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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필요한 시간 -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2월
평점 :
철학에 대한 짧은 단상들을 모아놓은 이 책은, 다양한 철학책을 접하고 싶으나 철학이 난해해서 접근하기 어려워하거나 그럴 만큼의 시간이 없는 사람들에게 아주 좋은 책이다. 각각 꼭지마다 철학자와 그의 사상이나 저작들을 소개하며, 우리가 일상사에서 철학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들을 던져준다. 즐거움에 대해서, 고통에 대해서, 관계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우리 삶을 어떤 방법으로 혹은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깊게 사색할 수 있는 거리를 던져주는데, 이것이 바로 인문정신이 아닌가 한다. ‘인문정신’이라는 말을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별다르게 어려운 말은 아니었다. 자기 스스로 제 인생을 가꾸어나가는, 다르게 표현하면 ‘인간 승리’라고도 할 수 있는, 평소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항상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평소에 하는 그것을 철학책에서 멋들어지게 ‘인문정신’이라고 표현주고 있었다. 역시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어느 철학책의 서문에서, 철학을 접하지 않는 일반인들도 철학적 지식이 없을 뿐이지 철학적 사유를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 이 두 가지 종류의 말이 같은 맥락에 있지 않은가 한다.
독특한 관점과 단어로 설명해주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철학은 우리의 삶을 어떤 방법으로 풍요롭게 살아내느냐에 따른 방법을 탐구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 그래서 철학은 우리에게 다양한 관점에서의 인식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우리의 일상을 새롭게 환기시켜주는데 거기서 우리는 삶의 역경을 헤쳐나갈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내 아픔과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공감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그것이 바로 힘이 되고, 이제껏 살아온 내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빛도 없고 영광도 없지만, 정말 옳은 삶이고 바른 삶이라는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사람은 살면서 크고 작은 역경을 겪기 마련인데, 이 때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는지에 따라 사람들은 그 고통과 괴로움이 자양분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뿐만이 아니라 책도 마찬가지인 듯 싶다. 내 마음과 같은 파장을 가지고 있어 뭔가 울림을 주는 책을 만나면 그 고통의 시간이 마냥 고통이기만은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유리병 편지’도 이런 류의 한 가지일 테다.
문학에서는 우리가 이미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는 것을 새롭게 전달해주기 위해서, ‘낯설게 하기’를 시도한다. 시조이지만 기본적인 3장 6구 45자 내외의 형식을 파괴하여 자유시처럼 보이게 한다든지, 부정적인 인물을 찬양하고 긍정적인 인물을 비판하는 반어적인 풍자 기법을 쓰는 등의 사례가 그러한데, 이는 철학도 매한가지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광학이란 학문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을 근본적으로 낯설게 만들면서 출현했는데, 이것을 바슐라르는 ‘인식론적 단절’로 표현했다. 이런 단절에는 실제적이지 못한, 허구적이고 종교적인 세계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서 우리는 현실 가능한 세계만을 설정할 수 있다. 이런 단절 덕분에 인간에게는 동물과는 다르게 역사가 존재할 수 있었고, 역사는 역동적인 생성과 창조만을 존재해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역사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단초를 얻는데, 이것이 우리에게는 꼭 필요하다. 나와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그 능력으로 우리가 아닌 다른 관찰자가 되고, 그만큼 이전과는 다른 세계를 얻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나온 철학이 다 효용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전에 읽은 어떤 책에서 서양 사상에는 신이 존재하고, 동양 사상에는 신이 부재한다고 한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올해 들어 『도덕경』이나 『논어』를 간략하게 요약된 책을 읽기 전까지 내게 철학은 서양 철학뿐이었기에 동양 철학에 대해서는 깊게 숙고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말 덕분에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 즉 동양 사상의 큰 맥을 잡고 있는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에는 정말로 신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교는 극도의 수행을 통해 모든 번뇌를 벗어버릴 수 있는 해탈을 추구하고, 즉 인간 스스로 구원의 방법을 찾고, 유교는 철학이라기보단 도덕적인 체계를 세우는 사회를 다스리는 방법이고, 도교는 자연이 곧 신이라는 범신론을 주장해, 서양 철학처럼 특정한 신을 숭배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에 등장하는 “마음을 다한 후에 천명을 기다린다”는 맹자의 말에서 등장하는 ‘천명’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의미는 아니다. 인간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후에서야 모든 미련을 내려놓고 다가올 운명을 당당하게 기다린다는 의미로 쓰였는데, 참 어려운 말인 듯 싶다. 왜냐하면 누구나 알다시피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고 할지라도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할 수도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것을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솔직히 해도 안될 때도 있기 때문에 절망하는 것을, 동양 사상에서는 너무나 관념적으로만 설명해서 현실적으로 아무런 도움도 못 주고 있는 듯하다.
참고로, 이 책에서는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표현해냈다. 기독교 문화 안에는 실제로는 아니지만 외부에서는 꼭 우리 문화인 것처럼 보이는, 광신도 무리들이 있는데 그런 광신도 무리들을 딱 집어서 말하는 것은 아니여도 기독교라는 종교가 가지는 맹목적으로 보여지는 부분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는 듯 하다. 나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조금은 의아한 것이 그들이 과연 기독교를 제대로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솔직히 30년이 넘게 그 종교를 가지고 있었어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인 사람도 있는데, 기독교 문화로 보이는 부분에 대해서만 쓴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정수를 제대로 알까 의문이 드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독교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해서 제대로 안다면 그들이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단언하기 때문에 그런 의문을 드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인간의 철저한 무능력을 강조하고 있는 기독교 정신은 자신을 최대한 믿고 의지하여 앞으로 자신의 인생을 잘 개척해내자고 하는 인문정신은 전혀 상반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제 자신을 믿느냐, 아니면 모든 것을 초월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느냐의 문제인 것이니, 아마 철학에서는 기독교를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어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