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MIDNIGHT 세트 - 전10권 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
프란츠 카프카 외 지음, 김예령 외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8월
평점 :
품절


그는 많은 책을 읽었다. 클럽에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서 신경질적으로 턱수염을 잡아당기며 책이나 잡지의 페이지를 넘기는 그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얼굴 표정으로 보아, 그는 읽고 있다기보다 완전히 씹어 삼키고 있는 것 같았다. - P18


책에 관한 태도나 책을 읽고 있는 묘사가 나오면 늘 북마크를 붙이고 있다. 이 책을 읽던 중에도 역시 '읽고 있다기보다 씹어 삼키고 있다'는 표현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그동안 책을 제대로 씹어 삼킨적이 있었나?' 씹어 삼키고 싶은 책들이 분명 늘어나고 있는건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은 읽고 싶은 책들의 쓰나미 때문에 그런 여유를 부리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있다. 이게 어리석다는건 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 사이에는 은근 넘기 힘든 강이 있으니까. 게다가 난 수영을 못한다. 좌우지간 합리화를 해보자면 재독으로 씹어 삼킬 책들을 찾아가는 여정에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6호 병동

지방병원 별채에 6호 병동이 있다. 이곳에는 5명의 정신병자들이 있고 이 중 '이반'한 명만이 귀족출신이다. '이반'은 불안과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는데 첫 발췌문은 그가 자유인이었을때의 묘사다. 급격히 불행해진 가정사로 그는 점차 정신이 피폐해져 이곳에 오게 되었다. 병원에는 역시 책을 좋아하는 안드레이라는 의사가 있었다. 그는 신학자가 되고 싶었으나 아버지를 거역하지 못해 의사의 길을 걷고 있다. 안드레이는 순응하는 삶을 그럭저럭 견뎌내고 있었고, 책을 읽는다는 위안으로 자신의 무료하고 기만적인 현실을 인내하고 받아들였다. 병원의 고질적인 병폐를 외면하는 것도 그런 삶의 일부였다. 그는 6호 병동에 들렀다가 이반을 만나 뜻하지 않게 사상적 논쟁을 벌인다. 그는 자신과 달리 갇혀있고 불안해하지만 지적이고 총명한 '이반'에게 친근감을 느낀다. 


내가 아는 것은 신이 나를 따뜻한 피와 신경으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렇소! 유기적인 조직체는, 죽지 않았다면 모든 자극에 반응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반응하고 있는 겁니다! 고통에대해 나는 비명과 눈물로 대답합니다. 비열함에 대해서는분노로, 혐오스러운 것에 대해서는 구역질로 대답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이 바로 삶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저급한 유기체일수록 감각이 무디고 자극에 약하게 반응합니다. 고등한 유기체일수록 더 예민하고 더 활발하게 현실에 반응합니다. 어떻게 이것을 모릅니까? 의사 선생, 이렇게 간단한 것도 모르나요?  - P67


나는 안드레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반의 주장에 다시 격하게 공감이 됐다. 이 두가지 다 맞는 거 아닐까? 하는 우유부단한 엔프피(ENFP)다운 생각. '이반'에 대한 호기심에 자꾸만 6호 병동을 찾아가던 의사 안드레이는 점점 변해간다. 주변 사람들은 걱정스럽게 그 둘을 바라본다.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는 굶주림, 추위, 모욕, 상실, 죽음에 대해 햄릿처럼 공포를 느끼도록 이뤄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느낌안에 삶 자체가 있습니다. 삶을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지만,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 P68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워낙 많이 들어온 제목의 이 작품을 이제서야 읽게 됐는데 이렇게 짧은 이야기일 줄은 몰랐다. 자기 아내를 비롯해 여성이란 존재를 하찮게 여기던 난봉꾼 '구로프'는 휴가지에서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만난다. '안나' 역시 기혼이지만 남편에게 애정이 없는 삶을 살다가 혼자 시간을 보내러 여행을 오게 된 건데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얼마 후 두 사람은 헤어져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지만 '구로프'는 난생 처음으로 '안나'에게 사랑을 느낀다. 가벼운 연애였다고 생각했지만 자꾸만 그녀를 떠올리고 그녀를 그리워하게 된 거다. 결국 둘은 서로를 진정한 반려자라 생각하고 지속적으로 만나며 아끼게 된다. 단지 그들에게 불행한 것이 있다면 두 사람에게는 각자의 배우자가 존재한다는 것. 


요즘은 불륜을 떠올리면 늘 홍상수와 김민희가 생각난다. 이 둘은 아직은 잘 지내는 것같다. 불륜으로 파탄난 한 가정과 거기 딸린 자녀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면 분명 불륜은 범죄인데 소설에서 많이 다루어지는 불륜은 평소에는 알고 싶지도 않은 그들의 목소리를 듣게 해 단순히 겉만 보고 비난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일지 깨닫게 한다. '6호 병동'도 그렇지만 막상 '자기 일'이 되면 누구나 시각차가 생긴다. 그래서 편협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써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배움도 그렇지만 사람의 일이란 알면 알수록 어려운 것 같다. 


어쩌면 바로 이 변화 없음에, 우리 개개인의삶과 죽음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에, 우리의 영원한 구원에관한, 지상의 끊임없는 삶의 움직임에 관한, 완성을 향한부단한 움직임에 관한 비밀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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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4-04 15:5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체호프 작품(단편들) 언제 어디서든 읽어도 좋은! 섬광 같이 꽂이는 묘사나 명구가 아닌 우리 모두의 사소하지만 진솔한 일상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치열하게 읽기 보다 느슷하면서 여유로운 독서를! 미미님 독보적 달인 요🖐 순위 안에

청아 2022-04-04 16:36   좋아요 5 | URL
네!ㅎㅎ 요 며칠 순위가 많이 밀렸습니다.ㅎㅎ 저도 스콧님처럼 1000권 넘으면 여유가 생길까요?😅 두가지 이야기 다 마음에 쏙 들었어요.
발췌문들 두고두고 곱씹고 싶어요~^^♡

mini74 2022-04-04 18:0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ㅎㅎ 대표 불륜 맞네요. 개를~ 에서 전 불륜커플 금방이라도 헤어질 듯 느꼈는데 책이 끝날때까지? 책 밖에서라도 둘은 깨지지 않을까하며 봤어요. ㅎㅎ

청아 2022-04-04 18:19   좋아요 4 | URL
미니님~^^♡ 그쵸?!ㅋㅋㅋㅋ

저도 헤어질 줄 알았어요!ㅎㅎ 보통 파국으로 끝나던데 의외의 방향으로 흐르니 신선합니다. 이번 책도 만족입니다ㅎㅎ

그레이스 2022-04-04 20:4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사람의 일이란 알면 알수록 어렵다는 미미님 말씀에 공감!

청아 2022-04-04 20:58   좋아요 3 | URL
그레이스님~^^♡ 읽으면 읽을수록 읽어야 할 책도 배움도 끝없고 사람도 마찬가지네요. 앎은 내 무지를 깨닫는 과정이 맞나봐요ㅎㅎ

새파랑 2022-04-04 23: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체호프는 희망입니다 ㅋ 전 체호프 작품들의 여운을 남기는 결말이 좋더라구요. 중간중간의 허를 찌르는 문장도 좋고 ^^ 이제 열린세트 여섯권 남으셨네요 😆

청아 2022-04-04 23:56   좋아요 3 | URL
ㅋㅋㅋ새파랑님이 정답입니다^^♡ 이번 책 너무 좋았어요. 밑줄도 많이긋고 북마크 테이프도 잔뜩 붙이고요ㅋ 말씀처럼 열린책들에서 계속 만들어주었음 합니다🤗

거리의화가 2022-04-05 09: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에 대한 묘사가 책에 나타날 때. 저도 아직까진 재독삼독할 책이 무엇일까 알아가는 단계입니다만. 단편이 길이만 짧을 뿐이지 사유를 준다는 점은 같은 것 같습니다. 모른다는 걸 안다는 것이 사유의 첫 걸음이라고 생각해요^^

청아 2022-04-05 09:51   좋아요 0 | URL
거리의화가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배우고 알아갈 수록 내 그릇의 빈공간이 얼마나 크고 황량한지 느껴지더라구요. 그 전에는 그것조차 몰랐으니 이것만 해도 사실 큰 기쁨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