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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선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2월
평점 :
그런 사람은 없다
자신을 구하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ㅡ J
문헌학을 전공하는 열아홉의 앙주는 아주 까탈스러운 도나트와 한 집에 살고 있다. 도나트는 샤워커튼이 접혀 있거나 샴푸 뚜껑이 열려 있는 것으로도 트집을 잡는다. 심지어 냉장고에 서로의 음식이 섞이는 경우에도 마찬가지. 이런 룸메이트와 산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갑갑하고 아찔하다. 그러나 앙주는 넉넉한 형편이 아니어서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어느 날 그렇게도 예민한 도나트에게도 연인이 있다는 말에 앙주는 부러운 생각이 든다. 외롭기도 하고 돈이 필요했던 앙주는 과외 광고를 내고, 독서 장애가 있는 부잣집 아들 피를 지도하게 된다.
16살 고등학생인 피 역시 부모와의 동거 생활이 녹록지 않다. 그는 통제 광인 아빠를 경멸해서 큰 소리 내지 않고는 대화를 이어갈 수 없는 지경이었고 엄마와는 아예 말이 통하질 않았다. 피의 아버지는 반사거울 너머 서재에서 과외하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는데 이 사실을 아는 앙주는 피가 처한 답답하고 숨막히는 상황을 십분 이해한다. 독서 장애는 심리적 문제였던 셈. 앙주는 그런 피에게[적과 흑],[일리아스],[오디세이아],[변신] 등을 읽게 하면서 점점 가까워진다. 어느 순간 독서 지도가 아니라 이들은 마치 연애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서로를 알아가면서, 불안한 세계에 처한 외로움에 공감하면서 말이다. 키스가 아닌 책으로 마음을 주고받으며 속 깊은 이야기를 공유한다.ㅡ앙주는 애써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교수와 사랑 없는 관계를 맺기도 한다.ㅡ 우리가 연애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들은 너무나 한정되어 있다.
다른 소설들에서 묘사된 청소년기는 사기였다. 그들은 솜 전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만 거론했다. 카프카 이전에 사춘기가 살육이라고 감히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89
자신을 구하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대신 읽어내 줄 수가 없는 영역이다.
이제야 '사랑'을 알게 된 피는 능동적으로 변한다. 그는 자발적으로 [육체의 악마]를 읽는다.
사랑은 고독을 벗어나기에 최적의 방식이다. 읽는 행위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ㅡ물론 독서는 사랑보다는 덜 미친 짓(긍정적인 의미)이고 보다 온건한 방식이지만 ㅡ 고독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진지한 독서는 진지한 사랑을 닮았다. 책을 읽듯이 마음을 읽어 가면서 이어가는 사랑. 함께 책 이야기를 하며 앙주와 연애 아닌 연애를 했던 피는 그 시간들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고 그 경험은 구속에서 벗어나기를, 자유를 쟁취하기를 욕망하게 했다. 물론 그 방식이 극단적이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소설의 방식이라고 해 두자.
즐길 거리는 분명히 있지만, 내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았어. 나도 자네처럼 늘 혼자였지 그렇다고 불평하는 건 아냐. 고독을 좋아하거든.고독을 벗어나는 유효하고 유일한 이유는 사랑뿐이야. 140
마지막 말은 나도 동의해. 하지만 그것 말고는, 미안하게도 난 이 책을 좋아해. 이 책은 문학의 검은 다이아몬드야. 남편, 아내, 정부라는 고전적인 삼각관계에 관해서 이보다 더 아름답고, 섬세하고, 교양 있게 쓴 사람은 없었어.
날 골리려고 그렇게 말하는 거죠?
아니야,너에게는 이 책을 좋아하지 않을 권리가 있어.
난 정말 당신이 날 시험한다고 믿었어요.
내가 왜 그러겠어?
내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147
예전에 노통브의 소설 [두려움과 떨림], [살인자의 건강법], [적의 화장법]을 재미나게 읽었다. 자기만의 색깔이 확실한 작가인데다 특유의 반항기 가득한 유머러스함이 허파까지 간지럽힌다. 이를테면 나를 괴롭히는 직장 상사에게 돌려까기를 하는 SNL 속 '맑눈광(맑은 눈의 광녀)' 김아영의 느낌이랄까? 늘 그렇듯 노통브는 이번에도 나를 또 웃게 했고 고독하지 않게 해주었다. 짧지만 강렬한 시간이었다.
아멜리 노통브의 [비행선]을 읽으면서 최근에 본 이 두 영화가 자꾸만 떠올랐다. 기존의 화려한 로멘스 영화들을 진부하게 만드는 보다 솔직하고 현실감 있는 연애 이야기. 만져지고 냄새 맡을 수 있을 것 같은 진짜 흔하지만 뭉클한 사랑이야기. 고독에서 스스로 벗어나기를 '선택'하게 하는, 스스로를 구하고 싶어지는 그런 사랑이야기. (예술 영화들이라 취향이 갈릴 수 있는 점 참고 바랍니다. 콜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