 만들어진 하나님의 사람도 있지만 분명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교회 안에 존재함을 알아서, 나는 아직 덜 된 사람이고 나 같이 죄악으로 똘똘 뭉쳐진 사람은 없다고 자책하는 것이었다. 또한 내게는 어릴 때라도 자의식으로 똘똘 뭉쳐있어서 어린 아이의 순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대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도 의아하다. 항상 계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했던 것 같아 어느 순간부터 교회에서는 조심스러워지고 몸을 사리게 되었다. 열정적이고 순전히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부러울 수가 없었다.
 
이런 내 모습이 매번 그랬던 것은 아니다. 분명 하나님 안에서 기쁨으로 노래했던 적도 있고, 내 안에 평안도 있었던 것 같은데, 점점 나이가 먹어가면서 내 안에 충족되지 못한 영적 갈급함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무지하고 게을러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거나, 혹은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는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체험이 가능하리란 것을 몰랐기에 영적인 갈급함을 채울 수 있는 방법 또한 몰랐다. 사람들이 고백하는 첫사랑의 기쁨이나 회복에서의 그 ‘첫사랑’이란 단어가 무엇을 품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나는 교회는 꾸준히 출석하면서도 ‘문’ 안에 들어가지 못한 자였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역사 안에 있지 못했던, 성령님의 체험에 대해 말해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한 ‘어리석은’자였다. 머리로만 알고 있던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기 전까지는. 그런데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은 확실히 나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 성품 자체가 온전히 하나님의 사람 같은 이였다. 그가 15살에 회심하기 전까지는 어떤 아이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뒤늦게 회심한 나도 내가 이전에 어떻게 세상을 바라봤는지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는 오죽하랴 싶다. 어쨌든 그는 온유한 심정의 사람으로 회심하기 전부터도 나의 부러움을 사는 사람이다.
 
한동안 나는 내 육신이 죄악의 도구로 쓰여지는 것 때문에 괴로워한 적이 있었다. 나 자신은 왜 이렇게 죄와 친한지 정말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다. 또한 내 품성은 또 어떤지. 다른 사람들은 온유하고 점잖고 차분한 것 같은데, 난 또 왜 그리 덤벙대고 신경질적이며 다혈질적인지, 이런 모든 성품이 내게 덕이 되지 못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자책만 가득했던 삶을 보냈다. 교회 안에서 내 눈에 보이는 사람은 왜 그리 다들 영적으로 충만해 보이고 거룩해 보이고 온유해 보이는지... 어딜 가나 좌절의 연속이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사람의 눈을 지극히도 의식했던 것 같다. 하나님의 자녀라며, 교회를 다니는 성도라면 누구나 이런 샹황에서 이런 행동을 해야 하고 저런 상황에서 저런 행동을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뇌리에 박혀버린 것이다. 화가 나고 어이가 없는 상황에 처해있을지라도 분노하거나 마음이 상하지 말고 평강의 하나님만 의지하며 나가야 한다는 것, 다른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자리에 있을지라도 절대로 교만하거나 자신의 의를 드러내서는 안된다는 것 등 내게는 해야만 하는 것과 해서는 결코 안 되는 것들의 목록을 가진 것만 같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런 모든 완전해보이는 품성과 행동들이 인간적인 힘으로 가능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내가 원했던, 반드시 성도라면 가져야 할 성품들은 주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내 마음과 삶에 주인으로 맞아들이기만 하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성령의 선물일 뿐인데, 그것을 인간의 정욕대로 만들어내려고 했으니 내 안의 좌절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와는 정반대의 성품을 가진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도 이런 고민을 하셨다. 나와는 좀 다른 방향의 고민이지만, 근본적인 것은 같다. 회심하고 나서 미술 분야에서의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했던 그에게 목사가 되라는 강한 이끄심으로 말미암아 더눈 대학을 다녔을 때의 일이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품성과 행동과 설교에 반해 그를 칭송하지만 그는 자신의 끔찍한 이중성과 끊을 수 없는 죄악으로 인해 절망의 심연 속에 잠겨야했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그의 끊을 수 없는 죄악된 본성 때문에 고민하고 번민했던 그는 마침내 하나님의 도움, 은총, 섭리, 은혜로 인해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닫고, 그 스스로는 절대로 경건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내려놓는 시간이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인식과 함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라도 다 내쳐버리는 결단의 시간을 가지셨다. 그로써 그는 온전히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네가 나를 섬기기를 원한다. 그러나 나는 너 없이도 할 수 있다.”(p.86) 이 말씀은 꼭 내게 하신 것 같아서 읽으면서도 뜨끔했던 부분이다. 내가 대학원을 갈까, 간다면 어떤 분야로 갈까에 대해서 한창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한 후배가 나에게 한 마디를 했다. “하나님은 언니가 대학원을 가든 안 가든 관심 없으세요.” 꼭 내가 어떤 분야로 대학원을 가야 하나님께서 나를 쓰실 것처럼, 오만방자하게 생각했던 내 콧대를 완전히 내려누르시는 말씀이었다. 그 당시 나이도 있고 비전도 찾아야 할 것만 같은 초조함에 나는 그런 고민을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맞다, 절대로 내 대학원 입학 여부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핑계로 내 감투를 만들고 싶었던 것 뿐이니까. 그러니 그 고민을 했을 때는 나는 하나님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비전을 생각한다는 핑계를 대고 하나님은 간곳 없고 오로지 나 자신만 위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식이다.
 
이 책에는 그렇게 깨달음을 주는 말씀이 많이 있는데, 하나같이 놀라운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번쯤 생각하고 넘어졌을 뻔한 일들이 다 기록되어 있다. 외식을 경계하라는 것, 하나님을 위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 정말 곰곰히 생각해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챔버스 목사는 아무런 고민 없이 그렇게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다. 미술과 음악에도 조예가 깊고, 문학도 관심이 많고 심리학, 윤리학도 좀 아는 박학다식한 그에게 부족한 것은 하나도 없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죄악성에 대해 샅샅이 고찰했기에 그것이 얼마나 가식적이고 외식적인지, 그 안에는 하나님이 하나도 계시지 않은지를 알기에 그는 자신을 버리고 내어드렸다. 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처럼, 십자가에 못 박힌 우리는 다시는 우리의 심장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을 대신 뛰어주시는 심장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신기했던 것은, 같은 목회자들끼리도 친하지 않으시고 목회자들에 대한 냉소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사실이었다. 챔버스 목사가 종종 유럽과 미국의 목회자들에 대해서 냉소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 이유는 목회자들이 하나님 없는 기도모임, 예배, 말씀 강의를 해내기 때문이었단다. 지금도 그것을 가장 경계해야 할 때인데, 당시에도 많은 교회에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다니 조금은 씁쓸하다. 한편으로는 친근하기도 했고. 그 당시가 상당히 특별한 때가 아니라 그 때나 지금이나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의 또다른 책 『하나님의 일꾼』을 보면, 영적인 사람은 특별한 말을 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그 곁에만 있어도 마음이 평온해지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찾게 된다고 했다. 자신의 말을 정확하게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는 바로 그렇게 영적인 사람이었다. 종교적인 사람이 얼마나 편협하고 알팍한 지 진저리를 치는 사람들에게 그는 자연스레 그의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에게 호감을 일으킬 수 있었고, 더구나 그의 종교 집회에 참석해서 주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게 되는 도구가 되어주었다. 그랬던 그는 잘 되던 성경대학을 내려놓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바로 군인들이 있는 이집트로 목회하러 간다. 거기서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 없을 것만 같던 군인들과 대거 소통하며 기도 시간을 가지며 성경공부 시간을 만들어 복음을 심어놓는 주의 일을 감당했다. 그.러.다.가. 정말 어이없게도 맹장수술의 합병증으로 43세에 그는 소천한다. 그 때, 아내에게 주셨던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요 11:4) 그럼에도 그는 죽었다. 그러나 그 뒤에 말씀이 더 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그랬기에 그의 아내 비디는 굳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남편을 잃은 상실감을 극복하고 그녀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해낼 수 있었다. 바로 오스왈드 챔버스의 모든 강의와 설교를 속기한 것을 책을 편찬해내는 일을 말이다.
 
혹자는 평생을 힘들게 수고만 하고 죽었다고 볼 수 있는, 영광스럽지 않은 죽음일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내 꿈은 호상이었는데, 고통스럽지 않고 병마와 싸우지 않고 죽는 것이 그렇게 부러웠다. 하지만 지금 생각은, 남들이 보기에 나쁘게 복 없게 죽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진정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암으로 고통받고 죽어도 그 중에 하나님과의 긴밀한 소통이 있다면, 암이 하나님을 찾는 구원의 끈이 된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밖에 나가서 주를 증거하다가 목이 잘리거나 돌에 맞아 죽어도 말그대로 개죽음을 당해도 그것은 더할 나위없이 귀중한 순교일 것이기에 우리는 인간의 잣대로 평가해선 안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영광돌려드릴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어찌되어도 상관없으니까. 그것이 더 내게 주신 그 모든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일 수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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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람다 2011-03-28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읽었습니다.
 
미스 헴펠 연대기
세라 S. 바이넘 지음, 박찬원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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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가 주인공이 되는 소설은, 마음에 와닿기도 하고 주인공을 닮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도 하고 그들의 능력과 재치와 매력에 반하는 것이 다른 소설보다는 훨씬 반응이 빠르다. 이는 아무래도 같은 업계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이 소설은 이제까지 내가 읽었던 교사가 등장하는 소설과는 조금은 다른 느낌을 받았다. 이제껏 내가 봤던 소설들은 교사인 주인공이 아주 탄탄하게 그 자리에 서서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는 슈퍼 만능 교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아니다. 아마도 조금씩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소설 속 주인공에게 감화되는 감성도 퇴화되어 버리기도 하는 것일까. 이제까지 봤던 교사가 주인공인 소설에서 이렇게 담담하게, 혹은 이렇게 혼란스럽게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는 교사 주인공은 처음이었기에 딱 깔끔하게 떨어지는 맛은 없었다. 하긴 그 교사도 푸릇푸릇한 이십 대 중반이 아닌가. 교권 붕괴니, 수업 포기니 하는 우울한 전망들이 나오는 이 때에, 어쩌면 나는 마법과도 같이 교사 한 사람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바꾼 기적을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읽으면 조금은 그 빛이 바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감동까지 바래지는 것은 아니지만.

 

‘연대기’라는 독특한 제목을 붙은 것처럼 이 소설은 헴펠 선생님을 주인공으로 하는 단편소설을 묶은 것이다. 실제 작가의 중학교 교사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 그런지 개연성과 현장감은 뛰어나다. 아이들에게서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단어를 옮아오는 에피소드만 해도 실제 교사가 아니였다면 알 수 없었을 내용이었기에, 그 장면을 읽으며 내 경험도 더듬어볼 수 있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단어들은 대부분 비속어이거나 과격한 표현이나 모든 것을 함축해서 쓰는 단어들인데, 이런 단어들이 자연스레 내 입에서 사용되거나 실제로 입밖에 내뱉지는 않아도 어떤 상황에 아이들이 할 것 같은 단어가 머릿속에서 번뜩이는 것을 보면 정말 놀랍다. 그러나 이것은 약과다. 얼마나 많이 아이들의 글을 교정해주었던지 이젠 나도 맞춤법이 헷갈리기 시작하는데, 미스 헴펠도 같은 경험을 해주셨다. 이 소설의 특징은 이런 에피소드는 한 에피소드의 진행 중에 잠깐씩 등장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에 다른 이야기가 삽입되는 꼴이랄까. 이런 탓에 가끔은 내가 무얼 읽고 있는지 다시 앞부분으로 돌아가기까지 했는데, 이렇게 이야기가 흘러나오니까 진짜 미스 헴펠이 서있는 그 자리에 같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은 들긴 했다.

 

미스 헴펠의 장점이라면, 모든 사람들이 공인하는 문제아에게도 관심을 게을리하지 않아서 그 아이의 안의 고독이나 스스로를 괴롭히는 듯한 절망감을 읽어내어 미스 헴펠이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아이가 아주 조금이지만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물론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항상 자신이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는지, 더 잘할 수는 없는 것인지 고민하며 걱정하는 평범하고도 비범한 선생님이었다. 또한 모든 아이들에게 가까이 가서 고민을 들어주고 인정해주고 호기심을 유발해주는 등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는데 교재를 바꾼 에피소드를 읽을 때는 완전히 푹 빠져버렸다. 미스 헴펠이 이제껏 아이들에게 읽혀왔던 소설과는 다르게 조금은 파격적인 『그 소년의 삶』을 읽게 했을 때의 변화는 놀라웠다. 꼭 내가 그런 일을 한 것처럼 자부심이 들기도 했다. 한 번도 책을 읽지 않았던 아이들까지도 밥을 먹으면서, 화장실을 가면서 그 책을 붙잡고 놓지 않는다고 부모님들이 고맙다고 했을 때, 미스 헴펠은 얼마나 기뻤을까! 완전히 얼어붙어버려서 그 기쁨을 제대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소심할 땐, 소심한 그녀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녀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진로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학교로 출근하는 것이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나름의 방법으로 다치는 것을 상상했던 미스 헴펠의 노력이 동료 교사의 임신과 대학원 입학을 통해 좀 더 우아한 방법으로 해결할 때는 다소 웃기기도 했다. 사실 나도 수십 번 상상하고 상상했던 방법 - 몸을 다치는 것, 발만 좀 기브스하면 안 될까? - 이기에 어쩌면 더 웃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중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자신의 일이 맞는지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며 진로를 위해 모험도 하고 실패도 하고 결국 정착을 해내면서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는 그녀의 모습이 어쩌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이 아닌가 싶어서 묘했다. 어떤 일도 그렇게 고민하지 않는다면 발전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말이다. 나는 아이들과 씨름하는 것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도 몸을 다칠까, 사고가 좀 나주면 어떨까, 대학원을 갈까 등의 여러 궁리를 하기도 했다. 다른 직업은 이렇게 아이들의 소소한 것들 - 그러니까 내성적이냐 외향적이냐 하는 성향이나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 하는 가치관, 혹시 엄마나 아빠가 안 계시냐 하는 가족관계, 칭찬을 많이 받고 자랐느냐 꾸지람을 많이 받고 자랐느냐 하는 양육 배경 등 - 을 다 고려하면서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란 얄팍한 부러움에 다소 마음을 잡지 못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내게는 보이는 것들을 어찌 안 볼 수 있으며 어찌 도와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지금은 그냥 포기해버렸다. 아니, 항복해버렸다. 내가 여기에 자리하고 있어서 무언가를 꼭 해야 할 사명이 있기에 부르셨다는 것을 알겠다. 아직은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라는 것을. 자만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고, 제 것이라고 유세 떨지 말고, 이 자리를 지키는 것이 내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내 일이라는 것을. 사랑이 없는 내게 하나를 알려주시려고 이 곳으로 부르셨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랑해보라고. 사랑하는 연습을 하라고 말이다. 아마도 미스 헴펠은 천성적으로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재주를 타고 났는지 그런 고민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아둥바둥 하며 아이들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싶어서 노력했지만, 결국 학교를 떠났다. 그리고 끝이 났다면, 우리가 바라는 감동은 얻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에 한 에피소드가 남아있다. 미스 헴펠이 어째서 선생님이었는가를 알 수 있는 마지막 편이. 이 마지막 에피스도를 본다면 뭉클한 감동을 우리에게 선사해줄 것이다. 아, 바로 선생님은 이런 것이지~ 하는 깨달음과 함께. 나도 나중에 이런 평가를 듣고 싶지만, 아직은 멀었다. 그저 그런 선생님이라도 되지 말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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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과 함께 사계절 아동문고 58
하나가타 미쓰루 지음, 고향옥 옮김, 이선민 그림 / 사계절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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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일학년, 초등학교 일학년, 중년인 아빠... 이 세 명이 가족의 전부인 도키오 가족은 반 년전에 엄마를 잃었다. 그것도 교통사고로~. 아무 것도 준비가 되지 않은 마마보이인 도키오는 그 충격으로 말을 잃어버렸다가 겨우 이제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데, 어쩐지 공부할 마음이 나지 않는 중학교 일학년인 나는 모든 일에 흥미가 나지 않았다. 어차피 돌아가신 엄마야 여섯 살이나 어린 동생 차지였으니 특별히 이런 이상한 기분이 엄마가 돌아가신 것과는 상관이 없을 거였다. 하지만 학원도 땡땡이 치고, 밴드 연습도 나가기 싫고, 여덟 시가 훨씬 넘어서야 집에 들어가던 이전과는 달리, 이제는 여섯 시면 집에 기어들어온다. 이게 웬일인 걸까.... 이래 봬도 이상하게 되기 전까지, 나는 가나가와 현에서 도쿄 중심지에 있는 유명 사립학교에 다니는 장거리 통학생이었다. 뭐, 그만큼 공부를 잘했단 말씀이지, 흠흠.

 

그런데 내 의욕 저하보다 더 큰 일이 일어났다!! 말을 안 하다가 이제 겨우 하기 시작한 것은 좋은데, 도키오가 집에 왠 애완동물을 기른다느니, 그것이 용이니 하는 헛소릴 지껄이지 않는가. 마마보이였던 도키오가 엄마를 잃고 얼마나 큰 충격에 휩싸였을지는 이해는 가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져야 하는 걸까. 하지만 이게 왠걸? 나는 얼떨결에 그 아이의 말을 받아주고 말았다.

 

“저어, 네 애완동물 용 ...... 뭐였지? 으응, 포치였던가? 저어, 그에 대해서 좀 알고 싶은데, 알려 줄 수 있겠니?”

 

심지어 불러오겠다고 하는 녀석에게 이렇게까지 망가졌다. 헉!!

 

“아, 아냐, 됐어. 형은 보기와 달리 꽤 낯을 가리는 편이라, 처음 보면 몸이 얼어붙어서...”

 

집에 오는 길에 요코하마 역 구내 서점에서 산 상담책의 지도를 받아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고, 도키오에게 말을 시키니 그 포치라는 놈은 반 년전 도키오가 잃어버린 개를 주워왔다가 아빠에게 혼난 후부터 우리 집에 왔다고 한다. 엄마가 용의 알을 주셨다나 뭐라나~ 어쨌든 잃어버린 엄마 대신 잔소리도 하고, 감시 비슷한 것을 하는 포치는 도키오에게 유일한 친구인 듯 했다. 그러니까 과대망상, 자폐 뭐 그런 거 아니야? 어쩌지? 아빠에게 말해야 하나?

 

그러던 어느 일요일, 아침에 일어난 나를 보는 도키오가 예사롭지 않다. 하긴 이 시간에 일어난 것 자체가 기적이긴 하다. 계란 프라이를 해주고는 도키오를 데리고 야외로 나가서 놀았다. 그러니까 생애 처음으로 둘이 논 시간이었다. 왜 데리고 나갔을까? 겁만 많아서 귀찮게만 하는 동생인데... 어릴 적부터 병이란 병은 다 가지고 있어서 엄마를 독차지해버린 녀석이라 무시해버리기로 했는데... 나도 엄마가 필요했다고!! 나에게도 엄마가!! 하지만 엄마는 도키오에게 그랬단다, 형과 아빤 완벽해서 엄마가 필요없다고~ 뭐야, 엄마! 엄마가 먼저 그랬잖아, 나는 형이라서 참아야 한다고. 나도 엄마가 필요해!!

 

아빠에게 도키오에 대해 말씀드렸다. 그 녀석 용이란 망상 동물을 가지고 있다고. 평소에는 괜찮냐는 말은커녕 안부 인사도 가당치 않아 하시는 아빠께선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약한 모습을 보이셨다.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맡으셨는데 사람을 자르는 일이 어렵다나 어쩐다나. 하지만 중요한 것은 도키오가 아닌가. 내 말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던 아빠는, 도키오의 학교에서 온 부모 소환장에 길길 날뛰셨다. 아직까지 글도 알지 못하고 의욕 없고 친구도 없는데 가끔 광분해서 날뛰는 도키오는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한다는 말에. 엄마가 돌아가셔서 그런 반응은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냐고 정신병원에 넣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니냐고 막아보려지만, 아무도 돌봐주지 못하는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병원에 가는 날, 그 녀석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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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죽음으로 상실감을 겪지도 못한 채 돈을 벌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아빠, 어린 동생 때문에 엄마를 잃어버린 듬직해야만 하는 장남, 그리고 어린 마음에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용을 만들어낸 도키오... 각자 상처가 있어서 정상적인 삶을 만들어가지는 못하면서도 서로 보듬어주지도 못하는 가족입니다. 아마도 구심점이었던 엄마가 안 계셨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엄마가 계셨어도 그 상처가 보듬어졌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가만 보면 엄마가 살아계셨을 때부터 아빠는 저녁조차 집에서 드시지 못할 정도로 일에 치여 사셨거든요. 아마도 그것은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이었을 뿐, 다른 이유는 없었을 겁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무뚝뚝했던 것이 아니라 일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니까요. 그리고 엄마에겐 장남이 아주 듬직하게만 보였나 봅니다. 그도 엄마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직 어린 아들인데 말이죠.

 

각자의 위치가 주는 책임감과 고난이 이 가족을 서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도키오에겐 형은 위대한 사람이고, 엄마는 필요없는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형은 아빠를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엄마도 장남을 그렇게, 남편을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는 그들이 서로의 마음을 이해할 날이 올까요? 저는 이미 왔다고 생각합니다. 장남이 평소와 다르게 집에 일찍 들어온 날부터, 무언가가 소통하기 시작했으니까요. 여섯 날이나 어린 동생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했던 그의 시작이 아마도 그들을 더욱 강하게 결속하게 만들어 줄 겁니다. 아마도 이것이겠지요. 상대방을 이해하는 한 마디 말이나 행동, 그것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 가족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아, 어쩌면 엄마의 자리가 빈 그 그것이 겉으로는 완벽하게만 보였던 이 가족이 뭔가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모든 것을 참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인내하셨을 테니까 가족 내의 보이지 않는 균열이 나중에는 어마어마하게 커져서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몰랐는데 말이죠. 가족은 하나의 유기체일 순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유기체 중에서도 표현하지 않으면 소외라는 병으로 인해 한 지체를 잘라내야 하는 순간이 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나 자식들을 다 키운 뒤에 엄마에게 찾아오는 공허감은 무시할 수준이 못 되겠지요. 가끔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엄마의 인생은 도대체 무엇일까 하고 말이죠. 자식들이 인생을 경험하고 자아를 실현할 동안 그녀의 자아는, 인생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를 말이죠. 이 동화는 분명 가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엄마에 대해서도 말해주고 싶어요. 아니면 묵묵히 일만 하시는 아빠에 대해서든지요. 요즘 속으로 눈물 흘리는 부모가 많은 것 아시나요? 내 새끼 잘 되라고 제 살 깍아먹는 부모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우리 부모님의 마음은 언제쯤이나 헤아려질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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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숲, 길을 묻다 네이버 캐스트 철학의 숲
박일호 외 지음 / 풀빛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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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에 연재되었던 ‘철학의 숲’이 이렇게 책으로 엮여져 나왔다. 쉽고 간결하게 사람들에게 전달해주었던 그것이, 이렇게 책으로 나오게 되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르겠다. 특히 나처럼 네이버에서 하는 모든 연재물들을 보지 않는 경우에는 정말 천우신조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순 우리나라 사람의 손으로 쓰여진 서양철학 이야기라니, 기분도 좋고 감회도 새롭다. 사실은 나는 철학이라는 학문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저 고등학교 때 입시를 준비하면서 한 번씩 들어봤던 인물들이 나열되어 나오는 것에 새롭고 신기할 뿐이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책으로 만난 철학가들은 어딘가 달랐다. 내게 생각할 것을, 진리를 찾을 것을 요구했다. 나는 단지 고등학생 때처럼 뭔가를 외우고 정리하는 것을 원했는데...
 
책을 읽고 서평을 남기는 작업을 한 지 만 3년이 조금 넘었다. 그 동안 나는 무턱대고 철학을 사랑했었다. 쌓아둔 책도 한 가득이고, 좋아하는 철학가나 저자와 저서도 생겼고, 책을 읽는다는 사람들마다 철학을 전파하려는 역사적 사명을 띠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철학책을 읽는다고 하더라도 철학적 사유는 전혀 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내가 끌렸던 철학책의 수준이 낮았던 것일 수도 있겠고, 역사적인 연대 순으로 철학가들을 나열만 해둔 책을 봤던 이유도 있겠다. 아니, 어쩌면 나만의 철학적 사유를 정립, 발전시키기에는 내가 너무 게으른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철학에 대한 열병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 짧은 시기에, 많은 경험을 했던 개인적인 이유로 철학 책만 보면 가슴이 뛰던 것이 옛일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아마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신만의 독서 기호를 정하는 데에 나는 그렇게 3년이란 시간이 걸렸나보다.
 
내가 철학 책을 손에 들 때는 왠지 내 지적 허영심을 만족시켜주기 위해서란 느낌을 가진 적이 잠시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확실히 그것이었다. 이렇게 어려운 것을 내가 읽고 있다는 것을 만방에 알리고 싶은 그런 나만의 자만심이 그렇게 표출되었다. 그래서 과거엔 좋아하는 분야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주저없이 ‘철학’이라고 했던 내가 지금은 잘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가 있기는 한 것인지를. 그저 내 침대 위에 나뒹구는 책들을 보면 확실히 철학은 아니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자기계발서 조금, 신앙서적 조금, 고전 조금, 인문학 조금, 과학 조금, 소설 조금, 에세이 조금.... 뭐, 그렇게 내 지평을 넓혀가는 중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도 도대체 과거의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난감했다. 정말로 내가 철학 책을 좋아하기나 했었던가 싶어서. 그 만큼 난해하고도 지리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 책이 읽기가 지리했던 것이 어쩌면 내가 다 알고 있는 철학가들만 등장했기 때문은 아닌가 싶기도 한다. 물론 여기 등장한 모든 철학가들의 사상을 하나라도 완벽히 소화해서 누군가에게 이야기해보라고 한다면 자신은 없지만, 솔직히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기에, 모르는 것이 나오면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나로선 조금 힘들지 않았나 싶다. 고대에서 몇몇 철학가를 제외하곤 중세와 근대 철학가는 다 아는 분들이시니. 만약 내 말을 이 책을 쓰신 저자들께서 들으신다면 얼마나 실소를 하실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솔직히 각 철학가들의 주요 물음과 그 해결책을 나열한 것으로서는 내 지적 호기심이 만족시켜지지가 않는다. 이제는 그런 것말고 그런 여러 물음들이 현대의 어떤 것과 맞물려 돌아가는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이제껏 철학의 바다에서 뛰놀았던 대가로 이들을 조금이나마 친근하게 느껴진 것이니, 이제껏의 시간이 아깝지는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솔직히 말해, 서양철학은 머리가 아프다. 현실적인 문제가 아닌 왠지 탁상공론만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사물의 변화를 부정한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론도 현실적으로 말이 되지 않지 않는가. 왜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역설을 고수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동양 사상에 등장하는 역설은 상당히 좋아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 되지 않는 말이 그 속의 의미를 들여다보면 깊은 내용, 세상을 관통하는 진리를 담고 있기에, 너무나 사랑한다. 그런데 서양철학은 조금 말을 위한 말만 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그다지 반갑지가 않다. 물론 그들도 이것이 현실과 위배되는 것을 아니까 의견의 길을 떠나 진리의 길로 가는 과정을 만들어, 존재론이란 한 분야를 창시했다고 하지만, 꼭 그렇게 힘들게 돌아와야 하는 것일까 의문이 든다. 지적 욕구란 어느 짧은 기간에만 발휘되는 것인지,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이론 공방은 어쩜 인간을 지치게 하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이와는 다르게 동양 사상은 하나도 지루하지가 않은데 말이다.
 
내가 여기서 인상깊게 봤던 철학자는 소크라테스에게 가리워져 서양 철학의 아버지란 자리를 놓친 프로타고라스이다. 솔직히 고대 철학자들은 대부분의 사상을 다 알고 있어도 그들의 이름 하나를 정확하게 외울 수가 없기에 이 프로타고라스도 이미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처음 들어본 것인지, 아니면 처음 뇌리에 박힌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철학의 관심을 자연 영역에서 인간 영역으로 이동시킨 소크라테스보다도 더 이전에 프로타고라스가 그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크라테스에 비해 그 이름이 가리워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 놀랍지 않은가! 소크라테스에 비해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그도 소크라테스처럼 덕에 대해 주장했고, 대화법의 달인이었다) 프로타고라스이지만 왜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졌을까.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그의 주장은 진리의 상대성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정해주고 그에 따라 실천하기를 주장하는 철학이란 학문에서 진리의 상대성이란 철학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기에 그의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솔직히 보통 사람들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 세 사람의 이름만이 그리스 철학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말이다. 아예 이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일 텐데 프로타고라스, 그의 이름을 기억해줄 이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나는 한동안 철학 책을 탐독하면서 진리의 상대성에 대한 유혹을 받았다. 내게 아직 옳고 그름이란 분별력이 없었을 때의 이야기인데, 포스트모더니즘이 딱히 내게 그런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 내 의견이 절대와 상대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이제는 진리는 무조건 절대적인 것을 인지하고 있으나 그 당시에는 내 개인적인 상황과 맞물려 이럴 땐 살인도 용납되어야 하지 않는가라든가, 이럴 땐 도둑질도 용서해줘야 한다든지 제 멋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영역에 철학의 초점을 맞춘 프로타고라스가 왜 맞지 않는지 이제는 확실히 안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그의 이름을 내 머리에 각인해둘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역량이 있어도 뚜렷한 기준이 없다면 안된다는 것을. 특히 옳고 그름에 대해 이야기하는 철학이란 영역에서는 그것이 아주 치명적이란 사실도 말이다.
 
철학의 숲을 거닐면서, 나는 과연 길을 찾았는가 묻고 싶다. 지금으로선 그 길을 오히려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인터넷에 연재되었던 글의 특색에 맞게 깔끔하고 알기 쉽게 정리해둔 것만큼은 좋은 평가를 해주고 싶다. 하지만 이 책의 후속 작업도 나와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과연 언제까지 수동적으로 누구의 어떤 사상만을 익혀야 하겠는가. 어떤 사상들이 있었는지, 어떤 시대에 어떤 질문을 던졌는지를 이제야 알았다면, 이제는 그것에 대해 능동적으로 답변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밥만 떠먹는 수동적인 역할이 아닌, 내가 현대 사회에서의 문제에 있어서 철학적 사유로 대응하는 능동성을 보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솔직히 궁금하다. 이 책의 제목은 『철학의 숲, 길을 묻다』인데, 왜 그 안에 서양 철학만 들어가 있는 것인지. 동양 철학도 충분히 길이 될 수 있는데 말이다. 아쉬운 것은 다음을 기약하며 이만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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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고, 사랑하고, 고맙다
김정순 지음 / 엘도론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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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나와 다른 뭔가 특별함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것도 지체 장애를 가진 남편을 만나 같이 목회의 뜻을 품으며 원대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와 같은 처절하게도 정욕에 대한 유혹이나 자만과 같은 죄 따위는 절대 짓지 않는 줄 알았다. 내가 존경하는 이 중 하나가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이신데, 그 분에 대한 간략한 설명만 보자면 그가 저질렀던 특별히 죄악에 대한 유혹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내 근본적인 비교의식으로 인한 오해였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서 교회 안에서만 살아온 나는,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이들이 항상 나보다 뛰어난 영성을 가진 분들로 생각하곤 했다. 단지 그 뿐이었다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나를 하나님조차도 구원해주지 못할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아주 사소한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내가 봐도 아무것도 잘난 게 없어. 나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서 제대로 생활하지도 못해. 말씀 읽기와 기도는커녕 다른 사람의 험담만 하는 나쁜 아이야.
 
이 사소한 계기는 나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춤거리게 했고, 그로써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아야 할 은혜를 충분히 경험하지 못해 매일 매일 악순환을 계속하게 만들었다. 교회에 가도 죄책감만 가득하고, 세상 속에 있으면 불신자들과 차이가 없는, 그런 소망 없는 생활을 30년 동안이나 계속해온 것이다. 사람은 절망을 경험해봐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던가. 이 말은 성경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진리 중에서도 참 진리가 틀림없다. 아들 없이 수십 년을 광야를 헤맨 아브라함이 그랬고, 에서를 피해 라반으로 가던 야곱이 그랬고, 애굽으로 팔려가 십수년 동안이나 감옥 생활을 했던 요셉이 그러했듯이, 다윗이 그러했듯이,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깊은 절망 속에서야,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붙잡을 것이 없을 때가 되어서야 겨우,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교만한 인간이 저를 지어준 아비를 버리고 다른 곳에서 호된 시련을 맛보고 나서야 모든 것을 버리고 제 아비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때는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처럼, 버선발로 뛰어나와 나를 맞아주실 테니.
 
하나님, 그 분을 만난 후로서는 모든 것이 전과는 달랐다. 이제까지 불렀던 찬양 가사 하나까지도 그 의미가 분명하게 전달되는 경험을 하게 하셨고, 많은 사람이, 아니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좌절과 절망을 경험하고, 나와 같이 죄악을 끊지 못해 많이 넘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내 안에서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던 나는 이제 없어지고, 하나님께서 이런 나라도, 이렇게 더러운 죄악의 구렁텅이가 좋다고 벗어나지 못하는 나라도 사랑하고 계심을 구구절절히 알게 하셨다. 작년 중국에서 돌아올 때, 내 안에서는 이런 물음이 가득했다. “하나님, 전 사랑을 받은 기억이 없어요! 제게 사랑을 철철 흘러넘치게 해주셔야 저도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랑을 전해주죠!! 제게 사랑을 부어주세요. 그 사랑을, 모든 사람들이 찬양해 마지 않는 그 사랑을 저에게도 느끼게 해주세요.” 그것을 이제야 깨닫게 하셨다.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내가 아무리 자격이 없고, 남들에 비해 떨어진다고 느낄지라도 하나님만큼은 결단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심을, 그리고 결단코 그렇게 지으시지도 않으셨음을.
 
내가 이렇게 깨닫게 된 것은, 중국에서 돌아온 후 내게 벌어졌던 크고 작은 일들과 내 주변 여건들과 내 주변 사람들로 인해서이다. 그 모든 것 중 하나라도 내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고, 그저 하나님께서 하셨을 뿐이었다. 내가 받게 하신 교육과 섬기는 자리와 부족하지만 끝까지 용기를 내게 하신 것과 그리고 결코 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동계수련회까지 어느 것 하나 내가 움직여 된 것이 없었다. 아, 나로서는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구나. 나를 정말 사랑하셨구나. 펄떡이는 심장을 꺼내 하나님께 지음받았던 생기를 잃어버린 죽은 내 육체에 넣어주신 그 사랑, 그 사랑으로 말미암마 나는 오늘을 살 수 있었다. 오늘은 그저 그런 하루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나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하루인 것을 나는 알았다. 이 사랑 안에 거하면 나도 내가 어렵게 느끼는 전도나 말씀 증거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미 이루신 것도 있으신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실 테니까. 근본적인 두려움, 사람들 앞에 나서기 좋아하지 않는 태생적인 수줍음을 극복하게 하신 것도 다 그 분이시니까.
 
그러면서도 시간이 흐르니, 나는 또 내 것만 앞세운다. 뚱한 표정으로 스쳐지나는 사람에게라도 친절할 수 없는 나를 보면 황당할 뿐이다. 그런데 장애인 선교를 하시는 이 분, 사모님이시자 상담가이시자 목회자이신 김정순 님을 보자면 한없이 미안해진다. 아~, 주일날 간단한 가방 하나만 들고 교회에 가는 성도들을 그렇게나 부러워하시는 그 분은 주일이면 다섯 차례나 되는 예배를 다 준비하고, 간단한 점심을 만들어서 성도들을 대접하고, 거동이 불편한 분들을 일일히 한 사람씩 챙겨서 집에까지 모셔다 드리고, 주일 학교 아이들이랑 같이 시간을 보내주고 오면, 저녁 먹을 때가 되어서야 겨우 한숨 돌릴 틈이 생긴다. 그조차도 누군가의 전화에 부리나케 봉사하러 달려가셔야 하니 하루 세 끼 밥조차 챙기기가 어렵다. 주일에 하루종일 교회에 붙어있어서 힘들다고 투정부렸던 게 누구인지 모르겠다. 예전에 내 육체가 정욕의 도구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아서 절망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어떻게 위기를 모면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얼마 전 설교 말씀 중에 우리의 육체를 의의 도구로 드려야 한다는 말씀에 새로운 눈이 열리는 것 같았다. 봉사가 중요하구나!
 
하지만 아직까지 성실하게 할 자신 없어 머뭇거리고 있는 중이다. 이미 새 학기가 시작되었으니 교사일을 하려 해도 어색할 것 같다는 것도 한 가지 핑계거리가 된다. 찬양은 원래 못하니 요즘 모집하고 있는 성가대일은 열외가 된다는 것은 차치하고서도 말이다. 사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고 내 노력과 시간과 수고를 내 것으로 여기고 있어서 그것을 내어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보잘것없는 달란트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는 쓰지 않으면 빼앗기는데 나는 4년째 생각만 하고 있는 중이니, 좋은 기회에 내가 가진 것 중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어드리고 싶다. 누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나는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으니까. 나는 더 큰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함을 받았는데, 내가 어찌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이것을 생각하면 갑자기 하기 싫다는 마음이 슬그머니 자리잡아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리라 믿는다. 나에게서 나오는 모든 선함은 다 내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내가 무엇 하나 말할 수가 있을까.
 
김정순 님은 내가 보기엔 대단한, 여러 사역을 하시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노력하신 것을 완전히 까발려 보여주셨다. 큰 일은 두말 없이 하면서도 작은 일에는 마음을 상하여 회개하시는 경우도 있었고, 겉보기에는 멀쩡해보이지만 속으로는 곪아 터져서 다시 하나님 앞에서 치유받고 새 힘을 얻은 것도 보여주셨다. 우울증도 올 수 있고, 육체의 약함으로 인해 힘들어하시는 것도, 많은 스트레스로 인해 마음이 생생하지 못했던 것도, 대단한 일을 감당하시는 대단한 분이 아니시고 나랑 별로 차이가 없는 모습을 보여주셔서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는 동일하다는 진리를 알려주셨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소아시아 전역을 감당한 사도 바울처럼 절대 차별없이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대단한 일을 하시는 사모님이시지만, 똑같이 죄의 문제에서 해결받아야 하고, 하나님을 일대일로 만나 은혜 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생기를 지닌, 하나님께 속한 자이니까 말이다.
 
김정순 사모님은 지체 장애 1급인 남편 김종군 목사님을 만나셔서 한 가정을 만드셨다. 그러면서 장애인을 위한 에벧에셀교회를 개척한 지 이제 15년이 되셨단다. 사실은 이 책을 보기 전까지 장애인만을 위한 교회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것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만의 망상이었다. 누구나 사고로 쉽게 장애인이 될 수 있는 사회에서 이런 교회가 훨씬 많으면 많았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다니. 우리 교회에는 밀알부라고 따로 장애인부서가 있어서 다들 그런 식으로 있는 줄만 알았던 것이다. 그곳에서 시무하시는 목사님과 전도사님을 뵈었지만, 정말로 보통 목회자들과는 풍겨오는 느낌이 남달랐던 것을 기억한다. 모든 목회자분들이 힘드시지만, 그 분들은 뭐랄까, 인간에 대한 따스한 정이 더 잘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하여튼 아주 좋으셨다. 그런데 이런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모든 성도들이 장애인이니까 집에서 준비하는 것에서부터 교회로 이동하고 다시 집으로 도착하는 것까지 사람들의 손이 필요하다.
 
아마도 우리 교회에서도 그런 것을 감당할 텐데, 나는 그런 부서에서 봉사해본 적도 없고, 다소 규모가 있는 교회이다 보니까 사람들이 없지 않을 거라 무심히 생각해서 그런지 특별히 신경쓰지 못했던 것 같다. 정상인 몇몇 분들이 도와주기에는 벅차보이는 듯한 이야기를 읽고 있으려니까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다. 어서 가서 내 손 하나라도 도와드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나는 너무나 쉽게 살았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고 느낀 것도 겉으로는 특별한 사건 하나 없이 그저 물 흐르는 대로 흘러갔고, 내 영만 아프게 신음했을 뿐이었다. 내가 말씀 안에 거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뜻을 바라보기보다는 세상의 현란하고 유혹적인 것에 이끌리어 나를 멍들게 했던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 땅 위에는 이런 삶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사모님은 다른 것보다 사람들의 편견이 더 아프고 힘들다고 하셨다. 장애인이 있다고 자기 교회에서 데려가라는 분도 있고, 정상인이 왜 장애인 교회에 다니냐고 잘 나오시는 분을 자기 교회로 데려가시는 분도 있다고 하니, 정말 무섭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 데도 그 믿음과 시야가 너무나 차이가 나서...
 
요즘 우리 목사님께서 많이 하시는 말씀이 있다. 성경은 불신자들을 향해서 하는 말씀이 아니고, 그것은 모두 다 믿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열 처녀의 비유에서 미련한 다섯 처녀도 원래 신랑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고, 그들이 신랑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한 달란트 받은 종도 원래 달란트를 받을 정도로 믿을 만 했던 종이었다고, 게하시도 위대한 능력의 선지자 엘리사 옆에 있던 사환이었고, 데마도 위대한 사도 바울 옆에 있었떤 사도였다고 말이다. 더 나아가서 좁은 문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는 많을지라도 들어가는 자는 적기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도 하셨다. 주여 주여 말하는 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들어갈 수 있다고. 또 더 뜨끔했던 것은 이것이다. 복음 자체를 믿는 것인지, 아니면 복음의 콩고물을 믿는 것인지 확실히 하라고. 그러니까 이것을 바꿔 말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일에 경건한 척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밖에서는 장애인들을 경멸하거나 쓸모없다거나 둔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말이다. 딱 잘라 말해, 그들을 도와주는 선한 사마리아가 되지 않는다면 너희들에게 구원은, 천국은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난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것이 천국 가기 위해서인 줄 알았다. 그래서 그 콩고물 이야기에 확 가슴에 와닿는 뭔가가 있었다. 내 믿음은 가짜였구나~ 실천하지 않는 믿음, 성경에 뻔히 등장하는 ‘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을 지그시 밟아 누르는 내 믿음은 정말로 가짜였구나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예전보다는 뭔가 내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다. 바람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몰라도 바람이 있다는 것은 아는 것처럼,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만 의지하면 그 안에 거할 수 있단 믿음이 내 마음에 생성된다. 오늘이 끝이라고 생각하며, 하루를 알차게 살아야겠다. 죄악된 본성을 벗어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듯이 살아가는 믿음으로 가꾸어갈 수 있겠지! 그 분이 계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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