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훔치는 공간의 비밀 - 왜 그곳에만 가면 돈을 쓸까?
크리스티안 미쿤다 지음, 김해생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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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공간연출가는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이 책의 저자는 꼭 푸근해 보이는 옆집 아저씨 같아 보인다. 일본의 하이에크 센터로 미리 견학할 장소를 조사하면서 절만 받는다고 속을 욕할지 모르는 경호원 아저씨들 이야기할 때는 누구나 스스럼 없이 접근할 수 있는 사람으로도 느껴졌다. 물론 그런 부분은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머리가 허옇게 센 할아버지이시니까 내 말의 근거가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p.126 사진 참조). 하지만 이 책에 담겨 있는 내용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조금은 냉철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내준다. 인간의 행복감을 구성하는 감정의 요소로는 총 일곱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이는 영예(장엄함), 환희(희열), 파워(통쾌감), 탁월함(명석함), 열망(욕구), 황홀감(강렬한 인상), 여유(편안한 기분)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행복감을 구성하는 각각의 감정들이 부정적인 감정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행복감의 모태는 죄악이다!! 처음에는 이 말이 주는 효과가 너무 강렬해서 겁을 집어 먹었다. 역시 죄악이었어~!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 말이 가지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파악할 수가 있다. 인간이 해야 하는 것들 중에는 중용을 지켜야 하는 것이 많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이 지나치게 과해도 문제고, 지나치게 부족해도 문제인 것이기에 이 행복감도 예외는 아닌 것이다.

 

각각의 행복감을 구성하는 감정의 부정적인 근원을 보자면, 순서대로 오만, 탐식, 분노, 시기심, 탐욕, 음욕, 나태가 되겠다. 다른 것도 다 곰곰히 생각하면 이해가 될 만한 것이지만, 나는 특별히 ‘나태’를 보는 순간 마음이 뜨끔했다. 항상 여유를 가지고 싶다고 하면서, 떠올리는 장면은 카페에 앉아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넷북을 두드리는 모습인데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대학 때는 그럴 수 있는 카페가 근처에 없었고, 지금은 자기에도 바쁘기에 하기가 쉽지 않다. 또 솔직히 넷북이 좀이나 무겁나. 여유와 나태는 종이 한 장 차이임을 여실히 느끼며 여유를 가지려다가는 나태할 수도 있을 것이란 자각이 든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나태하기 때문에 굳이 시간을 할애해서 여유를 누릴 필요는 더욱 없겠다.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오만한 감정에서 영예가 등장하는 것은 고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장군들의 기상만 생각해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모든 것을 풍족하게 쓰는 데서 오는 감정이 희락이랑 상통한다는 것은 카니발 축제에서 흥청망청 쓸 때 느끼는 풍족함의 감정과 비슷하고, 또 분노란 감정을 품고 있으면 일반적인 힘 이상의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도 알만한, 상상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남이 가진 재능이나 환경에 대해서 시기하는 마음도 긍정적으로 변하면 탁월함에 대한 감탄으로 바뀌는 것이다. 고음을 자유자재로 낼 수 있는 소프라노 가수들을 볼 때처럼 도저히 질투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닌 실력자들을 보면 시기심이란 부정적인 감정이 파고들 수가 없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닌가. 그럴 땐 그저 감탄만 해줄 뿐이다.

 

열망은 탐욕에게서 등장했다는 것도 쉽게 이해가 된다. 라스베가스 호텔에 가면 음식이나 음료수가 무료인데 거기서는 먹을 것으로 유혹하고, 특별 세일을 할 때도 팔 물건을 높은 단 위에 올려서 사람들에게 갖고 싶다는 감정을 만들어준다. 모든 물건은 실제로 필요해서 사기도 하지만 요즘에는 그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갖고 싶어하는 물건을 내가 소유하고 싶어 사기도 한다. 그야말로 명품 효과가 바로 그것이지 않은가. 황홀감은 인간에게 겉표지와 속내용이 다른 충격을 주어서 새로운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아동 마네킹이 쓰고 있는 유명 상표의 모자에는 벌거벗은 여자와 해골이 그려져 있거나 진짜 호랑이 가죽 위에 신발을 전시해놓는 퇴폐적이고 음란한 것을 그렇지 않은 것과 같이 두어서 사람들에게 강렬한 효과를 주는 것이다. 뉴욕의 가장 문란한 나이트클럽은 과거 교회였던 장소를 빌려 연 곳이었다는 사실만 봐도 사람들은 상식을 깬 연출에 호감을 느끼게 마련인 것이다. 여유를 느끼고 싶다면 빈의 박물관 구역에 설치한 엔치스가 대표적일 것이다. 다리를 높이 올리고 누워 있을 수 있게 고안된 엔치스는 그 재질이 딱딱한데도 충분히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다리를 높이 올리는 것이 여유로움의 대표적인 자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공공장소에서도 발을 물에 넣고 쉴 수 있게 한다든가 다리를 위로 올려 긴장을 풀 수 있게 해주는 다양한 시설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이런 곳에서 돈을 요구한다고 할지라도 어느 누가 거부할 수가 있겠는가.

 

인간의 근원적인 죄악들을 면밀히 파고들어 교묘하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끌어내 행복감을 이루는 일곱 가지의 감정들은 인간이라면 절대로 포기하지 못하는 감정일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마케팅에도 이런 인지심리학 분야가 파고들어 인간의 호주머니를 어떻게 하면 쉽고 편안하게 털어낼 수 있을까 연구하게 된 것이 아닐까. 점점 지능적으로 접근하는 자본주의의 위력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고, 또한 내 안에 잠자고 있었던 여러 열망들이 표면으로 드러난 시간이기도 했다. 여기에 등장하는 몇몇 장소는 꼭 한 번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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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필요한 시간 -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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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대한 짧은 단상들을 모아놓은 이 책은, 다양한 철학책을 접하고 싶으나 철학이 난해해서 접근하기 어려워하거나 그럴 만큼의 시간이 없는 사람들에게 아주 좋은 책이다. 각각 꼭지마다 철학자와 그의 사상이나 저작들을 소개하며, 우리가 일상사에서 철학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들을 던져준다. 즐거움에 대해서, 고통에 대해서, 관계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우리 삶을 어떤 방법으로 혹은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깊게 사색할 수 있는 거리를 던져주는데, 이것이 바로 인문정신이 아닌가 한다. ‘인문정신’이라는 말을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별다르게 어려운 말은 아니었다. 자기 스스로 제 인생을 가꾸어나가는, 다르게 표현하면 ‘인간 승리’라고도 할 수 있는, 평소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항상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평소에 하는 그것을 철학책에서 멋들어지게 ‘인문정신’이라고 표현주고 있었다. 역시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어느 철학책의 서문에서, 철학을 접하지 않는 일반인들도 철학적 지식이 없을 뿐이지 철학적 사유를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 이 두 가지 종류의 말이 같은 맥락에 있지 않은가 한다.

 

독특한 관점과 단어로 설명해주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철학은 우리의 삶을 어떤 방법으로 풍요롭게 살아내느냐에 따른 방법을 탐구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 그래서 철학은 우리에게 다양한 관점에서의 인식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우리의 일상을 새롭게 환기시켜주는데 거기서 우리는 삶의 역경을 헤쳐나갈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내 아픔과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공감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그것이 바로 힘이 되고, 이제껏 살아온 내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빛도 없고 영광도 없지만, 정말 옳은 삶이고 바른 삶이라는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사람은 살면서 크고 작은 역경을 겪기 마련인데, 이 때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는지에 따라 사람들은 그 고통과 괴로움이 자양분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뿐만이 아니라 책도 마찬가지인 듯 싶다. 내 마음과 같은 파장을 가지고 있어 뭔가 울림을 주는 책을 만나면 그 고통의 시간이 마냥 고통이기만은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유리병 편지’도 이런 류의 한 가지일 테다.

 

문학에서는 우리가 이미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는 것을 새롭게 전달해주기 위해서, ‘낯설게 하기’를 시도한다. 시조이지만 기본적인 3장 6구 45자 내외의 형식을 파괴하여 자유시처럼 보이게 한다든지, 부정적인 인물을 찬양하고 긍정적인 인물을 비판하는 반어적인 풍자 기법을 쓰는 등의 사례가 그러한데, 이는 철학도 매한가지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광학이란 학문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을 근본적으로 낯설게 만들면서 출현했는데, 이것을 바슐라르는 ‘인식론적 단절’로 표현했다. 이런 단절에는 실제적이지 못한, 허구적이고 종교적인 세계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서 우리는 현실 가능한 세계만을 설정할 수 있다. 이런 단절 덕분에 인간에게는 동물과는 다르게 역사가 존재할 수 있었고, 역사는 역동적인 생성과 창조만을 존재해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역사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단초를 얻는데, 이것이 우리에게는 꼭 필요하다. 나와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그 능력으로 우리가 아닌 다른 관찰자가 되고, 그만큼 이전과는 다른 세계를 얻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나온 철학이 다 효용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전에 읽은 어떤 책에서 서양 사상에는 신이 존재하고, 동양 사상에는 신이 부재한다고 한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올해 들어 『도덕경』이나 『논어』를 간략하게 요약된 책을 읽기 전까지 내게 철학은 서양 철학뿐이었기에 동양 철학에 대해서는 깊게 숙고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말 덕분에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 즉 동양 사상의 큰 맥을 잡고 있는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에는 정말로 신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교는 극도의 수행을 통해 모든 번뇌를 벗어버릴 수 있는 해탈을 추구하고, 즉 인간 스스로 구원의 방법을 찾고, 유교는 철학이라기보단 도덕적인 체계를 세우는 사회를 다스리는 방법이고, 도교는 자연이 곧 신이라는 범신론을 주장해, 서양 철학처럼 특정한 신을 숭배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에 등장하는 “마음을 다한 후에 천명을 기다린다”는 맹자의 말에서 등장하는 ‘천명’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의미는 아니다. 인간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후에서야 모든 미련을 내려놓고 다가올 운명을 당당하게 기다린다는 의미로 쓰였는데, 참 어려운 말인 듯 싶다. 왜냐하면 누구나 알다시피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고 할지라도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할 수도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것을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솔직히 해도 안될 때도 있기 때문에 절망하는 것을, 동양 사상에서는 너무나 관념적으로만 설명해서 현실적으로 아무런 도움도 못 주고 있는 듯하다.

 

참고로, 이 책에서는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표현해냈다. 기독교 문화 안에는 실제로는 아니지만 외부에서는 꼭 우리 문화인 것처럼 보이는, 광신도 무리들이 있는데 그런 광신도 무리들을 딱 집어서 말하는 것은 아니여도 기독교라는 종교가 가지는 맹목적으로 보여지는 부분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는 듯 하다. 나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조금은 의아한 것이 그들이 과연 기독교를 제대로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솔직히 30년이 넘게 그 종교를 가지고 있었어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인 사람도 있는데, 기독교 문화로 보이는 부분에 대해서만 쓴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정수를 제대로 알까 의문이 드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독교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해서 제대로 안다면 그들이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단언하기 때문에 그런 의문을 드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인간의 철저한 무능력을 강조하고 있는 기독교 정신은 자신을 최대한 믿고 의지하여 앞으로 자신의 인생을 잘 개척해내자고 하는 인문정신은 전혀 상반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제 자신을 믿느냐, 아니면 모든 것을 초월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느냐의 문제인 것이니, 아마 철학에서는 기독교를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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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 운동하는 목사 최성규의 고집
최성규 지음 / 두란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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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인천순복음교회의 초대목사님으로, 세계 교회 중 20위 안에 드는 교회를 일구어낸 최성규 목사님의 지난 33년 목회활동을 엮어낸 책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열 살 때, 한국전쟁으로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를 잃고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최성규 목사님의 일생은 바로 우리의 근현대사와 그 맥을 같이 한다. 누구나 먹을 것이 없어 힘들었을 시기에 가족들을 먹어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뚝심있게 버텨온 그가 어떻게 자라왔는지, 어떤 시련을 감당했는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강권하여 목회의 길로 이끄셨는지가 자세히 정리되어 있어 최성규 목사님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더불어 우리 한국의 역사도 되돌아 볼 수 있는 좋은 책이였다. 읽고 나서 느낀 것은 민주화 운동을 비롯한 여러 위기 때마다 구국 기도회를 열정적으로 인도하셨던 그는 참된 하나님의 효자셨다는 것이다. 효자라... 성경에는 분명 부모에게 공경하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 책에 따르면, 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부모에게 순종했던 효자셨다. 하지만 이제까지 성경에 우리나라의 효 전통이 그렇게까지 강조되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나는 그것을 쉽게 간과해버렸다. 성경에,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막 7:11)라는 말씀이 있지 않은가. 딱 내 행동이 그랬다. 특히 조울증이 의심될 수 있을 정도로 꼭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더라도 내 기분이 그리 내키지 않으면 부모님께 제대로 말도 하기 싫어하고, 내 기분이 좋으면 금방 변해서 헤헤거리고. 그래서 이 책이 나에게는 필요하면서도 조금은 불편한 책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희망이 있는 것은, 하나님은 구하는 자를 멸시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면서 어머님께서 항상 강조하셨던 그 말씀, “호레자식은 되지 말아라.”를 지키기 위해 잘못을 하지 않아도 동네 어른들이 혼내시면 끝까지 남아 그 소리를 다 듣고 나오기도 했고, 열 살의 어린 나이에 학교에 못 가더라도 집안 식구들의 먹을 것은 챙기기 위해 가마니를 짜서 밤새 걸어 장에 내다가 팔기도 했고, 13년 동안 월급 하나 받지 못해도 묵묵히 화장품 공장에서 모든 것을 맡아 일하기도 했던 그는 인간적으로만 봤을 때도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후에,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감당하게 할 사역을 위해 미리 연단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른을 공경하고 부모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뚝심있게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가장 힘들었던 일은 결혼하면 집 사주고 공부시켜 준다는 말만 믿고 13년 동안 월급 하나 못 받고 일을 했던 것일 것이다. 고등학교도 못 나올 그를 하나님의 섭리로 아는 친구의 형을 따라 서울로 나와 무허가 화장품 공장의 전반적인 일을 맡아 운영하는 일을 했는데, 사장님이 불미스런 일이 있을 때마다 가까이에서 성심성의껏 일을 한 그를 믿어주지 않았던 것도 억울하고 통탄할 일이었다. 아마도 나라면, 아니 그냥 보통 사람이었어도 모두 바로 도망갔을 것이다. 당연한 불평과 불만을 내비칠 수 있는 일을 당했을지라도 그 안에서 묵묵히 참고 견디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잊어버리지 않으시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교회 안에서는 언제나 좋은 얼굴과 좋은 말로써만 사람들을 대하고 온다. 그런데 한 주간 동안에 일터에서의 나는 과연 어떤가. 당연한 내 주장과 권리를 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참고 견디고 있는가 말이다. 과거의 나는 결단코 그렇지 못했다고 단언한다.

 

월급이 밀려서 당연한 내 목소리를 낼 때도, 갑자기 근무 요건이 나빠질 때도 나는 내 자리에서 인내하지 못했다. 뒤에서 뒷공론을 조장하고 불평과 불만을 내기에 바빴던 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을 자행했다. 그것도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는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과거에 저질렀던 수많은 악행들을 낱낱이 보여주셨다. 아직은 완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조금씩 내게 보여주신 그 부분을 고쳐나가고 있다. 십자가의 감흥이 없는 것은 십자가가 부족하거나 완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죄인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내가 아는 그 복음이 완전하지 않아서 내게 복음의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복음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믿는 그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심을 이제는 알겠다. 이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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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 관한 불변의 진리 - 조쉬 맥도웰의
조쉬 맥도웰 & 션 맥도웰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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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590페이지나 되는 책이라 이 책을 선택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말씀에 열정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어려움이 없겠으나 신앙서적을 잘 읽지 않는 분들에게는 좀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의 어려움만 지나온다면 축복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책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절대 눈을 뗄 수가 없다. 제목도 그렇고, 두께도 그렇고, 이런 책들은 왠지 좀 딱딱한 느낌을 준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내 기우일 뿐이었다. 책의 처음부터가 느낌이 새로웠는데, 실제 사례가 우리 한가운데 던져져 그 저자들의 사례에서 내 경험과 관심사를 투영해볼 수가 있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잘 소개해도 그가 느낀 것을 완전히 다 경험할 수는 없지만, 그 상황에서 어떤 경험을 했을 것인지 추측도 가능해서 그것에서부터 내 경험을 추적해 들어갈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이렇게 잔잔하게 설명하니까 그냥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으나 정말로 깜짝 놀랄 만큼 재미있다. 내가 책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저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재미있을만큼 재미있다. 그래서 감사했고, 놀라웠다. 하나님에 관한 절대 변할 수 없는 진리에 대해서 꼭 알아야 하지만, 제대로 알지 못했던 한 사람으로서 정말 감사드린다. 여러 날을 두고 읽었는데, 읽으면서 감사와 경배를 드리기도 했고, 슬피 울며 가슴 아파하기도 했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기도 했던 아주 귀중한 체험을 준 책이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어떤 것에 대해서 새롭고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하셨고, 그것을 나눌 수 있는 기쁨까지도 허락해주셨다. 그 중 가장 최근 나눈 것은 예수님에 대해 설명한 부분에 대해 교회 소모임에 모이는 사람들에게 전달해준 것이다. 예수님이 도덕선생님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도표로 설명해주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가 참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위선자이거나 정신병자가 될 수 밖에 없다고 하셨다. 자신이 하나님이 아님을 모를 경우와 알 경우로도 또 나눠서 어떻게 되는지 그 추이를 설명해주셨는데, 모태신앙인 나로서는 당연히 예수님이 우리 구주이심이 의심되는 것이 의아해서 새롭게 보였던 부분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고, 눈먼 자를 뜨게 하고, 병을 낫게 하는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이 사실이라면 내 인생이 변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성경이 신화이거나 전설, 도덕적인 가르침으로 치부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실상 내가 말로는 아니라고 하면서 행동은 그랬다. 정말로 우리는 그가 참 하나님인지, 아닌지를 ‘선택’해야 한다.

 

오늘 나는 어려운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 때문에 이 책의 서평이 안 써질 만큼 내게는 좀 어려운 소리였다. 내가 지금 보여주고 있는 열정이 사실은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고, 나누고 싶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다독여주고 싶다고 내심 생각했다고 속내를 드러낸 자리에서 누군가 이렇게 말해주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많이 성장한 것은 좋은 일이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열정이 인간의 힘으로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봐야 해요. 그것이 하나님께로 향한 열정이라면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에게로 전해져서 말을 하지 않아도 하고 싶어했던 것들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거에요.”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이 제자훈련반에서 하셨던 목사님의 말씀을 인용할 때 그 말에 덧대어서 내게 충고해준 말이었다. 목사님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냉철하게 지식적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하셨다고 했다. 아...!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심정이 어땠을까. 나는 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아팠고 마음이 상했다. 아픈 것은 나중이었고, 먼저는 속이 많이 상했다. 솔직히 내가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내가 제일 잘 안다. 다른 사람들이 날 열정적으로 봤을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그것의 반의 반도 안되는 열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말을, 그 아픈 말을 듣기 전까지는 나는 알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번에 교회소모임의 장을 뽑는 자리에서 운좋게 붙었다는 것을 앞에 두고 마음이 많이 떨리고, 어마어마한 자리라는 깨달음이 오고부터는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한편으로는 이만하면 됐지~ 하는 생각으로 안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내가 아픈 소리를 해준 사람은, 아마도 이런 내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나는 그에게 자존심이 상해버린 것이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을 다 감당하고 싶다고 아무리 입으로만 중얼거려봤자 사실 나는 인간의 열정으로만 움직였던 것이다. 앞으로도 이렇게 하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진 기분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믿었던 예수님은 예수님이 아닌가. 내가 믿었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닌가.

 

조금씩 진리에 대해서 알아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인간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교만하고 가증스러운 존재라는 것이다. 다른 누구를 들 것도 없이 바로 내가 그렇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실은 나를 의지했던 것이 분명하다. 사실 저번주 내내 밤낮이 바뀌었다. 남들 일어날 때 잠을 자고 남들 잘 때 할 것이 있다고 밤새 깨어있었으니 얼마나 몸이 망가졌겠는가.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을 마치 내 것처럼 사용하고 있었으니, 정말로는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였던 것이다. 아마도, 오늘 교회에서 그런 아픈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나는 또 그런 식으로 대충 살아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오늘의 이 서평 속에서도 감사로 가득한 하나님의 은헤에 대해서만 썼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내 인생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고 나를 사랑하신다. 만약 나를 사랑하시지 않으셨다면 이렇게 내 인생에 나타나셔서 쓴소리를 하실 필요가 없으니까. 내가 지금 얼마나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지,어떤 봉사를 하고 어떤 직책을 맡아서가 아니라, 오로지 나를 사랑하시기에, 있는 그대로의 내 못난 모습까지도 다 사랑하시기에 내게 개입해주신 것으로 믿는다. 가끔씩은 내가 직책을 맡았기에 기도해야 하고, 말씀봐야 하고, 좀 더 신앙의 성숙된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깨우칠 때가 있었는데, 정말 주객이 전도된 이야기라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내가 목장모임의 리더가 되었기에 하나님께서 날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저 내가 하나님과 관계를 잘 맺길 바라는 마음이신 것이었음을 이 서평을 쓰면서야 겨우 깨달았다. 집에 돌아오고도 마음이 편치 않아서 이 서평이 도저히 써지지를 않았기에 포기를 하려고 했는데, 쓴소리라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신 듯 하다. 책에 보면 조쉬가 아들 션이 야구 게임에서 질 때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 쿠폰을 주라고 코치에게 맡긴 부분이 나온다. 게임이 질 때라도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보여주었던 조쉬의 사랑에 무한한 놀라움을 느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하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신이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인간의 탈을 쓰고 이 땅에 오신 구속의 사건은 전무후무한 센세이션이 아닌가.

 

내가 아는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놀라운 진리를 정말 재미있게 정리해준 이 책은, 모태신앙이었지만 하나님을 특별히 만나지 못해 성경의 이야기가 왠지 아마득한 옛날이야기일 것만 같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나는 모태신앙이었고, 사람들이 ‘첫사랑을 회복해야 한다’고 할 때의 ‘첫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나는 절대 갈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단기 선교를 통해 하나님을 조금 경험했고, 조금씩 하나님의 사람으로 회복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여전히 죄의 문제에서 떠나가지 못하고 힘들어하지만, 매순간 하나님을 망각해버리는 오만한 짓을 버리고, 순간적으로 마음에 욱할 때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완전히는 못하고 있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나는, 학습의 마음가짐이 되어 있지 않고 수업 시간에 장난하는 아이들에 대해 항상 어렵다. 예전에는 그냥 버럭 소리를 지르거나 내 마음에서도 그 아이들을 포기해버리기 일쑤였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를 만들어가실 방법이 그 아이들을 섬기는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와닿아 어려워진 것이다. 예전에도 쉽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그 쪽에서 나를 힘들게 하면, 나도 같이 힘들게 하거나 무시해버리면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아니까 마음이 너무 어려운 것이다. 가끔 버럭대기도 하고, 내 마음 안에서 그 아이에게 ‘넌 아냐’라고 선을 긋기도 하는 나를 볼 때마다, 하나님은 얼마나 안타까워하셨을까. 이제 근본부터 되돌아봐야겠다. 신앙서적도 좋고, 말씀도 좋고, 설교도 좋은데 아마도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기도가 아닐까 싶다. 내 스스로가 하나님을 안다고 더 이상 만나지 않아도 된다고 주춤거리는 것을 느낀다. 직책도 벗어버리고 어떤 좋은 말씀이든 서적이든 다 벗어버리고 하나님만, 오로지 하나님만 생각해야겠다.

 

이 책은 총 12가지의 불변의 진리를 소개하고 있다. 꼭 순서대로 볼 필요는 없는 내용이라고 하지만, 처음에는 순서대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나서 몇 번 더 반복해서 보라고 하시니까 그 시기에 맞게, 보고 싶은 대로, 아니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대로 보면 좋겠다. 내가 감격했던 부분은 아무래도 [불변의 진리 첫번 째 하나님은 존재하신다]에서 (마지막 장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사는 삶)이었다. 어릴 적 배우자를 생각할 때 내심 원했던 것이 있었다. 어떤 외적인 조건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내 아픔, 슬픔, 치부 등을 모두 이해해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사람에게 보여진 것과 보여지지 않은 것의 차이가 너무나 크다는 것을 아는 나로서는, 특히 어릴 적 소심했다가 극적으로 변한 성격을 가진 나로서는 아직까지도 소심한 구석이 꽤 있었다. 그렇기에 겉으로 보여지지 않는 상처를 배우자만큼은 이해해주길 기대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 고릿적에 했던 공상을 다시금 끄집어낸 이유는  (마지막 장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사는 삶)을 볼 때 딱 그 공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인간이 신이길 기대했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아픔과 상처를 완전히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결단코 없다. 그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외쳤어야 했는데 그 당시, 스무 살 때는 그것을 몰랐다. 그러다 그 공상을 잊고 있다가 이제금 다시 생각이 난다. 진실로 이 부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내가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모른다면, 어찌 죄 많은 몸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을까. 예전에 내가 방황했던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나를 자격이 없다고 배제해버렸다. 내가 경험한 신앙 문화에서는 살아있는 능력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실제로 그런 하나님을 소망하지도 않았고, 그저 말씀생활, 기도생활, 전도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해 정죄하기에 바빴다. 결단코 행위로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지도 까맣게도 모르고서... 그랬으니 내가 이 부분에 대해서 왜 감격하는지를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인간이 무능력하다는 것을 인정하길 원하는 종교는, 아마도 기독교 외에는 없을 것이다. 제 힘으로도, 노력으로도, 열심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가르치는 종교는 결단코 하나다. 그래서 우리는 무능력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무능력함을 즐기고 하나님께 의지하려는 마음만 가지면 된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아프면 울고, 힘들면 울고, 어려워도 울고, 그저 하나님께만 나아가면 되지 않을까. 아프다고, 힘들다고, 어렵다고 내가 다른 방법을 사용하려고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다른 방법을 사용하거나, 그 자리에서 부정과 불평으로 도배를 하거나 험담을 한다고 해도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하자. 그저 우리를 하나님께 어울리는 형상으로 재창조하시는 과정 중에 처하게 하신 것이라고 믿고 맡기자. 실제로 내게 그런 시련이 왔을 때, 이 말씀이 기억났으면 좋겠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내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쓴소리를 했던 사람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생각난다.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기대되는 사람이에요.”  희망이 생겨보이는가. 아까 마음이 상할 때는 왜 이 말이 기억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깨달음은,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시험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솔직히 인정하니까 내가 했던 행동들이 보였다. 내가 다른 사람 앞에서 직책을 앞세우려고 했던 모습, 다른 사람들 앞에서 칭찬받고 싶어했던 모습,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며 자만했던 모습... 아이고, 부끄럽다. 더 많겠지만, 이만 줄이겠다.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은 오늘 바로 그 시간에 그 말씀이 꼭 해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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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하다 죽으리
이수광 지음 / 창해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이수광

 

1954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다. 1983년 <중앙일보>에 「바람이여 넋이여」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제14회 삼성문학상 소설 부문, 미스터리클럽 제2회 독자상, 제10회 한국추리문학 대상을 수상했다. 이수광은 오랫동안 조선시대 살인사건 기록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왔으며, 냄새가 물씬 풍기는 생생한 역사서를 집필해왔다. 지금은 수 년 안에 한국뿐만 아니라 영미권 독자들을 사로잡을 작품을 쓰고 싶은 꿈을 갖고 있다.

오랫동안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고 수많은 인터뷰를 하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역사의 지혜를 책으로 보여주는 저술가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 팩션형 역사서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 베스트셀러 작가. 특히 추리소설과 역사서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글쓰기와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대중 역사서를 창조해왔다. 1983년 「중앙일보」에 단편 「바람이여 넋이여」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저 문 밖에 어둠이』로 제14회 삼성미술문화재단 도의문화저작상 소설 부문, 『우국의 눈』으로 제2회 미스터리클럽 독자상, 『사자의 얼굴』로 제10회 한국추리문학 대상을 수상했다.

지금까지 단편에『바람이여 넋이여』,『어떤 얼굴』,『그 밤은 길었다』,『버섯구름』 外 다수가 있고, 장편에『나는 조선의 국모다』,『유유한 푸른 하늘아』,『초원의 제국』,『소설 미아리』,『떠돌이 살인마 해리』,『천년의 향기』,『신의 이제마』,『고려무인시대』,『춘추전국시대』,『신의 편작』,『왕의 여자 개시』,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연애사건』,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 등 다수의 저작을 발표했다.



 

 

조선 시대의 사대부와 기생의 만남을 과연 우리는 사랑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 사대부의 눈으로도 허난설헌과 춘추전국시대을 뒤흔들었던 미모와 재능을 겸비했던 위강을 능가하는 실력을 지녔다고 호언할 수 있음에도 천한 신분 덕에 박복하게 살아야 하는 기생의 절개를 과연 절개로 봐주기나 할까. 여기 피 비린내 나는 조선 시대에 출중한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오랜 시간 유배만 당했던 선비 김려와 천하일색에 명문을 가진 기녀 연화가 만났다. 하루라도 이틀이라도 비겨서 지나갔더라면 평생을 못 보고도 지나칠 수 있는 그런 만남이었는데, 과연 운명이라 이름지어도 될까. 변방에서 태어나 평생 한 번이나 한양에 갈까 말까하는 연화는 부령에 부임했던 목사를 따라 첩실이 되기 위해 한양에 갔다가 우연히 김려를 만나고, 관노를 첩실로 데려온 죄를 물어 그 목사는 잡혀들어간 상태에 연화는 이 김려에게 사랑을 느껴버렸다. 그 길로 같이 살림을 차린 둘은 짧은 시간을 행복은 느꼈지만 그 후로 16년이나 강제로 이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 기나긴 시간을 떨어져 있으면서 절개를 지킨 연화는, 그가 부령 땅에 올 수 있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십대에 만나 사랑을 하고 이제 16년 만에 유배지로 부령에 온 김려를 만난 연화는 4년간 행복했다. 그와의 행복을 오래 누리고 싶으나, 그를 사랑하기에 그가 빨리 누명을 벗기를 기도하는 연화는 그저 기생이 아니라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열부와도 다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사랑에는 항상 시련이 있는 법이다. 처음에는 둘의 깊은 사랑을 시기한 친구 간의 작은 질투심에 비롯된 일이었지만, 그것이 점점 더 커져서 목숨까지도 위협하는 시련이 찾아온다. 김려를 사랑하기에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는 연화.... 과연 연화는 행복했을까? 어릴 때는 일,이 년 정도 같이 살았을까, 진정으로 사랑을 했던 것은 부령으로 유배를 와 4년 정도 같이 지낸 기간 뿐이었다. 5년 정도 꿈결같은 행복을 누리며 살았던 것을 대가로 22년을 그리워하기만 했던 그들에게 과연 사랑은 아름답기만 했을까. 선비로서 급제를 하지도 못하고 친구의 모함으로 인해 귀양을 가게 된 김려의 경우는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입신양명하지 못해 괴로웠을 인생에 한 줄기 빛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연화에게는 이리저리 남자들에게 시달리며 한 떨기 꽃 같이 아리따운 인생을 다 져버릴 인생을 김려가 있어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결국 사랑은, 짦은 사랑일지라도 현실의 모진 박해와 어려움을 이기는 한 가닥 희망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애가 끓고 절절한 사랑이 있었기에 그네들의 퍽퍽한 삶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는지도 모르겠다. 사대부 집안의 여자로 태어났어도 대단한 실력과 무예를 가져봤자 제 뜻을 펴지도 못하고 스러졌을 인생인데, 기생으로 태어난 것을 보면 얼마나 박복하냐. 하지만 지금 연화에게 물어보면 자신이 기생이어서 김려를 만나게 될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한다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조선 시대는 여자로 태어난 것 자체가 그리 행복한 요소가 아닐진대, 무어 그리 서러운 것이 있겠나. 또한 조선 시대에는 선비로 태어난다 할지라도 썩 좋은 일은 되지 못한다. 벗에게 배신당하며 이리 저리 사화에 연루되어 하지도 않은 죄를 지었다며 모진 고초를 당해야 하는 그런 인생이라면, 아예 노비로 태어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그에게는 글이 있고, 시가 있으니 한평생 한스러워도 그 한을 풀어낼 수 있어 좋았다. 만약 무지렁이였다면 또 얼마나 답답했겠나.

 

이 모든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일이라 더욱 놀라움을 안겨준다. 과연 정말로 사대부 집안의 선비가 기생을 보고 극찬을 아끼지 않고 그녀를 절절히 사랑해다니~. 놀라울 뿐이다. 허난설헌보다도 낫고 위강보다 능하다고 평했던 연화의 글이 한 조각이라도 남지 않았던 것이 무척 아쉽지만, 아마도 하늘은 천재를 잘 보여주지 않고 싶으셨나 보다. 예전에 이런 비슷한 사랑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이 책은 실제 조선 선비인 김려의 실화를 각색한 것이지만, 전에 봤던 『능소화』는 무덤에서 발견된 아내의 편지에서 모티브를 따와서 각색한 것이라 실제 사건과는 전혀 다를 수도 있었던 이야기이지만 그 감동은 이 소설 못지 않았다. 어쨌든 두 소설을 보니, 몇백 년 전의 여자들은 어떤 신분으로 태어났건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미약한 존재임이 확실히 알겠다. 정말 그런 이야기를 접하고 있으면 정말 안타깝고 한스럽다. 신분이 뭔데, 여자라는 조건이 뭔데, 끔찍하지는 하지만 그녀들에게 이렇게 절절한 사랑이라도 남아있다니 한편으론 다행스럽기도 하다. 어쩌면 다른 이들은 가슴이 절절하다는 느낌조차 받지 못하고 평생을 살다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것이니까 말이다. 그나마 자신의 뜻을 알아주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상대를 찾았던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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