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의 세 딸
엘리프 샤팍 지음, 오은경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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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프 샤팍

1971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외교관인 어머니를 따라 미국과 영국, 요르단과 스페인 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현재는 이스탄불에서 거주하고 있다. 소설가이자, 정치학자, 여성학자로서, 튀르키예의 역사, 종교, 젠더 문제, 정치적 혼란에 관한 통찰력 있는 글을 쓴다.

대중서로 잘 알려진 영미권 작가 몇명 외에 외국 작가들을 거의 모른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뿐 작품을 몇 읽기는 했었는데;;; 하지만 터키 작가로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으니 바로 오르한 파묵 이다. 몇 년전에 <내 이름은 빨강> 이라는 소설을 통해 알게 됐는데 작품과 작가 모두 깊게 기억될 만큼 인상적이었다. 그 진한 터키향이라니! 그 역사성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새로 나온 소설 <이브의 세 딸>이 터키 작가의 소설이라는 안 순간 바로 픽! 그런데... <이브의 세 딸>은 터키소설이라기 보다는 그냥 현대소설이었달까. 재미있긴 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터키향은 없었던... 어쩌면 오르한 파묵이 부모세대이고 엘리프 샤팍은 자녀세대라서 격세지감이 그 사이를 벌려놓은 것일지도... 어쨌든 굉장히 흡인력 강한 소설이긴 했다. 그야말로 시간순삭?!

제 아무리 겉으로 이성적으로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광기를 품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녀는 자신이 유순하지도, 귀엽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통제력을 잃을 가능성이 다른 여자들에 비해 몇 배는 더 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솔직히 '가능성'이라는 건 맞지 않은 말이었다. 한때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서구화되고, 민주적이며, 세속주의의 국가의 모델'이 될 것이라고 여겨졌던 튀르키예도 결국에는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한 나라가 되지 않았던가? (p. 7)

작가는 소설 속에서 현대 터키의 상황을 힐난하고 있지만 작가의 이력을 보건대 작가가 얼마나 터키적인 터키인인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이스탄불 이라는 독특한 도시가 터키의 대표도시이기는 하나 과연 가장 터키적인가 라고 생각하면 그또한 확신할 수 없다. 어쩌면 모든 정체성이 혼란스러운 곳 그곳이 터키인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인지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페리는 한마디로 '혼돈'적 자아를 지닌 여성이었다. 페리는 '겉보기에만 좋은 사람이 아니라, 좋은 아내이자 좋은 엄마, 좋은 주부, 좋은 시민, 현대적이며, 세속적인 무슬림이었다. 이 나라가 겪은 격동적인 혼란은 결국 전부 그녀의 삶에도 녹아 있었다. 그녀의 삶과 과거, 다시 말하면 페리의 인생 이야기는 결국 튀르키예의 역사엿다. 페리가 느끼는 혼란은 튀르키예라는 나라가 겪는 국가적 혼돈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p. 9)' 작가는 터키에서 튀르키예로 나라이름까지 바꿔버린 혼돈의 현재를 페리라는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려 했는지 모르겠지만 글쎄... 그렇게 거창하게 확장되기 이전에 그저 한 여성의 이야기로 읽히고 그렇게 한 개인의 서사로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책이었다.

신앙과 정체성 문제는 날반트오울루 가족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 유성처럼 떨어졌다. 그리고 가족을 둘로 쪼개 버렸다. 신앙심이 아주 깊은 민족주의자 작은 아들 하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엄마 편에 섰다. 큰아들 우무트는 한동안 결심을 못 하고 있었지만, 말과 행동에서 좌파 성향임이 분명히 드러났다. 마침내 좌파의 길을 확실히 선택했을 때는 급진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양분된 상황은 페리를 힘들게 했다. 아빠 멘수르도, 엄마 셀마도 그녀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엄마의 완강한 종교적 믿음과 아빠의 단호한 유물론 사이에서 페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페리는 가능한 한 그 누구의 마음도 상하지 않고, 상처를 받지 않기를 바라는 아이였다. (p. 38)

2016년 현재와 과거를 왔다갔다하며 서술되는 이 소설은 현재는 파티의 어느 날 하루로, 과거는 페리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의 그 하루로 점차 다가와 합쳐지는 구조를 하고 있다. 페리가 일곱살 때부터 어떻게 성장해서 서른 다섯살이자 세 아이의 엄마인 현재로 오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남편의 사업적 파트너의 초대로 파티에 가던 날 페리는 핸드백을 소매치기 당하고 그 과정에서 지갑에 묻어두었던 십수년 전의 폴라로이드 사진 한장을 오랜만에 보게 된다.

페리가 오랫동안 조심스럽게 감춰 두었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보여주지 않았던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이었다. 그건 페리의 아주 오래된 추억이자,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담고 있었다. (p. 42) 중년의 남자와 젊은 여자 세 명이 사진 속에 있었다. 그들은 대학 학사모 가운과 목도리를 하고 얼굴에 미소를 지은 채 나란히 서 있었다. 옥스퍼드 대학교 보드레이안 도서관을 등진 그들은 몹시 추운 어느 겨울날 속에 영원히 갇히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p. 43)

옥스포드를 함께 다녔던 세 명의 친구, 바로 '이브의 세 딸' 이었다. 페리와 쉬린과 모나.

우무트는 불법 공산주의 단체에 가담한 혐의를 받았다. 그는 고문관이 발가벗기고 눈을 가린 상태에서 금속 스프링에 묶어 전기 고문을 가하자 그때 비로소 권총이 자기 거라 인정했다. 고환에 전극을 묶고 두 배의 전류를 흐려보내자, 정부 주요 인상에 대한 연쇄 암살을 계획한 세포 조직의 우두머리라고까지 '자백'했다. 얼마나 고문을 당했던지 이젠 아무것도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죽음의 공포에 질려 그들이 뭐라고 하든 다 인정하고 말았다. (p. 55)

2016년과 1980년대 1990년대를 왔다갔다 하는 사이에 과거 속 몇 에피소드들은 우리네 과거와 너무 똑같아서 이거 한국소설인가? 싶었다. ㅎ 아하... 그래서 터키와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했던가 싶기도 하고.

페리가 하나님을 추궁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시기였다. 엄마가 가르쳐 준 대로 매일 밤 잠들기 전에 기도할 수도 없었고, 아빠가 권한 것처럼 창조주를 무시할 수도 엇ㅂ었다. 그 대신에 페리는 엄마와 아빠에게 말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모든 비난과 불만을 글 포탄을 만들어 하나님에게 날려댔다. 모든 문제를 두고 하나님과 언쟁을 ㅓㄹ였고, 쉽게 대답할 수 없다고 알고 있는 질문들을-아무도 듣지 못하게 낮은 소리로-하나님에게 물었다. 하나님 왜 이렇게 많은 부당한 일을 허락하시는 거죠? 선한 사람들에게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걸 어떻게 보고만 있을 수 있어요?교도소 벽 너머, 감방의 창살 뒤를 보고 들을 수 있기는 하신 거예요? 만약 하나님이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면,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전지전능한 게 아닐 것이다. 아니, 만약 보고 듣고 계신다면, 공정하지 못한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절대 전능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p. 59)

페리는 내향적이고 소극적인 아이였고 성장하는 내내 집안에서 봐왔던 혼란의 원인인 종교적 견해 차이에 어쩔 줄 몰라하는 아이였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공부하는 게 마음 편했고 책속에 파묻히는 시간이 가장 좋았다. 열심히 하는 만큼 우수한 성적을 받을 수 있었고 아빠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넉넉치 않은 경제사정에도 불구 옥스포드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런데 옥스포드에서 한 교수가 '신'에 대해 강의를 하고 있었다. 종교와 신에 대한 질문들을 가득품고 있던 페리는, 더구나 가끔 '안개에 싸인 아기'환영을 보던 페리는 그 강의에 끌릴 수밖에 없었다. '답'을 찾고 싶었다.

본 수업은 고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문헌에서 시까지, 신비주의에서 뇌 과학에 이르기까지, 동양 철학자에서 서양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헌에 기초하여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할때 무엇을 말하는지 탐구한다. (p. 206)

페리는 아주르 교수의 수업을 수강신청했다. 쉬린이 자신을 바꿔놓았다고 극찬했던 바로 그 수업.

소수의 학생들로 구성된 세미나 수업이었던 그 수업에 참여해보니 모나도 있었다.

구성원들은 거의 상극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을 모아놓은 것 같은 각양각색의 학생들로 모여져 있었고, 따라서 시작부터 끝까지 '혼돈'을 체감시켜주었다. 하지만 아주르 교수의 질문과 그가 바라는 이상은 매혹적이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하고자 하는 질문은, 여러분은 신을 연구하기 위해 여러분 자신만의 경이로운 학문을 창조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모두의 학문은 달라야 합니다. 누구도 흉내를 내선 안 됩니다. 박학다식한 사람이 되세요. 다양한 학문을 종합하세요. 신이 궁금하다면 절대 종교에만 집착하지 마세요. 종교적 다툼과 분쟁은 인류를 분열시키고 마음을 닫게 만듭니다. 수학, 물리학, 음악, 회화, 시, 무용에 적용하세요. 예술은 탐구하는 것입니다. 신학도 탐구입니다. 그러니까 신을 믿든 안 믿든 창의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p. 369)

페리는 아주르 교수의 수업에도 빠져들었지만, 아주르 라는 사람 자체에도 빠져들었다. 페리의 심리상태는 아슬아슬했다.

기숙사를 나와 쉬린과 모나와 페리 셋이서 자취를 하게 되면서 그러한 페리의 심리는 더욱 위태로워져갔다. 본인도 주변사람들도 그때는 몰랐었지만.

독실한 종교주의자 모나와 격렬한 반종교주의자 쉬린의 사이에서 페리는 '그녀가 다시 부모와 함께 사는 것 같았다. (p. 472)' 그럴수록 아주르 교수와 그 수업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옥스퍼드의 세 젊은 이슬람 여성 : 한 명의 죄인과 한 명의 신자 그리고 한 명의 방황하는 영혼' 으로 쉬린과 모나와 페리 라는 세 명의 조합이 구성된 것이라는 오해에 빠진 순간 페리는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하고 만다. 친구들과 멀어지고 아주르 교수의 교직생활을 파탄내고 자신의 삶을 죄책감속으로 던져 넣게 될 그런 선택을.

쉬린, 모나 그리고 페리. 무신론자, 독실한 신자, 우유부단한 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중동 문화권의 성난 자매들. 이브의 세 딸들. (p. 502)

이들에게 벌어진 사건은 사실 그리 많지도 그리 크지도 않다. 553페이지라는 상당한 분량을 읽었는데도 마치 단편 하나를 읽은 것처럼, 뭔가 서사가 명확하지 않고 뭔가 이제 시작하려는데 끝난 것 같은.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소설적 스토리를 독자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보다는,

늘 있는 일이다. 처음 있는 일도,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평균 몇 시간 간격으로 반복되는 일이었다. 모든 사건이 통계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해서 말이다. 꼭 잠긴 방문뒤, 뻥 뚫린 마당, 싸구려 모텔 방, 고급 호텔 할 것 없이 한밤중이고 대낮이고 벌어지는 일이다. 이 도시의 사창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보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말도 안되는 이유로 꼭지가 돌아 버린 손님들에게 폭행당하는 콜걸들, 남창들, 늙어 빠진 매춘부들, 길 한복판에서 두들겨 맞고도 경찰서에서 무시당하는 게 더 무서워 경찰서도 못 가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트랜스젠더들, 어떤 이유에서인지 가족이나 선생님들을 무서워하는 꼬마 아이들, 시아버지나 시동생과 같은 방에 있는 걸 두려워 하는 새 신부들,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아서 눈이 돌아간 강박적 사랑의 분노를 경험한 젊디젊은 여자들, 남편의 성폭행을 입 밖에 낼 수도, 그럴 용기도 없어 입을 닫고 속으로 삼키는 주부들, 이런 일은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이었다. (p. 76)

지금 튀르키예의 상황은 달랐다. 전선은 더 명확해졌고 진영은 더욱 뚜렷해졌다. 색깔도 흑백으로 바뀌었고 중도는 사라졌다. 부부 중에 한쪽이 더 종교적으로 독실하고 다른 한쪽이 더 세속주의적인 그런 결혼-자신들의 부모처럼-은 점점 줄어들었다. 사회는 보이지 않는 유리 장벽으로 나뉘었다. 이스탄불은 거대 도시라기보다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여러 공동체 파편과도 같았다. 사람들은 '열렬한 보수주의자'이거나, '열렬한 반보수주의자'였다. (p. 152)

왜 사람들은 '뿌리'에 집착할까? 예를 들면 '가지'도 아름답지 않은가. '잎'과 '과일'도, 물론 뿌리도 사랑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나무 자체를 사랑했다. 뿌리는 땅속과 땅 위로,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그러니까 하나의 선이 아니다. 나무뿌리도 고정-또는 고정관념-을 거부하는데, 사람들에게 반드시 '뿌리에 충실해야 한다'라고 하는 건 얼마나 모자란 생각에서일까? (p. 179)

서구에서 부르주아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고수하고 봉건제에 반대하면서 한동안 진보적인 역할을 맡았었다. 반면, 튀르키예에서 자본가 계급은 진화 과정을 끝내지 못했고, 뒤늦게 떠오른 어설픈 사상처럼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마르크스가 튀르키예에서 공산당 선언을 썼다면 그의 주장은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다. 튀르키에에서 부르주아는 사회를 변화시키기는 커녕 사회에 용해되어 버렸다. 여전히 일관성이 없었고, 신뢰할 수도 없었다. 단 한 번도 독립된 계급이 된 적이 없었다. 이 나라에서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은 국가였다. (p. 194)

소설 속에서 들리는 작가의 목소리는 여성과 정치와 종교에 대해 쉬지않고 굵게 말하려 한다. 그래서 소설적 구성은 약하고 스토리도 빈약한 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단숨에 읽게 하는 매력은 뭘까 신기한 기분이다. 그러니 이 책도 이 작가의 세계도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있나. 오르한 파묵의 터키를 까맣게 잊게 만든 이 튀르키예 소설은 여러면에서 문제작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이 던진 문제를 함께 풀어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일단 이 소설을 읽어봐야 겠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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