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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이 말을 걸다 - 밥상에서 건져 올린 맛있는 인생찬가
권순이 지음 / 상상공방(동양문고) / 2008년 3월
평점 :
음식을 좋아하는 한문 선생님인 그녀는 내가 부러워할 만큼 요리를 잘 하지만 글도 너무나 맛깔스럽게 쓴다. 반짝이는 표지의 이 책을 열어보았을 때부터 감탄사가 떠나지 않았다. 너무나 예쁜 표지에 한 번 놀라고 너무나 맛나게 쓰는 우리말 표현에 놀라고 (서평을 쓰는 내 입장에서는 너무나 부러운 일 수 밖에^^;) 그리고 너무나 정성들여 만드는 그녀의 요리 방식에 놀랐다. 여기에 그녀의 놀라운 글솜씨를 한 번 인용해보았다.
가끔씩 배가 출출하고 입이 궁금할 때, 햇살이 투명하고 초록이 눈부실 때,
마음이 헛헛하고 쓸쓸할 때, 엄마의 김밥이 생각납니다.
그 김밥을 입에 넣으면 고슬하고 야드레한 밥의 느낌이 혀에 전해졌습니다.
속에 넣은 재료들과 알맞게 간이 밴 밥이
조화를 이뤄 쫀득쫀득 탄력이 느껴지면서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너무 좋았어요. - p. 32
정말 날이 맑으면 햇살이 투명하고 초록이 눈부시지만 그렇게 표현할 글재주라곤 눈꼽만치도 없는 나에게 이 책은 너무 신선하게 다가왔다. 맛의 형용은 또 어떤가. 고슬하고 야드레한 밥의 느낌이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 내 입안에서 느껴지는 듯 황홀하다. 역시 글쓰기는 하늘에서 내려준 능력이 틀림없는 것 같다. 무미건조하고 담담한 나로서는 그런 황홀한 표현은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못할 테니. ^^;
작가는 이 책에서 어머니께서 해주셨던 음식이야기과 자신이 살아오면서 만들어낸 음식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인생과 사랑, 추억, 아픔, 고통에 대해 말한다. 그 중 “무” 예찬이 가장 인상깊었다. 평소 무에 대해서는 특별히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특히 먹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나는, 무가 깍두기일 때, 각종 찌개에 넣었을 때가 가장 맛있다는 것쯤은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생존은 본능이니까. ㅋㅋㅋ 그런데 그는 그런 맛있는 “무”에 대해서 좀더 깊게 생각했다.
이 무라는 것이 된장찌개에 들어가면 된장찌개 맛이 배고
고기찜에 들어가면 고기 찜 맛이 배고 생선찜에 들어가면 생선찜 맛이 배서
그럴 수 없이 맛있는 음식이 되더군요.
그렇게 자기 색이 없는 듯하면서 다른 어떤 것과도 잘 어울리는 무의 성질이 참 배울 만하지 싶습니다.
가끔 직장에서 이런 무 같은 벗들을 만납니다.
처음엔 곁에 있는지조차 느껴지지 않지만 안개비처럼 소리 없이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더니
어느새 마음속에 커다란 자리를 차지한 벗들,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천천히 아름답게 할 테지요. - p.106
정말 인생은 오래도록 살아야 맛이 나는 것 같다. 이런 멋들어진 글을, 생각을 할 줄 아는 작가도 이런 생각을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낸 것은 아닐 테니까. 평범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내고 그 안에서 있었던 작은 기쁨, 작은 소망, 작은 깨달음을 오랜 시간 갈무리한 다음에야 이렇게 주옥같은 명구절들을 생각해낼 수 있었던 것일 테니까 말이다.
나도 작년 어느 순간에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 딱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작은 내 행동이 일파만파로 확산되는 것이 두려워서 ^^; - 하루하루 사는 것이 조심스러워서 자다가 말고 울다가 머리를 쥐어박다가 했던 적이 있었다. 거의 매일같이 그렇게 하고 나니까 나 자신에 대한 모든 포장이 벗겨지고 그 안에 있던 실체를 볼 수 있었다. 자기는 그리 뛰어나지도 완벽하지도 않으면서도 남은 뛰어나고 완벽하길 바라는 오만덩어리에, 기분에 따라 사람들의 기분을 들었다 놨다 하는 괴팍한 성격에, 툭툭 내뱉는 말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내는 것은 예사이면서도 자기는 솔직하다고 음흉스럽지 않다고 말하는 뻔뻔함까지!!! 그 모든 것을 두루 갖춘 나는 모든 위선이 모두 벗겨진 날, 도저히 구제받을 길이 없어 보였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내가 능력없다고 무시했던 사람들, 너무 조용해서 존재감조차 없어 보이는 사람들, 자기 의견조차 똑바로 말하지 못하는 그 사람들이, 사실은 오히려 더 능력있고 더 존재감 있고 더 똑똑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깨달았다. 뛰어나고 대단한 인물이 되는 것만이 성공한 인생이 아니라 자기 일에 성실하게 하면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성공한 인생이라고.
이 책의 제목인 <음식이 말을 걸다>는 정말 철학적인 제목이다. 음식이 작가에게 말을 걸 정도가 되려면 얼마나 음식과 동고동락을 했었을까. 그것을 생각해보면 인생은 살아간 만큼 얻고 깨닫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내가 깨달았던 인생의 의미도 사실은 내가 열심히 살아왔기에 그나마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런지. 그럴 거라고 믿고 그렇게 생각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