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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고, 사랑하고, 고맙다
김정순 지음 / 엘도론 / 2011년 2월
평점 :
나는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나와 다른 뭔가 특별함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것도 지체 장애를 가진 남편을 만나 같이 목회의 뜻을 품으며 원대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와 같은 처절하게도 정욕에 대한 유혹이나 자만과 같은 죄 따위는 절대 짓지 않는 줄 알았다. 내가 존경하는 이 중 하나가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이신데, 그 분에 대한 간략한 설명만 보자면 그가 저질렀던 특별히 죄악에 대한 유혹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내 근본적인 비교의식으로 인한 오해였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서 교회 안에서만 살아온 나는,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이들이 항상 나보다 뛰어난 영성을 가진 분들로 생각하곤 했다. 단지 그 뿐이었다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나를 하나님조차도 구원해주지 못할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아주 사소한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내가 봐도 아무것도 잘난 게 없어. 나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서 제대로 생활하지도 못해. 말씀 읽기와 기도는커녕 다른 사람의 험담만 하는 나쁜 아이야.
이 사소한 계기는 나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춤거리게 했고, 그로써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아야 할 은혜를 충분히 경험하지 못해 매일 매일 악순환을 계속하게 만들었다. 교회에 가도 죄책감만 가득하고, 세상 속에 있으면 불신자들과 차이가 없는, 그런 소망 없는 생활을 30년 동안이나 계속해온 것이다. 사람은 절망을 경험해봐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던가. 이 말은 성경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진리 중에서도 참 진리가 틀림없다. 아들 없이 수십 년을 광야를 헤맨 아브라함이 그랬고, 에서를 피해 라반으로 가던 야곱이 그랬고, 애굽으로 팔려가 십수년 동안이나 감옥 생활을 했던 요셉이 그러했듯이, 다윗이 그러했듯이,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깊은 절망 속에서야,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붙잡을 것이 없을 때가 되어서야 겨우,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교만한 인간이 저를 지어준 아비를 버리고 다른 곳에서 호된 시련을 맛보고 나서야 모든 것을 버리고 제 아비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때는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처럼, 버선발로 뛰어나와 나를 맞아주실 테니.
하나님, 그 분을 만난 후로서는 모든 것이 전과는 달랐다. 이제까지 불렀던 찬양 가사 하나까지도 그 의미가 분명하게 전달되는 경험을 하게 하셨고, 많은 사람이, 아니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좌절과 절망을 경험하고, 나와 같이 죄악을 끊지 못해 많이 넘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내 안에서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던 나는 이제 없어지고, 하나님께서 이런 나라도, 이렇게 더러운 죄악의 구렁텅이가 좋다고 벗어나지 못하는 나라도 사랑하고 계심을 구구절절히 알게 하셨다. 작년 중국에서 돌아올 때, 내 안에서는 이런 물음이 가득했다. “하나님, 전 사랑을 받은 기억이 없어요! 제게 사랑을 철철 흘러넘치게 해주셔야 저도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랑을 전해주죠!! 제게 사랑을 부어주세요. 그 사랑을, 모든 사람들이 찬양해 마지 않는 그 사랑을 저에게도 느끼게 해주세요.” 그것을 이제야 깨닫게 하셨다.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내가 아무리 자격이 없고, 남들에 비해 떨어진다고 느낄지라도 하나님만큼은 결단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심을, 그리고 결단코 그렇게 지으시지도 않으셨음을.
내가 이렇게 깨닫게 된 것은, 중국에서 돌아온 후 내게 벌어졌던 크고 작은 일들과 내 주변 여건들과 내 주변 사람들로 인해서이다. 그 모든 것 중 하나라도 내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고, 그저 하나님께서 하셨을 뿐이었다. 내가 받게 하신 교육과 섬기는 자리와 부족하지만 끝까지 용기를 내게 하신 것과 그리고 결코 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동계수련회까지 어느 것 하나 내가 움직여 된 것이 없었다. 아, 나로서는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구나. 나를 정말 사랑하셨구나. 펄떡이는 심장을 꺼내 하나님께 지음받았던 생기를 잃어버린 죽은 내 육체에 넣어주신 그 사랑, 그 사랑으로 말미암마 나는 오늘을 살 수 있었다. 오늘은 그저 그런 하루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나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하루인 것을 나는 알았다. 이 사랑 안에 거하면 나도 내가 어렵게 느끼는 전도나 말씀 증거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미 이루신 것도 있으신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실 테니까. 근본적인 두려움, 사람들 앞에 나서기 좋아하지 않는 태생적인 수줍음을 극복하게 하신 것도 다 그 분이시니까.
그러면서도 시간이 흐르니, 나는 또 내 것만 앞세운다. 뚱한 표정으로 스쳐지나는 사람에게라도 친절할 수 없는 나를 보면 황당할 뿐이다. 그런데 장애인 선교를 하시는 이 분, 사모님이시자 상담가이시자 목회자이신 김정순 님을 보자면 한없이 미안해진다. 아~, 주일날 간단한 가방 하나만 들고 교회에 가는 성도들을 그렇게나 부러워하시는 그 분은 주일이면 다섯 차례나 되는 예배를 다 준비하고, 간단한 점심을 만들어서 성도들을 대접하고, 거동이 불편한 분들을 일일히 한 사람씩 챙겨서 집에까지 모셔다 드리고, 주일 학교 아이들이랑 같이 시간을 보내주고 오면, 저녁 먹을 때가 되어서야 겨우 한숨 돌릴 틈이 생긴다. 그조차도 누군가의 전화에 부리나케 봉사하러 달려가셔야 하니 하루 세 끼 밥조차 챙기기가 어렵다. 주일에 하루종일 교회에 붙어있어서 힘들다고 투정부렸던 게 누구인지 모르겠다. 예전에 내 육체가 정욕의 도구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아서 절망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어떻게 위기를 모면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얼마 전 설교 말씀 중에 우리의 육체를 의의 도구로 드려야 한다는 말씀에 새로운 눈이 열리는 것 같았다. 봉사가 중요하구나!
하지만 아직까지 성실하게 할 자신 없어 머뭇거리고 있는 중이다. 이미 새 학기가 시작되었으니 교사일을 하려 해도 어색할 것 같다는 것도 한 가지 핑계거리가 된다. 찬양은 원래 못하니 요즘 모집하고 있는 성가대일은 열외가 된다는 것은 차치하고서도 말이다. 사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고 내 노력과 시간과 수고를 내 것으로 여기고 있어서 그것을 내어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보잘것없는 달란트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는 쓰지 않으면 빼앗기는데 나는 4년째 생각만 하고 있는 중이니, 좋은 기회에 내가 가진 것 중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어드리고 싶다. 누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나는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으니까. 나는 더 큰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함을 받았는데, 내가 어찌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이것을 생각하면 갑자기 하기 싫다는 마음이 슬그머니 자리잡아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리라 믿는다. 나에게서 나오는 모든 선함은 다 내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내가 무엇 하나 말할 수가 있을까.
김정순 님은 내가 보기엔 대단한, 여러 사역을 하시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노력하신 것을 완전히 까발려 보여주셨다. 큰 일은 두말 없이 하면서도 작은 일에는 마음을 상하여 회개하시는 경우도 있었고, 겉보기에는 멀쩡해보이지만 속으로는 곪아 터져서 다시 하나님 앞에서 치유받고 새 힘을 얻은 것도 보여주셨다. 우울증도 올 수 있고, 육체의 약함으로 인해 힘들어하시는 것도, 많은 스트레스로 인해 마음이 생생하지 못했던 것도, 대단한 일을 감당하시는 대단한 분이 아니시고 나랑 별로 차이가 없는 모습을 보여주셔서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는 동일하다는 진리를 알려주셨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소아시아 전역을 감당한 사도 바울처럼 절대 차별없이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대단한 일을 하시는 사모님이시지만, 똑같이 죄의 문제에서 해결받아야 하고, 하나님을 일대일로 만나 은혜 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생기를 지닌, 하나님께 속한 자이니까 말이다.
김정순 사모님은 지체 장애 1급인 남편 김종군 목사님을 만나셔서 한 가정을 만드셨다. 그러면서 장애인을 위한 에벧에셀교회를 개척한 지 이제 15년이 되셨단다. 사실은 이 책을 보기 전까지 장애인만을 위한 교회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것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만의 망상이었다. 누구나 사고로 쉽게 장애인이 될 수 있는 사회에서 이런 교회가 훨씬 많으면 많았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다니. 우리 교회에는 밀알부라고 따로 장애인부서가 있어서 다들 그런 식으로 있는 줄만 알았던 것이다. 그곳에서 시무하시는 목사님과 전도사님을 뵈었지만, 정말로 보통 목회자들과는 풍겨오는 느낌이 남달랐던 것을 기억한다. 모든 목회자분들이 힘드시지만, 그 분들은 뭐랄까, 인간에 대한 따스한 정이 더 잘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하여튼 아주 좋으셨다. 그런데 이런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모든 성도들이 장애인이니까 집에서 준비하는 것에서부터 교회로 이동하고 다시 집으로 도착하는 것까지 사람들의 손이 필요하다.
아마도 우리 교회에서도 그런 것을 감당할 텐데, 나는 그런 부서에서 봉사해본 적도 없고, 다소 규모가 있는 교회이다 보니까 사람들이 없지 않을 거라 무심히 생각해서 그런지 특별히 신경쓰지 못했던 것 같다. 정상인 몇몇 분들이 도와주기에는 벅차보이는 듯한 이야기를 읽고 있으려니까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다. 어서 가서 내 손 하나라도 도와드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나는 너무나 쉽게 살았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고 느낀 것도 겉으로는 특별한 사건 하나 없이 그저 물 흐르는 대로 흘러갔고, 내 영만 아프게 신음했을 뿐이었다. 내가 말씀 안에 거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뜻을 바라보기보다는 세상의 현란하고 유혹적인 것에 이끌리어 나를 멍들게 했던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 땅 위에는 이런 삶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사모님은 다른 것보다 사람들의 편견이 더 아프고 힘들다고 하셨다. 장애인이 있다고 자기 교회에서 데려가라는 분도 있고, 정상인이 왜 장애인 교회에 다니냐고 잘 나오시는 분을 자기 교회로 데려가시는 분도 있다고 하니, 정말 무섭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 데도 그 믿음과 시야가 너무나 차이가 나서...
요즘 우리 목사님께서 많이 하시는 말씀이 있다. 성경은 불신자들을 향해서 하는 말씀이 아니고, 그것은 모두 다 믿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열 처녀의 비유에서 미련한 다섯 처녀도 원래 신랑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고, 그들이 신랑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한 달란트 받은 종도 원래 달란트를 받을 정도로 믿을 만 했던 종이었다고, 게하시도 위대한 능력의 선지자 엘리사 옆에 있던 사환이었고, 데마도 위대한 사도 바울 옆에 있었떤 사도였다고 말이다. 더 나아가서 좁은 문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는 많을지라도 들어가는 자는 적기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도 하셨다. 주여 주여 말하는 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들어갈 수 있다고. 또 더 뜨끔했던 것은 이것이다. 복음 자체를 믿는 것인지, 아니면 복음의 콩고물을 믿는 것인지 확실히 하라고. 그러니까 이것을 바꿔 말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일에 경건한 척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밖에서는 장애인들을 경멸하거나 쓸모없다거나 둔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말이다. 딱 잘라 말해, 그들을 도와주는 선한 사마리아가 되지 않는다면 너희들에게 구원은, 천국은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난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것이 천국 가기 위해서인 줄 알았다. 그래서 그 콩고물 이야기에 확 가슴에 와닿는 뭔가가 있었다. 내 믿음은 가짜였구나~ 실천하지 않는 믿음, 성경에 뻔히 등장하는 ‘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을 지그시 밟아 누르는 내 믿음은 정말로 가짜였구나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예전보다는 뭔가 내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다. 바람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몰라도 바람이 있다는 것은 아는 것처럼,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만 의지하면 그 안에 거할 수 있단 믿음이 내 마음에 생성된다. 오늘이 끝이라고 생각하며, 하루를 알차게 살아야겠다. 죄악된 본성을 벗어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듯이 살아가는 믿음으로 가꾸어갈 수 있겠지! 그 분이 계시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