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의 기분 - 한문학자가 빚어낸 한 글자 마음사전
최다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의 믿음은 경전으로 남았고 인간의 선과 악은 법의 조문으로 남으며

인간의 사랑과 미움은 문학으로 남았다.

-뒤표지 박준 시인의 추천사 中-

한글은 정말 대단한 문자인 것 같다. 같은 모양의 글자를 어떻게 읽느냐 어느 문맥에 놓느냐에 따라 달리 읽히니 말이다. 예를 들자면, 밤, 배 뭐 그런 단어들... '한자'도 내겐 그러했다. (띄어쓰기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한문을 의미하는 한자와 한개의 글자를 의미하는 한자라는 두가지 의미로 내게 읽혔기 때문이다. 한문학자가 쓴 산문집이니 한문이야기겠거니 하면서도 차례에서 한글자한글자 새겨놓은 한개의 글자리스트들을 보면 그게 왠지 이 책의 진짜 '한자'같았다.

기분을 말해줄 정확한 언어를 찾는 것만으로 덜 외로울 수 있다. 한자의 세계 안에 살면서 내 언어는 한자라는 문자가 지닌 결을 닮게 되었다. 한자가 인간의 사고와 감정을 형상화하는 문법을 따라 생각하고 느끼며, 말하고 쓰게 된 것이다. 여러 방향으로 가지를 뻗은 획들이 반듯한 네모 안에 모여든 채 긴 의미를 함축하는 한자, 한자가 짓는 표정의 기분을 읽어나가다 보면 내 마음의 궁색한 어느 구석이 소환되었고 비로소 그늘진 마음의 목소리를 명쾌하게 들어보 수 있었다. (p. 10) 이 책은 모양도, 역사도 각기 다른 여러 한자의 기분에 기대어 풀어지고 매듭지은 기록장이다. 내 기분을 맡길 한자를 골라, 한자의 기분을 빌려 나의 기분을 말해보는 일의 반가움과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p. 11)

-프롤로그 中-


'한자'가 표의문자이기에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몇개의 글자 아니 한개의 글자로도 그 글자에 새겨진 의미가 의외로 길 수 있는 문자가 표의 문자니까. 그 길수도 짧을 수도 있는 글자 하나로 지금의 나의 기분을 의미로 연결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한자를 많이 안다면 그렇게 해보고 싶어질 것 같다. 무언가를 의미심장하게 압축하여 표현할 수 있다는 것, 매력적이지 않은가.

차례를 보면 '기분'으로 한글자한글자 리스트가 적혀 있다. 살아 있다는 기분, 색깔의 기분, 얼룩을 닦는 기분, 떠나는 기분, 알고 싶은 기분, 집에 온 기분, 계절의 기분, 쓰는 기분, 옮기는 기분, 읽는 기분 헤아리는 기분, 살고 싶다는 기분. 이 기분들은 때론 저자의 '기분'으로 찾아낸 글자일 수도, 한자라는 글자 자체를 연구하며 모아놓은 글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의 기분이라는 것이 주관적이므로 저자의 기분과 같은 기분을 느낄 수는 없겠지만 그 기분을 한문이라는 글자로 그것도 단 한개의 글자로 표현해 놓고 보니 읽는 내내 오히려 저자의 기분을 나름 전달받고 공감하는 느낌이 들었다. 에세이를 즐겨 읽지 않는 내겐 '기분' 보다도 '글자'로 소통되는 산문이었기에 '한자'라는 함축적 의미로 소통하는 글들이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기도 하다.

첫 한자부터 그랬다.

名 이름 명

'인공의 빛이 없었떤 과거의 세상. 해가 떨어지고 나면 어둠이 얼굴을 지웠기에,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말하여 본인을 증명해야 했다. 저녁[夕]과 입[口]이 만나 이름[名]이라는 글자를 이룬 것은 그래서다. ' (p. 15)

예전에 학창시절에도 이런식의 한자풀이가 가능한 한문을 배우는 시간은 참 재밌었다. 고대인들의 그럴싸한 글자만들기 이야기가 재밌었는데... 모든 한문으 그런식으로 만들어진 건 아니라서 모든 한문이 재밌지는 않았기도;;;; 여하튼 이 책의 시작이 참 마음에 들었다. 한자 이야기들이 너무 재미있어서 사실 저자의 '기분' 보다는 한자 읽는 맛으로 책장이 빠르게 넘어갔다.

坐 앉을 좌

'두 사람(人人)이 나란히 땅에 앉아 있다. 주어진 좁은 자리를 나누어 앉아 함께 땅을 덥히는 시간이 '坐'라는 글자에 담겼다. 애초에 혼자가 아닌 둘이 행위의 주체였던 '坐'의 비밀을 알고 나서는 지금 같은 공간에 '앉아 있는' 우리 사이가 새삼 애틋하게 귀하겨 여겨졌다.' (p. 22)

한문이 새겨지는 과정이야기, 그 의미 이야기에 지금의 우리가 느낄 법한 '기분'으로 자연스레 연결되는 이런 문장들이, 빠르게 넘기는 책장들 사이에서도 콕콕 마음을 두드렸다.

來 올 래

'來 자는 갑골문에서 보리의 형상으로 그려져 있다. 고대인들은 상서로운 곡식인 보리를 하늘에서 내려주는 것이라 믿었다. 하늘로부터 온다는 의미가 번져 '來'자는 '오다'를 말하는 글자가 되었다.' (p. 33)

하늘이 곡식을 내려준다는 믿음 같은건 옛말인지 오래되었다. 하늘이 비를 내리는 게 아니라 수증기가 모여 구름이 되고 비가 내리고...어쩌구저쩌구...과학적으로 우리는 옛 믿음들에 대해 많은 것을 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천벌은 무섭고 하늘이 아니라면 우주 어딘가에 뭔가가 올것 같고 한걸 보면 인간사는 고대와 그닥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하튼 '來' 라는 글자가 보리였구나...

夜 밤 야

'팔을 벌리고 선 사람의 겨드랑이 아래 옆구리 뒤로 달이 떠있다. 이것은 밤 '夜'자가 품은 장면이다.' (p. 46)

行 다니다 행

'여행의 '行'자는 십자 모양의 사방으로 갈린 사거리를 본뜬 글자다. '行'자는 곧 그 갈림길을 걸어 다닌다는 의미다.' (p. 81)

이런 식의 한문 자체의 한자 이야기가 개인적으로 재밌지만 이 책의 제목에서 그러니까 '한자의 기분'에서 주인공은 '한자'가 아니라 '기분'이다. 따라서 한문 자체의 이야기보다는 그 한문과 저자의 어떤 기분이 왜 연결되었는가가 주로 쓰여진 산문집이다.



기분에 낀 연기煙氣를 해소하는 가장 빠르고 손쉬운 방법은 글을 쓰는 것이다. 어디에서 어떻게 응결되어 마침표 찍을지 미상인 글을 일단 시작해 써나가는 것. 소복소복 무참히 쌓여오던 시절의 기분을 노트북의 흰 창, 수첩의 백지에 어떤 모양새로든 끄적여 내려가다 보면 통쾌한 문장이 탁! 하고 떠오르는 때를 반드시 만난다. 어떤 문장은 부채가 디어 자욱했던 기분의 연기를 훨훨 날려주기도 하고, 어떤 문장은 색안경이 되어 매캐한 연기를 산천에 낀 우아한 안개로 둔갑해주기도 한다. 머지않아 연기가 걷히거나 혹은 연기를 잊게 될 순간에 도착해 비로소 후련한 숨을 내쉴 수 있게 되리라 믿기에, 어딘가 갇혀 있는 기분일 때에도 떠오를 미래에 많은 걸 맡겨 둔다. (p. 163)

읽다보면 저자가 느꼈던 비슷한 기분의 어떤 때가 떠오르기도 한다. 나라면 그때의 그 기분을 함축하여 어떤 한자로 대신할 수 있을까...생각해보기도 한다. 중요한건 한자를 알고 모르고가 아니다. 한자를 많이 안다면야 아 이 기분엔 이런 글자를! 할 수 있겠지만 한자를 몰라도 상관없을 것 같은 것이, 길고 어지러운 기분을 단정하게 줄이고 함축해본다는 시도가 중요한 것 같아서.

내가 시도해보는 노력은 생활을 무심코 채운 단어와 글자들의 정중앙으로 파고 들어가서 그 진짜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일이다. 일상에서 무심코 발음하는 단어들을 구서안 한자 그리고 그 한자가 뿌리 깊은 이야기를 돌아보는 일이 나의 기분, 나아가 누군가의 기분을 명료화하는 데 기여했으면 좋겠다. (p. 266)

- 에필로그 <기분의 뿌리> 中-

뒷표지 박준 시인의 추천사 처럼 이 책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감상적이다. 그러니 한자를 잘 모른다고 괜히 두려워하지 말고 용감하게 이 책을 펼쳐들길 바란다. 굳이 차례대로 읽지 않아도 된다. 이 책을 펼친 순간에 내 눈에 꽂히는 그 한자의 페이지로 가서 한두페이지 읽고 나면 깨달아 진다. 아 이런 기분을 이런 한자로, 이렇게 한글자로 정리할 수 있었던 거구나 하고.

무언가를 정리한다는 것은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주변의 물건들을 정리하고 주변의 사람들을 정리하고 주변의 많은 것들을 정리하면서 정작 그날그날의 내 기분을 정리하며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이 책을 천천히 곁에 두고 읽으며 한번 시도해 보자. 내 기분을 '정리'하는 일 말이다. 그렇게 잘 정리되고 정돈된 기분이 내 삶을 보다 명확하게 해줄 수 있을 지도 모르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