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戰後) 혼인율이 급격히 늘어나고 이상적인 가정의 이미지가 여러 매체를 통해 보급되었을 때 휴 헤프너는 남성들만의 라이프스타일 메뉴얼을 구축해 돈벌이 수단으로 삼았다. 기존에 하층민이나 보는 걸로 여겨지던 핀업잡지(핀으로 벽에 붙이는)에 다양한 읽을 거리는 물론 문학란을 추가하여 차별화하고 중상층도 거리낌 없이 접근하도록 지적인 이미지를 부여한 것이다. 음지에 머물던 포르노 이미지를 양지로 드러내 여성을 이용하지만 정작 여성을 배제한 , 막강한 자본을 갖춘 사업으로 만들었다.
![](https://image.aladin.co.kr/product/23227/28/cover150/k732637205_1.jpg)
‘ 휴 헤프너는 대중에게 파자마 차림의 플레이보이 이미지로 보였지만 실은 놀라울 정도로 머리 좋은 사업가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문화적 테마를 이용하고 써먹는 데 재주가 있었다. 『플레이보이』 이전의 포르노 잡지는 주류 유통경로로는 배급되지않았기 때문에 접근이 제한돼 있었다. 플레이보이』 이후, 시대는 완전히 달라졌다. 헤프너가 포르노의 대량 생산과 유통을 막은 문화적, 경제적, 법적 장벽을 서서히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 P56
헤프너는 자기가 생각한 독자의 이미지를 1956년 4월호에 이렇게 밝혔다.
"플레이보이란 무엇인가? (.,)예리한 지성을 가진 젊은 기업가일 수도 있고, 예술계 종사자, 대학교수, 건축가나 엔지니어일 수도 있다. 자기만의 관점을 가진 남자라면 누구나 플레이보이가 될 수 있다. 플레이보이는 인생을 눈물의 골짜기가 아닌 즐길 시간으로 보며, 일에서 즐거움을 찾지만그것이 삶의 목적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기민하고, 세련된 취향을 가졌고, 쾌락에 섬세하게 반응하는 이 남자는 호색광이나 호사가라는 꼬리표 없이 삶을 온전히 살아갈 줄 안다. 우리가 말하는 ‘플레이보이‘는 바로 이런 남자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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