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우 없는 세계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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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해 더없이 악독해질 때마다 거짓말처럼 '경우'가 있었다

누구나 한번쯤은 지독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의 우리에게 바치는 편지

<유원>이라는 작품을 통해 백온유 작가를 알았다. 청소년문학의 새로운 샛별 백온유 작가의 등단작은 앞으로의 활동이 궁금해지게 만드는 확실한 눈도장을 찍은 작품이었다. 그러니 이번에 새로 출간된 신작, <경우 없는 세계>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있을까.

미리 스포?를 살짝 하자면 이번 작품도 상처를 가진 청소년 시절의 이야기이다.

정말 이번 겨울은 포근한가. 하기야 이번 겨울에는 수돗물이 얼까봐 싱크대와 세면대 물을 조금씩 틀어놓고 출근한 적이 없었다. 지난주에 눈이 오긴 했지만 옥탑에 쌓이지도 않았고, 모두가 따뜻하다고 하니 그런 거겠지. 그렇다면 내 살갗을 에는 듯한 이 한파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고 언제 긑나는 걸까. (p. 7)

인수는 서른을 넘긴 어른나이이고 착실하게 공장에 다니며 성실한 삶에 노력중인 청년이다. 하지만 인수에게는 남모르는 고통이 있었다. 사시사철 파고드는 추위, 겨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한여름에도 곧잘 시퍼렇게 입술이 질릴 정도로 몸이 차갑게 얼어붙곤 했다. 히터를 틀고 전기장판을 켜고 온수에 몸을 녹이려해봐도 잦아들지 않는 추위... 언제부터였을까...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집을 나와 가출팸을 떠돌던 열일곱 그때 그 일이 있고 난 후...

"일단 전화를... 보험사에, 아니면 병원부터 가는 게 나을지... 부모님을 불러야 될 텐데"

"아니요, 안 하셔도 된다고요"

나는 아이를 바라보다가 다시 귓속말로 말했다.

"저번에도 이랬잖아. 지금 신고할까, 아니면 그냥 조용히 따라올래"

그제야 눈치를 챈 운전자가 아이를 아래위로 훑은 후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 노발대발했다.

"일부러 그런 거니? 설마 자해공갈 뭐 그런 거야?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사기를 치려고 해, 감히? 그냥 이렇게는 못 넘어가지" (p. 16)

여느날 처럼 옥탑방에서 나와 햇살에 몸을 쬐이던 어느날 이었다. 인수는 무심히 골목길을 보다가 한 아이의 행동을 보았다. 그리고 얼마후 같은 행동을 하려는 아이 앞을 자신도 모르게 막아서게 된다. 자신의 명함을 건네주면서까지 운전자를 달래고 양해를 구한뒤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렇게 열일곱 이호를 만났다.

사람 속이는게 쉬운 줄 알아? 특히 나 같은 애는 웬만해서는 안 믿어주거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 상대방이 납득할 만큼 내가 아파줘야겠지? 그쪽에서 의심할 수도 없고 반박할 수도 없게 내가 망가져야 되는 거야. 제대로 부러지고 제대로 찢기면 사람들은 '내가 사고를 냈구나' 겁먹고 내가 해달라는 대로 해주거든. 그래서 솔직히 나는 죄책감 같은 거 별로 안 들어. 나는 사람 속이려고 아픈 척 연기하지 않거든. 그 순간에 나는 진짜로 아파. 존나 아파서 죽을 것 같아. (p. 25)

이호를 보며 인수는 열일곱때 만났던 A를 떠올렸다. 그때 그시절 자신의 모습도...

'제대로 부러지고 제대로 찢기면' 사람들은 미안해한다. 하지만 얼마나 부러지고 찢겨야 제대로 다친 것일까? 인수도 아픈 척 연기한 적 없이 진짜로 아팠는데 인수의 부모는 인수의 고통을 알지 못했다. 끝까지... 사고를 낸 사람들이 항상 미안해하는 건 아니었다. 뺑소니도 있었고 적반하장도 있었다...

인수는 이호에게 아무때나 편히 와서 자신의 옥탑방에서 자고 가라고 했다. 잘곳이 없어 헤매는 거리의 아이들 상황을 인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가출을 하고서도 내가 한 게 가출이라는 생각을 못했다. 그저 아버지와 부딪치지 않기 위해 자리를 피하는 것,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깃든 경멸과 혐오를 참지 못해서 잠시 24시 카페나 패스트푸드점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에 불과했다. 가출이라는 단어에는 투쟁심이나 반항심 같은, 결연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하는 것은 회피나 은신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p. 32)

인수의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사업가였고 그런 자신을 자랑스러워했지만 인수의 어머니에게 수시로 주먹을 휘둘렀고 인수의 아둔함에 화를 냈다. 인수의 어머니는 남편의 폭력을 묵묵히 견녀냈고 남편이 기분좋을 땐 사이좋은 부부처럼 지냈으며 인수가 그저 좀 느린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에겐 너무나 쉽게 하던 용서를 인수에겐 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겐 공포와 분노를 어머니에겐 서운함을 넘어 배신감을 느끼며 인수는 코앞에 있는 집임에도 점점 더 들어갈 수 없게 되어갔다.

무료급식소에서 경우를 만났을 때, 경우는 중학생 남자아이 두 명과 함께였다. 나는 사실 경우가 자원봉사자인 줄 알았다. (p. 61)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조금 어려 보이는 아이들에게 반찬을 덜어주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한 건 경우에게서 배어 나오는 친절함과 여유가 부러워서였다. 경우는 거의 마지막 차례에 배식을 받았다. (p. 62)

문득 깨달은 것은 경우와 다니는 동안은 사람들이 나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성연과 함께 다닐 때 받는 대우와는 사뭇 달랐다. (p. 93)

인수는 조용하고 말귀가 어둡고 이해력이 떨어져서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이었기에 선생님들은 인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곤 했고 친구들은 인수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곤 했다. 왕따를 당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친구가 있던 적도 없었다. 가출을 한 후 알게 된 성연을 따라다니며 인수는 성연의 활발하고 당차며 거침없는 성격이 부러웠다. 하지만 성연을 따라하려던 인수의 '노력과 상관없이 아이들은 금방 나를 파악했다. 학교를 다닐 때처럼 투명인간 취급을 받은 건 아니지만 아이들은 나를 자신들보다 조금 급이 낮은 인간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p. 78)'

나는 이호에게 어떠한 간섭도 충고도 하지 않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꽤 오래 지켰다. 매일매일 잠자리를 찾아 헤매는 것이 얼마나 고역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이호가 머무르고 싶어할 때 잘 곳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호를 위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호와 가까워질수록 (가까워진다고 느낄수록) 이호를 마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p. 82)

인수는 이호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수 있었지만 여지껏 자신의 처세를 생각해봤을때 이호를 집으로 데려온 것만 해도 대단한 용기였다. 그런 능동성은 여태 가져본 적 없던 인수였다. 하지만 인수는 점점 깨닫게 됐다. 자신이 이호를 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호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을... 그럴수록 인수는 경우가 생각났다....

경우는 성연과 달랐다. 부지런했고 예의발랐으며 구김살없이 사람을 대했기에 알바를 하는 어른들로부터 존중받았다. 가출팸이었어도 함께 머무는 공간을 앞장서 청소했고 무리 사이에 불화가 생기지 않도록 나름의 규칙들을 준수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경우 곁에서 나쁜 짓을 하지 않고도 살아갈 방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p. 94)' 하지만 동시에 경우의 성격이 이해되지 않았다.

특유의 신중함과 타인을 향한 예의를 과연 누구에게서 배운 것일까. 스스로 터득했다기에 그 태도는 너무도 복잡하고 정교한 기술이었다. 사랑을 받은 만큼 고결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면 나는 납득할 수 있었다. 내가 이 모양이 된 이유가 명백해지는 것이니까. 하지만 경우 같은 존재는 왜인지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경우는 자신이 일곱살 때부터 보육원에서 살았다는 것을 어느 날 내게 말해주었다. 함께 지내던 쌍둥이들도 그곳 출신이라고 했다. 경우는 살면서 단 한번도 아버지를 보지 못했고,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로는 어머니와도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p. 99)

인수는 가출팸 아이들을 통해 지금껏 알지 못했던 세상을 알아갔다. 다양한 아이들은 다양한 사연을 품고 있었지만 문득 이해가 되다가도 그렇다해도 그 아이들의 행동이 다 용납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인수는 여기서도 뒤쳐졌지만 그래도 여기선 적어도 쫓겨나진 않았다. 오히려 인수보다도 경우가 더 독특한 존재였다. 그 밝음은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그런 경우게게 자신이 한 행동은... 지금의 이 추위는 어쩌면...

"우리는 안 미쳤는데, 사람들이 우리보고 미쳤다고 하잖아" (p. 176)

나는 절박했다. 그때는 무작정 경우의 행동을 말려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무서웠고, 너무 무서워서 이성적인 판단이 되지 않았다. (p. 177)

"아무도 우리 안 믿어줄걸. 우리가 이렇게 만든 거라고 생각할 걸" (p. 178)

그게 최선인지, 그것만으로 충분한지 그 순간 아무도 판단하지 않았다. 깊게 생각하고 의문을 가지길 포기했다. '우리집'에 모여든 아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상식적이지 않은 결정을 내렸다. 아이들의 불안에 불을 지핀 것은 나지만 그런 나조차 아이들을 경멸했다. 우리는 증오를 받아 마땅한 존재들이었다. 억울해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었다. (p. 188)

억울했다. 억울한 일을 당했고 억울해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었다. 아무짓도 하지 않았지만 증오어린 시선을 받아야 했고 아무 피해도 주지 않았지만 경멸어린 태도를 견뎌야 했다. 불안했지만 주변에 안전하고 안정한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쉽게 보고 이용하고 버리고 의심하고 심지어 미쳤다고들 했다. 이 아이들이 목격한 생애 첫 죽음 앞에서 이 아이들이 한 선택을 과연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나쁜 일을 하지 않고 다들 어떻게 사는 걸까. 반복되는 일상을 저버리지 않고 평화를 일구는 법은 누가 알려주는 걸까. 그런 게 체득이 되는 인간들은 다른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는 걸까. 동이 틀 무렵 창가에 어른거리는 고양이 그림자를 눈으로 좇으며 우리는 망했다고 홀로 중얼거렸다. (p. 196)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때 꼭 쓸모를 따져야 할까.. 심지어 부모자식간에 말이다...

사람이 삶을 살아갈때 꼭 의미있고 가치있는 시간인지를 따져야 할까... 심지어 내삶이고 내시간인데 말이다...

태어남만으로 사랑받고 살아감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디선가 따듯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의 심연에서 바람이 휘돌며 서서히 내 몸을 녹였다. 이런 온기를 오래전부터 꿈꿔왔지만 막상 따스함을 느끼니 내게는 이런 온기를 누릴 자격이 없는 것 같아 괴로워졌다. 하지만 익숙해지기를 바랐다. 부디 한번 더 기회가 주어지기를. 햇볕을 쬐면 정화되기를. 경우 없는 세상에서도. (p. 258)

다행히 이 소설은 해피엔딩이다. 대개의 청소년문학이 그러하듯이.

가제본으로 읽은 터라 '작가의 말'을 읽지 못해 아쉬웠지만, 이 시대 어른나이의 사람들이 꼭 읽어봐야 할 청소년문학이었다. 세상의 온기가 1도라도 올라가길 바라는 어른나이의 사람이라면 말이다.

ps. 소설의 제목을 보며 <허구의 삶>이라는 이금이 작가의 청소년소설이 생각났다. 그 작품에서도 '허구'라는 이름과 단어로서의 의미는 중첩되며 작가가 부러 그런 것 같았는데... <경우 없는 세계>에서의 '경우'도 작가가 부러 중첩적으로 이름을 지은 것일까. 그런 연장선에서 보자면 A라는 이름?!과 이호 라는 이름 또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수'라는 이름또한 그런 중의적 이름으로 이해되어 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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