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숲, 길을 묻다 네이버 캐스트 철학의 숲
박일호 외 지음 / 풀빛 / 201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네이버에 연재되었던 ‘철학의 숲’이 이렇게 책으로 엮여져 나왔다. 쉽고 간결하게 사람들에게 전달해주었던 그것이, 이렇게 책으로 나오게 되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르겠다. 특히 나처럼 네이버에서 하는 모든 연재물들을 보지 않는 경우에는 정말 천우신조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순 우리나라 사람의 손으로 쓰여진 서양철학 이야기라니, 기분도 좋고 감회도 새롭다. 사실은 나는 철학이라는 학문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저 고등학교 때 입시를 준비하면서 한 번씩 들어봤던 인물들이 나열되어 나오는 것에 새롭고 신기할 뿐이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책으로 만난 철학가들은 어딘가 달랐다. 내게 생각할 것을, 진리를 찾을 것을 요구했다. 나는 단지 고등학생 때처럼 뭔가를 외우고 정리하는 것을 원했는데...
 
책을 읽고 서평을 남기는 작업을 한 지 만 3년이 조금 넘었다. 그 동안 나는 무턱대고 철학을 사랑했었다. 쌓아둔 책도 한 가득이고, 좋아하는 철학가나 저자와 저서도 생겼고, 책을 읽는다는 사람들마다 철학을 전파하려는 역사적 사명을 띠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철학책을 읽는다고 하더라도 철학적 사유는 전혀 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내가 끌렸던 철학책의 수준이 낮았던 것일 수도 있겠고, 역사적인 연대 순으로 철학가들을 나열만 해둔 책을 봤던 이유도 있겠다. 아니, 어쩌면 나만의 철학적 사유를 정립, 발전시키기에는 내가 너무 게으른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철학에 대한 열병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 짧은 시기에, 많은 경험을 했던 개인적인 이유로 철학 책만 보면 가슴이 뛰던 것이 옛일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아마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신만의 독서 기호를 정하는 데에 나는 그렇게 3년이란 시간이 걸렸나보다.
 
내가 철학 책을 손에 들 때는 왠지 내 지적 허영심을 만족시켜주기 위해서란 느낌을 가진 적이 잠시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확실히 그것이었다. 이렇게 어려운 것을 내가 읽고 있다는 것을 만방에 알리고 싶은 그런 나만의 자만심이 그렇게 표출되었다. 그래서 과거엔 좋아하는 분야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주저없이 ‘철학’이라고 했던 내가 지금은 잘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가 있기는 한 것인지를. 그저 내 침대 위에 나뒹구는 책들을 보면 확실히 철학은 아니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자기계발서 조금, 신앙서적 조금, 고전 조금, 인문학 조금, 과학 조금, 소설 조금, 에세이 조금.... 뭐, 그렇게 내 지평을 넓혀가는 중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도 도대체 과거의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난감했다. 정말로 내가 철학 책을 좋아하기나 했었던가 싶어서. 그 만큼 난해하고도 지리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 책이 읽기가 지리했던 것이 어쩌면 내가 다 알고 있는 철학가들만 등장했기 때문은 아닌가 싶기도 한다. 물론 여기 등장한 모든 철학가들의 사상을 하나라도 완벽히 소화해서 누군가에게 이야기해보라고 한다면 자신은 없지만, 솔직히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기에, 모르는 것이 나오면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나로선 조금 힘들지 않았나 싶다. 고대에서 몇몇 철학가를 제외하곤 중세와 근대 철학가는 다 아는 분들이시니. 만약 내 말을 이 책을 쓰신 저자들께서 들으신다면 얼마나 실소를 하실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솔직히 각 철학가들의 주요 물음과 그 해결책을 나열한 것으로서는 내 지적 호기심이 만족시켜지지가 않는다. 이제는 그런 것말고 그런 여러 물음들이 현대의 어떤 것과 맞물려 돌아가는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이제껏 철학의 바다에서 뛰놀았던 대가로 이들을 조금이나마 친근하게 느껴진 것이니, 이제껏의 시간이 아깝지는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솔직히 말해, 서양철학은 머리가 아프다. 현실적인 문제가 아닌 왠지 탁상공론만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사물의 변화를 부정한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론도 현실적으로 말이 되지 않지 않는가. 왜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역설을 고수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동양 사상에 등장하는 역설은 상당히 좋아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 되지 않는 말이 그 속의 의미를 들여다보면 깊은 내용, 세상을 관통하는 진리를 담고 있기에, 너무나 사랑한다. 그런데 서양철학은 조금 말을 위한 말만 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그다지 반갑지가 않다. 물론 그들도 이것이 현실과 위배되는 것을 아니까 의견의 길을 떠나 진리의 길로 가는 과정을 만들어, 존재론이란 한 분야를 창시했다고 하지만, 꼭 그렇게 힘들게 돌아와야 하는 것일까 의문이 든다. 지적 욕구란 어느 짧은 기간에만 발휘되는 것인지,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이론 공방은 어쩜 인간을 지치게 하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이와는 다르게 동양 사상은 하나도 지루하지가 않은데 말이다.
 
내가 여기서 인상깊게 봤던 철학자는 소크라테스에게 가리워져 서양 철학의 아버지란 자리를 놓친 프로타고라스이다. 솔직히 고대 철학자들은 대부분의 사상을 다 알고 있어도 그들의 이름 하나를 정확하게 외울 수가 없기에 이 프로타고라스도 이미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처음 들어본 것인지, 아니면 처음 뇌리에 박힌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철학의 관심을 자연 영역에서 인간 영역으로 이동시킨 소크라테스보다도 더 이전에 프로타고라스가 그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크라테스에 비해 그 이름이 가리워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 놀랍지 않은가! 소크라테스에 비해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그도 소크라테스처럼 덕에 대해 주장했고, 대화법의 달인이었다) 프로타고라스이지만 왜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졌을까.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그의 주장은 진리의 상대성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정해주고 그에 따라 실천하기를 주장하는 철학이란 학문에서 진리의 상대성이란 철학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기에 그의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솔직히 보통 사람들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 세 사람의 이름만이 그리스 철학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말이다. 아예 이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일 텐데 프로타고라스, 그의 이름을 기억해줄 이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나는 한동안 철학 책을 탐독하면서 진리의 상대성에 대한 유혹을 받았다. 내게 아직 옳고 그름이란 분별력이 없었을 때의 이야기인데, 포스트모더니즘이 딱히 내게 그런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 내 의견이 절대와 상대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이제는 진리는 무조건 절대적인 것을 인지하고 있으나 그 당시에는 내 개인적인 상황과 맞물려 이럴 땐 살인도 용납되어야 하지 않는가라든가, 이럴 땐 도둑질도 용서해줘야 한다든지 제 멋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영역에 철학의 초점을 맞춘 프로타고라스가 왜 맞지 않는지 이제는 확실히 안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그의 이름을 내 머리에 각인해둘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역량이 있어도 뚜렷한 기준이 없다면 안된다는 것을. 특히 옳고 그름에 대해 이야기하는 철학이란 영역에서는 그것이 아주 치명적이란 사실도 말이다.
 
철학의 숲을 거닐면서, 나는 과연 길을 찾았는가 묻고 싶다. 지금으로선 그 길을 오히려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인터넷에 연재되었던 글의 특색에 맞게 깔끔하고 알기 쉽게 정리해둔 것만큼은 좋은 평가를 해주고 싶다. 하지만 이 책의 후속 작업도 나와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과연 언제까지 수동적으로 누구의 어떤 사상만을 익혀야 하겠는가. 어떤 사상들이 있었는지, 어떤 시대에 어떤 질문을 던졌는지를 이제야 알았다면, 이제는 그것에 대해 능동적으로 답변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밥만 떠먹는 수동적인 역할이 아닌, 내가 현대 사회에서의 문제에 있어서 철학적 사유로 대응하는 능동성을 보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솔직히 궁금하다. 이 책의 제목은 『철학의 숲, 길을 묻다』인데, 왜 그 안에 서양 철학만 들어가 있는 것인지. 동양 철학도 충분히 길이 될 수 있는데 말이다. 아쉬운 것은 다음을 기약하며 이만 줄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