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진부한 트라우마일수 있지만 어릴때 누군가의 장난으로 물에 빠져 고생한 뒤로 물에 대한, 바다에 대한 공포심이 생겼다. 하지만 다행히도 바다를 좋아해 산과 바다중에서 더 좋아하는 곳을 고르라는 이분법적 질문에는 항상 바다를 고르곤 했다. 정희진의 글을 읽기 전의 나는 마치 통념이란 바다에서 표류하는 작은 부표에 지나지 않았다. 얼마나 의문투성이고 막막한지 물에 대한 공포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대한 무지는 시도 때도 없이 질문과 두려움을 자아냈다.


왜 여자는 다소곳 해야 하지? 왜 여학생들은 바지를 선택할 수 없지? 왜 여자는 혼자 여행하면 위험해 보이지? 왜 매맞는 여자들은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지? 왜 작가라는 사람이 여성을 자신과는 별개의 인간인것 처럼 썼지? 내 주변에는 이런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도 답을 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나도 질문을 점점 내 안으로 쌓아갈 뿐 밖으로 내보인 적은 없었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내가 몸 담은 세계와 나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최소한 더는 표류하진 않는다.(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여전하지만 이전과는 양상도 정도도 다르다.) 그동안 내 안에 묵혀 놓았던 질문들에 대해 하나씩 답도 얻었으며 내가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어 ㅡ역시 저 먼 곳도 미지의 세계지만ㅡ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내 의지에 따라 이동 중이란 것은 큰 힘이요 위안이 되었다. 언니가 없던 게 늘 아쉬웠던 외동인 나는 정희진이란 언니를 비롯해 수 많은 책 속 오빠들과 언니들, 선생님들을 얻은 것이다. 


특히 이 언니의 책을 읽다보면 정신없이 바빠진다. 소개해 주는 책들에 관한 설명이나 깨달음으로 어떤 것은 바로 주문하고 어떤 것은 장바구니 어떤 것은 자료를 즉시 찾아본다. 매 페이지가 밑줄이고 테이핑이어서 손도 바쁘고 머릿속도 바빠진다. 이번에 나온 정희진의 글쓰기 3번째 책인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는 1,2권에 비해서 좀 더 읽기 쉬운 글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쉽게 써 달라는 요청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절대 가벼운 내용은 아니다. 


<P.52> 용서를 둘러싼 담론에는 분노나 고통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사회는 그러한 상태를 암암리에 '극복'의 대상으로 본다.용서는 분노보다 우월한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다를 뿐이다. 용서에 대한 나의 입장을 굳이 밝힌다면 나는 용서에 관심이 없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용서라는 말이 싫고 용서의 필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들을 의심한다.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은 용서,화해,대화라기 보다는 부정의한 사람들과 그들의 행위가 가능한 사회적 조건이다. 

<P.85> 말의 의미는 사전에 있지 않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관계에 있다.

<P.221> 젠더는 세상 어느 제도보다도 사회를 구성하는데 핵심적이며 개인의 삶에 깊은 자상을 남기는데도 그 부당성과 야만성에 비해 너무나 비가시화되어 왔다.

<P.220> 좋은 서평은 결국 좋은 독후감이다. 독서 감상문은 쓰는 이 자신에게로 회귀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성찰적이어야 한다.

표류하는 것과 목적과 방향성을 가지고 이동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바다라는 커다란 공간에서는 미미한 움직임일 뿐이지만 내 존재, 내 몸을 의식하고 원하는 곳을 향해 이동하는 것은 개인에게는 분명 의미있는 여정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깨지는 기분이 참 좋다. 아직 깨질 것이 많아 부끄럽기도 하지만 적어도 더는 표류하지 말자. 더 많이 읽고 쓰고 현실에 머무르지 말고 앞으로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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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4-09 11:42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바다라는 커다란 공간에서는 미미한 움직임일 뿐이지만 내 존재, 내 몸을 의식하고 원하는 곳을 향해 이동하는 것은 개인에게는 분명 의미있는 여정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깨지는 기분이 참 좋다. ]
미미님이 던지신 수많은 책들 아직 가보지도 못한 다다르지 못한 그곳을 향해 천천히 읽고, 또 읽어요,


( /)⋈(/)
(。•ㅅ•。)♡
┏--∪-∪━━━━━┓
♡ 올리신 책들 전부
  장바구니 속으로*.。♡
┗-━━━━━━━┛

청아 2021-04-09 11:48   좋아요 6 | URL
스콧님이 늘 함께 해주셔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
누구와 함께인지도 참 중요하단걸 늘상 일깨워주심! 항상 풍성한 자료 나누고 올려주시는 것 처럼 장바구니도 넉넉하심요!!ㅋㅋㅋㅋ o(*‘▽‘*)/☆゚’

페넬로페 2021-04-09 12:15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고 어쩜 이런 표현들이 가능한지?
가슴이 벅찰 정도예요~~
저는 알라딘 서재에서 미미님의 언니를 처음 알았고 그 분의 책중 이 시리즈의 1권을 처음 읽었거든요
근데 사실 좀 실망했어요
그 글들이 신문의 짤막한 칼럼이었다는 것을 고려해도
쏟아내려는 말이 글을 덮는다는 생각을 했고 그에 대한 결과로 읽는 내내 제 호흡이 가빠지더라고요^^
그래서 2권은 사놓고 읽지 않고 있어요^^
3권먼저 읽어봐야겠어요
역시 기회된다면 ㅎㅎ

청아 2021-04-09 12:21   좋아요 4 | URL
너무나 존경하는 언니지만 저도 이 언니의 모든 의견에 동의하진 않아요.(언니도 아마 그걸 더 바라실것도 같고) 표현에 있어서는 대체로 저에겐 흡족하기까지 하지만 논쟁적인 글들이 다 그렇듯 형식면에서 수용가능한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늘상 있더라구요. 내게 어떤것이 맞고 안맞는지 알아가는것도 너무 재밌고 신나요. 그런면에서 페넬로페님의 감상도 넘 보기좋아요~♡ 3권은 아마 그런 부분에서 좀더 나은 느낌갖으실 수 있겠어요ㅋㅋ😉

새파랑 2021-04-09 13:3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독서감상문은 쓰는 이 자신에게로 회귀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성찰적이어야 한다˝ 이 글하고 딱 맞는것 같아요. 대단하심~! 미미님 언니의 책 꼭 읽어봐야겠네요. 다시 구매모드로 ㅎㅎ
(이소라 누님은 반칙입니다 ㅎㅎ 너무 좋음~!)

청아 2021-04-09 12:42   좋아요 4 | URL
대단한건 새파랑님 독서속도예요!ㅋㅋㅋ좋게 봐주시니 감사해요. 이 책 강추입니다. 후반에 살짝 난해한 부분이 있으니 주의하셔요. 아~자주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책이예요!
(ㅋㅋ이소라는 항상 쵝오!🤭)

행복한책읽기 2021-04-11 00: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깨지는 기분이 참 좋다.˝ 지두요!!!!! 이 페이퍼 참 좋아요. 미미님이 어떤 마음으로 책을 읽는지가 보여요. 연대감이 잭의 콩나무처럼 쑤욱쑤욱 올라왔다요.^^ 저는 언제일지 모르지만, 저 책 구매한 사실을 깨달았으니 꼭 읽겠슴요.^^

청아 2021-04-11 08:26   좋아요 2 | URL
우리 함께 오래오래 <북플>하면서 이 책 저 책에 깨지고 쑥쑥 자랐음 좋겠어요~♡
깨질 부분이, 성장할 부분이 많은 것도 함께니까 더 좋은듯!

DYDADDY 2023-03-07 11: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희진 선생님께서 추천하신 고통받는 몸을 이미 읽으셨군요. 미미님이 읽지 않은 책이 오히려 궁금해질 지경입니다. ^^

청아 2023-03-07 11:41   좋아요 1 | URL
아! 아닙니다. ^^ 아래 나열된 책들은 정희진쌤의 <편협하게 읽고...>에 언급 되었거나 관련된 책이예요. 읽지 않은 책 어마무시하게 많습니다.

DYDADDY 2023-03-07 11:47   좋아요 1 | URL
읽지는 않으셨어도 저런 책이 있다는 것을 아시는 것만으로도 존경스러워요. ㅠㅠ 이번 달 정희진의 공부 매거진에 Body in Pain으로 언급하셔서 찾다보니 미미님 페이퍼가 보여 반가웠습니다. ^^

청아 2023-03-07 11:54   좋아요 1 | URL
대디님 덕분에 다시 이 페이지를 확인하고 책들을 둘러봅니다. 매거진 3월호 떴군요? 저도 들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