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슬픈 것은, 애정이며 여타의 감정이 카나리아처럼 새장 밖으로 날아가버렸다는 사실이었다. 그들만의 작은 세계에남아 있던 부모와 자식 간의 따사로운 정마저 자취를 감추면서 각자자신만의 구석에서 웅크린 채 오들오들 떨어야 했다. 바짝 날이 선 쿠포와 제르베스, 나나 세 사람은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증오가 가득한눈빛으로 서로를 삼켜버릴 듯 악다구니를 했다. 무언가가 부러져버린것 같았다. 행복한 사람들의 심장을 다 같이 뛰게 만드는 기계 장치같은 가족의 근본적인 원동력이 망가져버렸던 것이다. - P155
세탁부 여인은 장의사 일꾼인 바주즈 영감과 이웃한 데서도 많은고통을 받았다. 그들의 방은 아주 얄팍한 벽으로 나뉘어 있을 뿐이었다. 그가 입에 손가락을 넣기만 해도 그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저녁에 그가 돌아오면 제르베즈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좆았다. 그가 서랍장 위에 검정 가죽 모자를 내던질 때면 흙을 한 삽 퍼올릴 때 나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벽에 걸린 검정 외투가 벽을 스칠 때면 밤의 새가 날갯짓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 한가운데에 내팽개쳐진 검정 옷은 방 전체에 초상의 기운을 가득 뿜어냈다. - P157
작업장에는나나처럼 아직 처녀인 계집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퇴폐적인 분위기가 가득했다. 난봉기가 충만한 여직공들은 제대로 묶지도않은 흐트러진 머리와, 입은 그대로 잠을 잔 것처럼 마구 구겨진 드레스 자락에 싸구려 댄스홀과 불경한 밤의 냄새를 담아 고스란히 작업장으로 옮겨왔다. - P208
그가 바느질 도구상과 지물포, 모자 가게 여주인을 차례로 섭렵한다고 해도 그다지 놀랄 게 없었다. 그는 그 모두를집어삼키고도 남을 만큼 아가리가 큰 남자였기 때문이다. - P228
몹시 우쭐해진 랑티에가 몸을 뒤로 젖히면서 쭉 뻗는 바람에 비르지니의 몸 위로거의 눕다시피 한 꼴이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낡은 담벼락 색 같은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의 흐릿한 눈에서는 아무것도 읽을수가 없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의 붉은색 콧수염의 털이 저실로움직기렸다. 모자 제조업자처럼 매사에 당당한 남자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그 모습을 보면서 일말의 두려움을 느꼈을 터였다. - P237
제르베즈를 무엇보다 우울하게 만든 것은, 자신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바로 그 시각에 온 동네가아름다워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진창 속에 빠져 있을 때는 머리 위를 환하게 비추는 햇살이 달갑지 않은 법이다. - P240
그녀가 돌아오지 않자, 배를 기다리던 쿠포 부부는 망할 계집이라고 욕을 해댔다. 그러면서도 나나가 언젠가는 돌아오리라 믿었다. 지난번 겨울에는 2수어치 담배를 사러 갔다 오는 데 꼬박 3주가걸린 적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몇 달이 지나도 나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한바탕 거방지게 노는 듯했다. 해가 바뀌어 다시 6월이 되었지만 햇살이 눈부시게 비치는데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젠 정말 끝인것 같았다. - P256
오! 그렇고말고! 그들은 서로어디 살고 있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모두 한 배를 탄 처지였으니까. 그 배의 이름은 추위와 배고픔이었다. - P280
한때 그녀는 짐승의 시체처럼 흉물스럽기 찍이 없는 이곳 한 귀퉁이에서 사는꿈을 꾼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귀가 멀어 저 벽들 뒤에서 나지막이 울리는 크나큰 절망의 음악 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발을 들여놓은 후로 추락이 시작되었다. 그랬다, 빈곤한 노동자들끼리 아래위로 겹겹이 살아가는 초라한 공동주대에서의 삶은 불행하게 끝날 수밖에 없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콜레라와 같은 가난에 전염되고 마는 것이다 - P308
캄캄한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여섯 개 층을 올라가는 동안 제르베즈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를 몹시 아프게 하는헛헛한 웃음이었다. 오래전에 품었던 자신의 이상이 떠올랐던 것이다. 별 탈 없이 일하면서 언제나 배불리 빵을 먹고, 지친 몸을 누일 깨끗한 방 한 칸을 지니고, 아이들을 잘 키우고, 남자한테 맞지 않고 살면서, 마지막에 자신의 침대에서 죽는 것. 이제 이 모든 게 얼마나 이루어졌는지를 생각해본다면 이거야말로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일도 하지 않았고, 배불리 먹기는커녕 허기를 달래기도 힘든 지경이며, 오물 더미 위에서 잠을 자고, 딸은 거리의 여자가 되었고, 남편에게 얻어맞는 것은 일상이었다. 이젠 길거리에서 죽는 일만이 남았다. - P309
사실 쿠포를 납치한 것은 여자가 맞긴 했다. 그 여자의 이름은 저승사자 소피 였다. 주정뱅이들의 다정한 마지막 동반자. - P314
<목로주점>이라는 일견 낭만적인 주점을 연상시키는 제목을 고집한 것은 바로 그 ‘낭만성‘ 뒤에 숨겨진 삶의 아이러니와 이중성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노동자들이 휴식을 취하면서 한순간이나마 배고픔과 삶의 신산함을 잊고 행복감에 젖을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장소인 선술집은, 달콤한 마약 같은 탈을 쓴 치명적인 도살용 도끼나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선술집의 주인 이름이 콜롱브(비둘기)라는 사실은 그 선한이름 뒤에 감추어진 치명적인 비극성과 아이러니를 더욱더 강조한다. - P342
졸라는 이처럼 일반화가 가능하면서도 다의적이고 은유적인 단어를 소설의 제목으로 사용함으로써 그 단어에 역동적이고 변화무쌍한 생명을 부여했다. 아쏘무아르는이야기 속에서 점차 그 외연을 확장해나가면서, 주인공 제르베즈에게는 치명적인 전락과 파멸을 아기하는 악과 빈곤함, 무기력함의 근원으로, 쿠포를 비롯한 수많은 노동자에게는 그들의 삶을 좀먹고 망가뜨리는 괴물 로 변모해가는 것이다. - P342
졸라는 <목로주점>의 서문에서 이 작품을 "민중을 묘사한 최초의 소설로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을 얘기하는, 민중의 향기를 담은 소설" 로 규정했다. 졸라가 민중을 소재로 한 소설을 구상하게 된 것은 1864년 공쿠르 형제가 발표한 『<제르미니 라세르퇴>의 서문을 접하고 난 후부터였다. 성명서 형태의 서문에서 공쿠르 형제는 민중에게도 문학에감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할 것을 주장했다. - P347
<목로주점> 이 연재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졸라는 일약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작가, 가장 뜨거운논쟁의 중심에 선 유명 인사가 되었다. 『목로주점은 처음으로 빅토르위고의 <레 미제라블>의 인기를 뛰어넘은 소설이었다. - P351
<목로주점>은 신문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 같은 부분을 삭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우파와 좌파, 부르주아와 민중, 양쪽 모두의 분노를 자아냈다
부르주아 계층의 독자는 민중이 얼마나 경멸스럽고 사회에 위험한존재인지를 새삼 확인하며 은밀한 쾌감을 느낌과 동시에, 목로주점의 노골적인 언어와 몇몇 장면의 음란함에 역겨움을 나타냈다. 한편민중 계층에 속하는 독자는 졸라가 노동자들의 빈곤과 타락상을 그처럼 생생한 언어와 섬세한 필치로 그려낸 데 고통 받았다. -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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