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렸다.
저물녘, 구름 사이로 자갈투성이인 강가에 연한 빛을 비추던 하늘이 어두워지자 사위가 돌연 고요해졌다. 두송이,
세 송이 눈발이 흩날렸다.
눈은 나무를 베고 있는 사무라이와 하인들의 일옷을 스치고, 덧없는 목숨을 호소하듯 그들의 얼굴이나 손에 닿았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인간들이 묵묵히 손도끼만 움직이고있으니 이제는 그들을 무시하듯 이리저리 주위를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저녁 안개가 눈과 섞여 퍼지자 시야는 온통 잿빛이 되었다. - P7

긴 겨울을 앞두고 농부들은 온종일 일을 했다. 척박한 논밭에서 벼와 피를 거두어들이면여자와 아이들이 두드려 탈곡하고 키로 친다. 그것은 연공을 바치기 위한 것이지 자신들이 먹을 것이 아니었다. 일하는 틈틈이 벤 풀들은 그 자리에 말려둔다. 마구간에 깔기 위해서이다. 이곳에서는 말리지 않은 볏짚이 기근 때 식량이되기도 한다. 그것을 대비하여 잘게 썰어절구에 찧어 가루로 만든다 - P42

선교사는 자신을 일본의 주교로 만들어주기를 바란다고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순간적으로 그는 자신의야심을 부끄러워했지만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마음속에 타일렀다. 나는 사욕으로 지위를 얻고자 하는 건 아니라고 나는 기리시탄을 금하려는 이 나라에서 최후의 강력한 방어선을 치기 위해 주교의 지위가 필요한 것이라고 오직 나만이이렇게 교활한 일본인들과 싸울 수 있다고…. - P57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들도 달팽이와그 껍데기처럼 골짜기와 단단히 결부되어 있었다. 하지만그들은 얼굴을 숙이고 눈바람을 견디는 것처럼 역시 이 지시를 체념하며 받아들일 것이다. - P78

"버리는 돌이지요, 우리는 마쓰키는 바다에 눈길을 준채 자조하듯이 "평정소의 버리는 돌이 된 겁니다."
"버리는 돌?"
"원래 중신 중 누군가가 이 큰 소임을 맡아야 하는데 메시다시슈인 우리가 뽑힌 것은-신분이 낮은 메시다시슈라면 도중에 바다에 빠지고 생판 모르는 남만의 나라에서 병들어 쓰러져도 영주님께도 평소에도 전혀 지장이 없기 때문일 겁니다." - P111

"하나는 옛 봉토를 돌려달라는 우리 메시다시슈의 청원을 막기 위해서지, 그 힘든 여행에 메시다시슈 몇 명을 보내놓고, 도중에 바다에 빠져 사라지면 그걸로 좋은 거고, 또어려운 소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때는 충실하지 못했다는 명목으로 우리를 처벌하여 메시다시슈의 본보기로 삼는 거네. 그게 평정소이 생각이야." - P195

이따금 여기저기서 그들은 인디오가 내버린 제단의 폐허를 보았다. 벨라스코의 설명에 따르면 이 주변의 인디오는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태양을 숭배했다고 한다. 불그스름한 화산암을 포개어 쌓은 받침대나 땅바닥에 내팽개쳐져나뒹굴고 있는 돌기둥의 잔해에 기괴한 선이 새겨져 있고 그선 사이를 등이 반짝이는 도마뱀이 재빠르게 기어갔다. - P238

변화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입 밖으로 내서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의 자신이 골짜기에서 살았던 자신과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이 운명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고 결국 어떻게 변하게 할지 공포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날 밤 바람이 수도원 창을 밤새 울렸다. 한밤중부터 비도 내리기 시작했다. - P249

벨라스코는 귓가에 들려오는 그 목소리를 지우려고 했다. 그는 성서에 쓰인 주 예수의 한가지 말을 그 방패로 삼았다. 그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 자가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여 병자를 낫게 하는 것을 본 요한이 화를 냈을 때 주님이한 말이었다.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니 막지 마라." - P276

세 사람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자 주교는 사제로부터은 물병을 받아 각자의 이마에 물을 부었다. 이마에 흐르는물은 사무라이의 눈과 코로도 흘러내렸고 벨라스코가 손에든 수반도 적셨다. 그것이 세례였다. 사무라이 일행에게는형식적인 것, 교회에는 부정할 수 없는 성사였다. - P331

아무것도 몰랐던 나와 사절들. 아무것도 모른 채 오로지하나의 꿈을 찾아 스페인으로 가려고 했던 우리들. 그러나그것은 신기루의 성이었던 것이다 - P426

하지만 그가 승리를 거둔것은 정치의 면이고, 그리스도교도가 싸움에서 이긴 것은정치의 세계가 아니라 영혼의 세계에서다. 철저한 추방에도불구하고 사실 42명의 선교사가 일본인 신도의 은밀한 비호를 받으며 그 섬나라에 잠복해 있는 사실을 그 노인은 아직 모를 것이다. 잠복한 선교사들은 정치나 현실의 세계에서 패배한 것을 인정한 상태에서 자신의 피를 그 나라에 도마뱀 같은 모양을 한 그 나라에 바치려 하고 있다. - P427

"그리고 우리는 살아 있는 한 이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어둠 속에서 중신은 중신, 고이치몬슈는 고이치몬슈, 주군은 주군, 저 같은 메시다시슈는 평생 메시다시슈로 살아가겠지요."
"우리는 봐서는 안 되는 것을.… 보고만 것이겠지.‘ - P446

골짜기의 밤은 깊었다. 골짜기의 밤을 모르는 사람은 진정한 어둠과 어둠의 침묵을 모른다. 정적이란 소리가 나지않는 것이 아니다. 정적이란 뒤쪽 숲의 초목이 스치는 소리,
때때로 들려오는 새의 날카로운 울음소리, 그리고 가만히이로리의 자유 불꽃을 향하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다. - P463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에서 우는 자야말로 행복하다. 그런 사람은 천국에서 웃게 되리라. - P464

주님은 그 죽음을 통과함으로써 이 세계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다. 인간 세계의 배후에 영원한 질서를 창조했다. 나도 주님을 따라 이 목숨을 일본에 바침으로써, 이피를 일본에 뿌림으로써 그 질서에 가담하는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 - P486

사무라이는 지붕 너머로 눈이 흩날리는 것을 봤다. 흩날리는 눈이 골짜기의 백조처럼 여겨졌다. 먼 나라에서 골짜기로 와서 다시 먼 나라로 떠나는 철새, 수많은 나라, 수많은 동네를 본 새. 그것이 그였다. 그리고 지금 그는 아직 모르는 다른 나라로….
"여기서부터는..… 저분이 함께하실 겁니다."
등 뒤에서 돌연 쥐어짜는 듯한 요조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부터는... 저분이 모실 겁니다."
사무라이는 발을 멈추고 돌아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검게 빛나는 차가운 복도를, 그의 여행의 마지막을향해 나아갔다. - P503

거품을 일으키며 해변을 덮치는 파도가 옥졸이 떠내려보낸 거적을 삼키고 부딪치며 물러간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겨울 햇빛은 긴 모래사장에 내리쬐고 바다는 바람소리 속에 여전하게 펼쳐져 있다. 대울타리 안에 이제 관리나 옥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P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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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2022-06-11 20: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엔도 슈사쿠 작품이군요. 표지 디자인이 강렬합니다.
작품 내용도 그렇겠지요? 쪽수를 보니 대박~ 읽는 재미가 쏠쏠하겠네요.ㅎ
편안한 저녁 시간 되세요. 미미님.^^

미미 2022-06-11 20:54   좋아요 3 | URL
두꺼운 편이라 읽기전에 호흡을 가다듬었는데도 막상읽으니 순식간에 결말에 다다랐습니다. 표지가 내용과 잘 어울렸어요ㅎㅎ 모나리자님 즐거운 주말보내세요*^^*

새파랑 2022-06-12 18: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혀 긴줄 모르고 몰입해서 읽은거 같아요. 미미님과 읽은 책이 겹쳐서 기쁩니다 ^^

미미 2022-06-12 20:18   좋아요 2 | URL
저도요! 소설 속에서 함께 살다가 나온 느낌이었어요!!ㅎㅎ새파랑님이 최고라고 하신 작품은 항상 믿고봅니다*^^*

서니데이 2022-06-13 2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침묵보다 조금 앞선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고 해요.
일본은 가톨릭신자가 많은 나라가 아닌데, 작가가 가톨릭 신자라서 그 점도 기억에 남습니다.
미미님, 시원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미미 2022-06-13 22:29   좋아요 3 | URL
그렇군요!! 어쩐지 그런 느낌이었어요*^^*
아시겠지만 일본은 신사도 많고 종교에 있어서는 독특한 양상을 띄는것 같아요. 서니데이님도 시원하고 평온한 밤 되세요🙆‍♀️

mini74 2022-06-13 22: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미님께 땡투하며 아 책 샀습니다 ㅎㅎ 내일 온다는데 기대됩니다 *^^*

미미 2022-06-13 23:05   좋아요 3 | URL
오!!! 미니님💕 감사해요ㅎㅎ 미니님도 감동의 파도를 경험하시길 바래요*^^*(좋아하실만한 요소가 많아요)

scott 2022-06-13 23: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슈사쿠 이 작품 쵝오!ㅎㅎ

사무라이 마지막 장!
감동의 회오리
미미님 맘 속에도
゜  ゜   *  ゜
  *  o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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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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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 
   (  )
   ( O )

미미 2022-06-14 08:21   좋아요 1 | URL
스콧님이 전에 올려주셨던 사무라이 페이퍼도 다시 찾아봤는데 소설읽고 보니 더더 감동적이었어요!!
보고 또 보려고 즐겨찾기함요.

네! 소설 마지막 두 페이지에서
오열했습니다ㅠㅠ
명품 페이퍼 감사해요 스콧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