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백.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솔직히 <태고의 시간들>은 지루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고 해서 일부러 찾아 읽은 적은 거의 없는데 이 책은 그런 타이틀에 어느정도 기대를 하고 읽었다. 하지만 읽는 동안 느낌은 내게 비슷한 소설 하나를 떠올렸고 대체로 관념적인 묘사들의 압박이 그야말로 '태고의 시간들'처럼 길고 지루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동일한 작가의 이 소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훨씬 담백했다. 대체로 군더더기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대체로'라고 표현한 것은 별자리와 점성술, 자연과 우주의 기운에 관한 그녀의 찬양이 막판 결말을 기대하는 입장에서 '복면가왕'김성주 아나운서의 최종승자 발표처럼 숨막히는 뜸들이기로 읽혔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는 그런 이야기들도 블레이크의 시와 반복되는 살인사건이 조화를 이루며 주의를 끌었다. 별자리나 점성술에 흥미를 가져본 사람이라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추가로 동물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있다면 금상첨화다.


하인리히 힘러가 고용한 천문학자 빌헬름 볼프가 1944년 7월 20일에 히틀러에게 큰 위험이 닥칠 것을 예언했는데, 우리가 알듯이 그날은 바로 볼프스산체에서 히틀러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던 날이다. 그리고 나중에 그 암울한 천문학자는 1945년 5월 7일 이전에 히틀러가 비밀스러운 최후를 맞으리라고 담담하게 예언했다. p.172


까치는 목욕을 자주 하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듯했다. 더구나 그들은 총명하면서도 오만하다. 모두가 알듯이, 그들은 다른 새들로부터 재료를 훔쳐서 자신의 둥지를 짓고,그곳으로 반짝이는 물건들을 실어 나른다.p.145


<쓰리 빌보드>와<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망치를 들면 모든 게 못으로 보인다고 두 작품 모두 여성주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영화<쓰리 빌보드>에서 주인공은 중년의 여성이다. 그녀에게는 성폭행을 당한 후 처참하게 죽은 딸에 대한 아픔이 있다. 게다가 경찰은 범인을 잡지 못하고 덧없이 시간만 흘려보내던 중이었다. 그녀는 무능한 경찰을 비난하고 독려하기 위해 3개의 도로 빌보드(광고판)를 계약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어지는 사건들 속에서 오히려 점점 궁지로 내몰린다. 




<죽은 이들의 뼈>의 화자도 역시 나이든 여성이다. 

게다가 그녀의 경우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스러운 질병과 그로인해 발전된 점성술,동물에 대한 관심이 더욱 주변으로부터 미친여자 취급을 당하게 만든다. 탐욕으로 훼손되는 자연과 동물들. 누구보다 그런 것들에 공감 할 수 밖에 없는 그녀는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지만 상황은 오히려 가끔 꾸는 꿈처럼 외부와 단절되고 고립을 초래한다.


나는 잠을 설쳤다. 내 몸 어딘가에는 아직도 불안과 초조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 열기가 들끓는 용광로와 붉은 빛의 뜨거운 벽에 둘러싸인 보일러실에 대한 똑같은 꿈들이 줄곧 나를 괴롭혔다. 꿈속에서 용광로에 갇힌 화염이 굉음을 내며 빠져나오려 했고, 엄청난 폭발과 함께 세상 밖으로 터져 나와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것 같았다. 나는 이러한 꿈들이 내 질환과 관련된 증세인, 밤의 열병 탓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p.51


특히 이 소설에서 블레이크를 인용한건 적절했다. 블레이크도 생전 미친사람 취급을 받은 적이 있고 여기 이 두 주인공도 몹시 그런 아우라를 뿜는다. <쓰리 빌보드>와 <죽은 이들의 뼈>의 공통점은 쉽게 외면당하고 무시당할 뿐 아니라 미친 사람취급을 당하는 약자들의 발버둥, 외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독자는-당연하지만ㅡ텍스트를 통해 그녀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어떤 면에서 몹시도 용감하고 세상과 달리 정상인 그녀를 응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문학적 경험의 숭고함과 가치. 적어도 나는 그랬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그녀들의 행동은 결국 나름의 공감과 연대,변화를 끌어낸다. 


필멸의 운명으로 태어난 모든 존재는 대지에 의해 삼켜 지리라 ㅡ윌리엄 블레이크


이따금 우리가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머무는, 거대하고 넓은 무덤 속에 사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차갑고 불쾌한 잿빛 어스름에 물든 세상을 보았다. 어쩌면 감옥은 바깥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게 아닐까.어느 틈엔가 우리는 감옥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p.52


권위와 기성은 늘 약자들에게 조용히,가만히 있으라고 한다.그녀들의 정의는 세상의 정의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상한 사람으로 평온을 해치는 사람으로 취급당한다. 악한 관습도 오랜 시간이 지나 전통이라는 탈을 쓰면 무력한 집단은 조용히 받아들이고 계승해야만 한다.

문학속의 일탈은 그렇게 억눌리고 잠재된 인간의 욕망과 현실의 한계를 뚜렷하게 반영한다. 작품 속에서 갖가지 캐릭터는 우리를 대신해 경계를 넘어서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다. 때로 잔인한 불법도 스스럼 없이 펼쳐진다. 하지만 이런 간접경험을 통해 현실에 발 딛고 사는 독자는 잔인한 것은 오히려 현실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도 있다.



찾아보니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를 원작으로 한 영화도 있다. 영화 제목은 <스푸어>이고 서울 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이었던 것으로 나온다.

내 망치가 적합한 못을 만났던 걸로.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03-07 16: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미님 망치는 적합했습니다. 죽은이들의 뼈 작품에서 쓰리 빌보드를 떠올리시다니!이영화 다시 봐야겠어요 봐도 봐도 명작 ^ㅎ^

미미 2021-03-07 16:34   좋아요 3 | URL
역시~♡ 스콧님 보셨군요!! 은은한 감동이 일었던 영화였어요. 불나는 장면에서 저 너무 웃기도 하고요.ㅋㅋㅋ🙄

그레이스 2021-03-07 16: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미미님 🔨 아주 좋은 도구인듯 합니다!

미미 2021-03-07 16:59   좋아요 3 | URL
고맙습니다!ㅋㅋㅋㅋ계속 잘 갈고 닦아 볼께요~♡

페넬로페 2021-03-07 17:2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눈이 아파 ㅎㅎ
지금 자세히 읽었어요.~~
이 작가의 작품을 읽지 않았고 영화도 보지 않아서 더 기대가 되네요.
쟁기와 망치의 연관관계를 밝혀봐야겠어요^^

미미 2021-03-07 17:30   좋아요 3 | URL
페넬로페님도요?!! 온열마사지와 눈 주위 근육 잘 눌러주면 좋아요~♡ 에휴 우린 이러고도 어찌됬든 책과 글을 읽으려는데 그분들 참..🥲(자꾸 생각중ㅋㅋ)
아 ‘망치를 들면 뭐든 못으로 보인다‘는 경구가 있어요. 여성학 책을 자꾸 읽다보니 뭐든지 그런쪽으로 보인다는 뜻으로 썼어요ㅋㅋㅋ

바람돌이 2021-03-07 19: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제목이 너무 시적이예요. 세상에 보고싶은 책이 너무 많아 정말 곤란하다구요

미미 2021-03-07 19:59   좋아요 2 | URL
그러게 말입니다. 많아서 행복한데 시간자원은 한정적이어서 괴로워요ㅋㅋ제목이 블레이크의 시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했던것 같아요~♡ 전체 느낌도 저한테는 시 적이었어요^^*

행복한책읽기 2021-03-08 11: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알라디너들은 책들에 의해 삼켜지리라!!! 미미님 이 글은 요 문장으로 요약하겠슴다요. ㅋㅋ 한 손엔 망치를. 다른 손엔 못을 들고서 말이지용~~~^^

미미 2021-03-08 12:31   좋아요 0 | URL
오~♡ 책읽기님 센스!! 어쩐지 무서우면서도 좋은데요?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