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저벨
듀나 지음 / 네오픽션 / 202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듀나 SF월드의 정수 '링커 우주'

그곳에서 펼쳐지는 기상천외한 모험!

개정판 작가의 말에서 "이 책은 종종 불친절하다는 말을 듣는다. 곽재식 작가는 듀나 소설을 [제저벨] 같은 걸로 시작하면 이게 뭔가 하면서 헤맬 수 있다고 친절하게 경고한 적 있다. 하지만 독자들이 과연 작가가 숨겨놓은 모든 레퍼런스들을 다 이해해야 하는 걸까? 모르면 모르는 대로 즐거운 독서가 가능하지 않을까. (p. 301)" 라고 저자는 말했지만, 곽재식 작가의 경고가 맞았다. 이 책은 무척 불친절한데... 나는 듀나 소설을 이 작품으로 시작하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모르는 독서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즐거운 독서는 불가능한 사람이다. 제대로 다 알고 이해하고 넘어가야 만족스런 독서가 된다. 지식을 얻는 책이 아니라 소설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니 내가 이 책을 어떻게 읽었겠는가. (참고로, 이 책은 10년만의 개정판이다. 아마 10동안 계속 불친절한 책이라는 소리를 들어오지 않았을까 싶다.)

"진저는 어딨어요?"라고 묻는 녀석들은 정말 그 농담이 신선한 줄 알까?" (p. 13)

초반부터 내용이해의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프레드 에스테어라는 [스윙 타임}의 필름에서 막 뛰쳐나온 헐리우드 배우처럼 생긴 선의에게 던지는 농담을 농담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나라는 독자는 이책을 대체 어떻게 읽어가야 하나;;; 이게 무슨 지식정보책도 아닌데 모르는 영화 모르는 배우 이름이 나오면 일일이 찾아가며 읽어야 하나? 내가 대체 왜 소설을 읽으며 그래야 하나? 저자는 온통 헐리우드 흑백영화를 총 출동 시켜서 이 작품을 진행하고 있는데...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배우들과 영화들이 아니다.

"뒷바라지할 쿠퍼 몇 마리만 남겨놓고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목석같은 올리비에가 있는 곳에는 늘 아자니가 꼬이는 법. (중략) 하늘을 덮고 있던 우중충한 비구름에 지름이 수백미터가 넘는 구멍이 뚫리고 그 구멍을 통해 수십 마리의 아자니들이 황금 비처럼 쏟아지는 거야. 아자니들이 바닷물 속으로 뛰어드는 동안 지금까지 주변을 먼저처럼 맴돌던 100여개의 빨판 상어들은 중력장의 고리를 끊고 떨어져 나가지. (중략) 간신히 물 위에 떠 있는 빨판상어 안에선 보이는 게 별로 없지. 유리창 하나 난 건 조그많고 바닷물로 더러워져 있으니까. 그래도 그걸 통해 같이 빠진 동료 빨판상어들과 멀리서 다가오는 구조선들을 볼 수 있을 거야. (p. 12)"

올리비에, 쿠퍼, 아자니, 빨판 상어... 무엇보다 링커 라는 것에 대해 책을 다 읽어도 이것들이 대체 뭔지 알수가 없다.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서 왜 오는건지 와서 무엇을 하는 건지 하다못해 생물인지 아닌지조차 알수가 없다. 작가는 이 소설속 세계를 전혀 설명하지도 묘사하지도 않는다. 그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도 모르겠는데 그 세계 속 인물들이 무엇을 하건 집중이 될 리가 없다. 인물들이 하는 일은 현실세계에서의 일과 크게 다를게 없고 (사람이 하는 일이 현실이나 미래에서나 거기서 거기랄까;;;) SF라는 장르가 현실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를 배경으로 함으로써 특별하게 읽히는 건데 이 소설의 세계는 당췌 무슨 세계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우주도 세계도 제쳐놓고 인물들과 사건들을 읽다보면 이건 SF라기 보다는 현실풍자 내지는 우화처럼 읽히는 거다. (왜 우화처럼 읽히는지는 뒤에 다시 언급할 예정)

크루소 태양계는 연성계입니다. 우리가 사는 크루소 알파와 그 주변을 1만2000년 주기로 도는 적색 왜성 크루소 베타가 있지요. 거기엔 디트리히가 네 개인가 있습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소행성에 뿌리를 박고 공항 구실을 하는 올리비에들이 잔뜩 있고, 웨인과 기네스들이 메뚜기처럼 소행성 사이를 폴짝폴짝 뛰어다닌답니다. (p. 15) 문제는 아자니들이 거기 있기를 싫어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놀기 좋아하는 아가씨들은 가르보에서 내리자마자 광속의 99.999999... 퍼센트로 여기까지 휙 나라오는 겁니다. 미처 내리지 못한 운 나쁜 승객들을 끌고 말이죠. 그림이 그려집니까? 딱 <공포의 보수>라니까요! (p. 16)

디트리히도 웨인가 기네스도 가르보도 끝까지 무엇인지 설명되지 않는다. 또 옛날 헐리우드 영화 <공포의 보수>는 말할 것도 없이 당연히.

제저벨은 배의 이름이다. 귀여운 곰돌이 외형의 선장과 앞서 언급한 회색인간 선의 프레드 그리고 항해사와 엔지니어 그리고 외형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요리사 아주머니. 이들은 베티 데이비스 여사(당연히 난 누군지 모른다!!!)의 초상화가 그려진 제저벨을 타고 다니며 바다에 떨어진 사람들을 구조하는 일을 하고 종종 다른 의뢰도 받곤 하는데, 이번엔 바다에 빠져있는 도서관큐브를 찾아달라는 의뢰였다. 그런데 이 큐브를 획득하자마자 제저벨에서는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로즈 셀라비라는 군함이 제저벨을 추적해온다. 로제 셀라비는 곰돌이선장이 8년간 혹독하게 일하다 탈출한 곳이었다.

"내가 돕고 있는 게 누군지는 말할 수 없어. 하지만 이게 보다 큰 그림의 일부라는 건 말해줄 수 있지. (p. 54)"

도서관 큐브와 로즈 셀라비 잠입 건은 정말 큰 그림의 일부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크루소 알파라는 행성에서의 존폐를 건 사건들이 시작된다. 사건이 점점 중요해지면서 화자도 프레드 에서 점점 더 중요해지는 항해사로 바뀐다.

마리아 부츠는 아름다운 곳이었어. 적어도 사람들이 정착한 제1대륙은 그랬지. 거대한 바다와 혼란스러운 해류 때문에 날씨가 변덕스럽고 폭풍이 심하긴 했어도 그곳은 링커 바이러스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폭발 진화한 아름다운 생태계가 있었고, 도시를 짓고 농장을 세울 수 있는 공간도 충분했으며, 링커 기계의 관심은 주로 극지에 쏠려 있었어. 다들 이보다 이상적인 식민지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 (p. 60)

선의 프레드는 이야기하는 걸 즐겼는데 그중에서도 자신의 고향 행성 마리아 부츠d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했다. 링커 바이러스, 링커 기계, 링커 우주... 수시로 나오는 링커 라는 게 무엇인지 아무리 읽어도 알수가 없다.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여하튼, 인류의 후손에 마리아 부츠에 정착하려 했는데 올리비에들이 떠나면서 마구 파괴시키고 간 바람에 정착민들은 모든 것을 맨손으로 다시 시작해야 했다.

문제는 지식이었어. 폭풍으로 도서관과 대부분의 정보 저장 장치가 파괴되었거든. (중략) 정착민 절반은 도서관 건물 안에 들어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들을 종이에 옮겼어. (중략) 이 백과사전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어. 필수적인 과학 지식이야 비교적 쉽게 재구축할 수 있지. 하지만 인문학 지식은 어떨까? (p. 62) 인류 문화의 보고라는 예술 작품들은 어떻게 하나?(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부츠의 사람들은 최선을 다했고 종종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어. (중략) 마리아 부츠의 도서관에는 온전한 책 대신 제목과 줄거리가 적힌 목록들이 들어섰어. (중략) 이래 놨으니, 마리아 부츠 사람들이 창작욕에 달아오른 건 당연하다 하겠지. (p. 63) 언젠가부터 마리아 부츠의 사람들은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어. 피부와 머리칼은 색을 잃었고 성격은 내성적이 되었으며 몽상은 늘어만 갔지. (중략) 마리아 부츠가 꿈꾸는 건 지구였어. (중략) 우리들은 제목만 남아 있는 책들을 수백번씩 다시 썼고 그림들을 다시 그렸으며 영화들을 다시 찍었어. (p. 64) 이런 시기가 지속되자, 더 이상 지구는 지구일 수가 없었어. 우리는 실제 지구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이제 별 관심이 없었어. 지구는 오로지 꿈의 재료였어. (중략) 고립기는 표준력으로 16년 전에 덜컥 끝나버렸으니 말이야. 올리비에 다섯 마리가 제3대륙에서 뭔가 근사한 일을 하려고 다시 우리 별을 찾았던 거야. (중략) 그러는 동안 그들 몸에 붙어온 밀항자들이 우리를 찾았어. 그 사람들은 우리에게 도서관 큐브를 하나 던져주었어. 거기엔 우리가 필사적으로 재현하려 했던 지구와 관련된 모든 지식들이 들어 있었어. (p. 65) 아무도 더 이상 우리만의 지구를 꿈꾸지 말라고 하지 않았지. 하지만 '진실'과 '사실'이라는 단어의 힘은 예상보다 훨씬 컸던 거야. 진짜 샬럿 브론테의 책들을 읽을 수 있게 되자, 우리가 쓴 수많은 [제인 에어]들은 그냥 덧없게 느껴졌어. 그중 몇 권은 심지어 원작보다 더 나았는데도 말이야. 그렇다고 우린 원작을 그냥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어. 진짜 [제인 에어]는 우리에게 너무 생생해서 오히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유령이었어. 마리아 부츠는 공황에 빠졌어. 자살률이 늘어나고 출산율은 떨어졌지. 이 혼란기가 몇십 년은 갈 것 같았어. (중략) 열세 살이 되자, 나는 마리아 부츠를 떠났어.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버리고 우주로 날아갔지. 그게 우리에겐 유일한 해결책이었던 것 같아. 몇백 년 동안 마리아 부츠를 지배해온 꿈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어. 그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는 건 현실 세계의 행동이었지. 그리고 현실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움직여야 했어. 어쩌다가 운이 나빠 차단 상태에 빠지면 주저앉아 전에 꾸었던 꿈을 다시 꿀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p. 67)

마리아 부츠 라는 행성의 운명은 이 책속에 등장하는 세계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곳에 떨어졌다 - 기존의 지식을 잃어 재구성하면서 꿈을 꾸기 시작했다 - 꿈을 꾸면서 새로운 삶이 안정화 되었다 - 기존의 지식이 다시 돌아왔다 - 혼란과 우울에 빠졌다 - 떠나거나 계속 헛된 꿈을 꾸는 수밖에 없었다 ... 라는 순서랄까. 꿈이 현실의 촉매제가 될수도 있지만 그 꿈이 유령이나 망령이 되어버리면 현실을 파괴시킬 수도 있었다.

선장에게 섹스보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우주시대 이후 더욱 막강해진 트레키들의 위세였다. 과거 지구에서 이들은 우스꽝스러운 소수였다. 하지만 지금 이들은 인구수만 따진다면 교회마피아를 능가하는 당당한 문화 집단이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링커 우주는 할리우드 배우들이 라텍스 가면을 쓰고 외계인 흉내를 내는 <스타 트랙>의 우주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어느 누구도 스스로 움직이는 우주선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p. 82)

트레키 라는 단어를 사전검색하면 '스타트렉의 팬'이라고 나온다. 하지만 스타트렉을 거의 본적이 없는 나로서는 링커 못지 않게 그저 마냥 새롭고 알수 없는 단어일 뿐이다. 여하튼 작가는 스타트렉 뿐 만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의 광팬이고 영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하는 사람인것 같다. 영어를 영어로 써놓으면 나같은 영알못은 읽지도 못하겠지만 영어를 한글로 써놓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트레키 니 링커 니 할리우드 영화 제목들이니 다 영어와 미국문화를 익숙해 하는 사람은 익숙할지 몰라도 나같은 영알못에게는 외계어와 다를 게 없다. 그래서 이 책이 (과학과 상관없이) sf 인 것인지도.

여하튼, 프레드는 과거에 시드니와 약속을 한 적이 있기에 시드니가 죽은 지금 그 아들이 요청한 일을 해야만 한다. 독일군과 소련군으로 나뉘어 2차세계대전을 끊임없이 재현하고 있는 전쟁놀이터 토요일에 가야 하는데 그 토요일에서 한때 전쟁광으로 살았던 사람이 항해사였다. 제저벨 일행은 항해사의 안내를 받아야만 토요일에 가서 의뢰받은 물품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 물품은 일종의 로봇이었다.

크루소는 편견 때문에 살기 힘든 곳은 아니었다. 1미터짜리 곰인형도 2미터짜리 고양이 인간도 특별히 꿀릴 것 없이 살 수 있는 곳이니 인종차별은 무의미했다. 양성의 경계가 붕괴되고 있었으니 지배적인 성차별이랄 것도 없었다. 다양한 종류이 편견과 차별이 존재했지만 그 수명은 대부분 길어도 한 세대를 넘기지 못했다. 편견이 그 이상 유지될 수 있을 만큼 특정 무리가 오래 유지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지금은 블랙 지하드 때문에 목요일의 평판이 안 좋고, 교회 마피아 역시 그렇게 인기가 있는 무리가 아니었지만 이들 역시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생물학적 후손을 남기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이 별에서 종교는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어려웠다. 하지만 베들레헴들은 예외였다. 베들레헴들은 단순한 정신병자들이 아니었다. (중략) 그들은 단지 평범한 인간들과는 전혀 다른 정신 구조를 갖고 있었다. 링커들의 장난에 놀아난 두뇌가 어느 단계부터 인간 두뇌의 영역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p. 113)

항해사는 2미터 고양이인간이었고 엔지니어는 베들레햄이었다. 곰인형 선장에 할리우드 배우의 얼굴을 지닌 회색인간 프레드 까지 제저벨의 구성원은 하나같이 독특하다. 마지막 구성원 요리사 아주머니에 대한 정보는 없다. 이 각양각색의 구성원들이 한 팀을 유지하고 있는 데에는 요리사 아주머니의 출중한 요리실력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말이다. 다른 책에서 저자가 링커 우주 관련 작품을 썼다면 이 요리사 아주머니 에피소드도 있을 것 같은데... 이 책에선 더이상 알수가 없다. 여하튼, 베들레햄이라는 명칭이나 그 존재성에서는 여러모로 기시감이 느껴진다. 이 소설은 읽으면 읽을수록 배경과 사용하는 낯선 단어들 외에는 SF라고 여길만한 것들이 별로 없다. 그냥 현실세계를 외계어로 바꿔 풍자하고 있는 우화처럼 읽히는 사건들.

토요일에서의 작전?!은 나름 성공적으로 끝나고 이제 장소는 레벤튼으로 넘어간다. 항해사의 고향이었던 섬 레벤튼, 과거 그 섬에서 잔혹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은 그저 한 미치광이가 벌인 일이 아니었다.

레벤튼 섬의 다른 사람들처럼 나는 열두 살 무렵부터 잠을 잃었다. 잠을 잃는 것은 어른이 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앞으로 각성된 상태에서 스스로의 꿈을 통제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외부 우주와 내부 우주가 충돌하며 발생하는 혼란 속에서 스스로를 지킬 힘을 키워야 한다는 뜻이다. (p. 155) 여전히 수정 같은 각성이 유지되는 동안 나는 의식적으로 모든 사고를 중지하고 정신에 빈 공간을 만들었다. (중략) 그곳은 온갖 종류의 꿈으로 채워졌고 그것을 현실과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중략) 이것은 병이다. 외부의 물리적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생명체는 살아남지 못한다. (중략) 두 세계를 의식적으로 갈라놓을 수 있는 자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레벤튼의 아이들은 그 방법을 배워야 했다. 온전히 의지력으로 이 테스트를 통고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뇌수술이나 칩 이식, 화학 요법이 따라주어야 했다. 그렇다고 해도 뇌를 망치지 않고 잠을 되찾는 아이들은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꿈과 함께 살아야 했다. 나에게 그 해결책은 전쟁이었다. (p. 156)

항해사는 레벤튼의 아이였다. 스스로의 의지로 전쟁터로 갔다. 그리고 뇌수술이나 칩 이식, 화학 요법 없이 크루소에서 살아남았고 계속 살아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베들레헴 엔지니어가 있다. 레벤튼에는 더이상 주민이 없다. 연구소에 연구원 한명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섬에 제저벨과 다른 배 하나가 도착하게 된 것이다. 레벤튼 섬이 과거와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사람 대신 나비떼가 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생태계와 환경도 그 나비떼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크루소가 링커 우주에 편입된 것이 표준력으로 2000년 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목요일의 최근 발굴을 통해 크루소에서 5만년 전에도 잠시나마 링커 진화와 유사한 사건이 일어났음이 증명되었다. 그것은 정말 링커 진화였는가? 그랬다면 무엇이 링커 네트워크의 확장을 막았는가? (p. 161)

링커 생물학에 대한 전문가들의 지식이란 뻔하다. 입증된건 별로 없고 해석을 기다리는 정보는 너무나도 많다. 오로지 올리비에와 아자니들만이 모든 걸 알고 있다. (p. 169)

서기2천년, 5만년의 인간의 역사 는 지구의 역사와 시간배경이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지구의 역사 역시 밝혀진 것보다 밝혀야 할 정보들이 훨씬 많다. 무엇보다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은 작가뿐이다. 올리비에와 아자니가 대체 뭔지 링커 가 대체 뭔지 읽어도 알수 없는 이 정보들에 대해서 말이다. 끝까지 알려주지 않을 거면 대체 독자들은 어떻게 그 정보에 접근해야 하나? 오로지 작가만이 알고 있는 그 정보들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는 링커 기계들을 신처럼 생각합니다. 적어도 올리비에는요. 올리비에는 지성을 가진 모든 존재가 수렴 진화해서 모일 수밖에 없는 유일한 종착역입니다. 신이고 플라톤적인 완전체지요. 웨인, 쿠퍼, 기네스는 그 신을 돕는 천사들이고요. 우린 아직도 이 정의와 구분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왜 그래야 합니까. 우린 아직도 링커 기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p. 181) 은하계 전체가 링커 우주는 아닐 것이고 아직 남아 있는 다윈 우주 어딘가엔 링커 우주의 습격을 이겨낼 만큼 발전한 문명도 분명 있을 겁니다. (p. 182)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링커 기계들이 우리가 그 진상에 접근하는 걸 원치 않는다는 것이죠. (p. 183)

앞서 이 책이 현실풍자처럼 우화처럼 읽힌다는 언급을 했었다. '삼위일체! 대속! 말씀의 순수성! 말씀의 완성! 말씀의 전파! 창조와 종말! 유일신!" (p. 209) 그리고 정신병자 취급을 받던 베들레햄들은 뭉치고 전쟁을 벌이고 이기고 자신들의 나라를 세운 이야기 등 어떤 현실을 풍자했는지 거의 직설에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가? 또한 약탈하고 무의미한 전쟁을 하고 광신도가 넘쳐나는 사회는 굳이 sf일 필요도 없이 그냥 현실이었기에 아무리 외계어를 남발해도 우화로 읽힐뿐 sf로 다가오지 않는 사건들이었다. 게다가 플라톤적인 완전체라니... 작가는 소설의 여기저기에서 자신의 영화지식 뿐만이 아니라 인문학적 문화적 지식을 뽐내느라 열심이다.

'인문학 지식은 어떨까? (p. 62)' '지금 베수비오 지하족 이야기를 하는 거야? (p. 69)' '그들에게 전쟁이란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폭력적인 수단이었지. 클라우제비츠가 정의한 진짜 전쟁이었던 거야. (p. 119)' '하여간 이것으로 우리의 성배 찾기는 일단 종결된 셈이지 (p. 133)' '연구 대상은 언제나 찰나의 일부이며 엠마 보바리나 플로리아 토스카처럼 짧은 시간 동안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린다. (p. 160)' '세뇌 벌레(종교적 믿음을 숙주에게 강요하는 화학물질) p. 170) - '말씀'에 복종하고 있었습니다. (p. 172)' '자코메티들을 제외한다면 말이죠. (p. 201)' '당신들은 이 섬 안에서 데카당스한 사치를 누리는 귀족처럼 (p. 203)' 엘리너 파웰에 대한 에세이와 고대 로마 제국의 화장실 문화에 대한 농담 (p. 227)' '오메가라는 명칭은 테야르 드 샤르댕이 썼던 의미와는 달랐어. (p. 240)' '울릭세스 (p. 269)' '2245년, 오스트리아/프러시아 연합제국이 쏘아 올린 마리아 테레지아 라는 우주선 (p. 258)'

역사와 문학과 문화에서 차용한 저 단어들을 포함한 문장들을 굳이 이 SF소설에 갖다 쓴 이유가 무엇일까? 꼭 그 단어를 그 역사를 빗대어 표현하지 않았어도 될 때 굳이 저 지식적 용어들을 쓴 것이 작가의 자랑질 말고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베수비오 지하족이 역사속 어느 집단을 의미하는지 클라우제비츠가 정의한 전쟁이 뭔지 성배와 말씀의 의미와 엠바 보바리나 플로리아 토스카가 누군지 등등등 작가가 굳이 자랑질한 저 지식적 용어들을 읽고 뭔지 알았음에도 이해의 기쁨보다는 오만의 불쾌함이 느껴지는 건 나만 그런것일수도 있지만, 굳이 저 인문학적 역사적 문학적 단어들을 들춰내지 않았어도 소설의 서사진행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을 알기에 당췌 작가의 표현들에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sf와 멀어져가는 이 느낌....

(작가의 아는 척은 그냥 '연작소설'이라고 하면 다 알 것을 픽스업이라는 용어를 쓰며 구구절절 어렵게 쓴 '작가의 말'에서 다시한번 느껴진다. 끝까지 정말이지...에혀...)

내가 지금까지 눈으로 보았다고 믿었던 건 모두 '내 눈앞에 여러 명의 유령이 서 있다'와 같은 문장에 불과했어. 문장은 거기 유령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긴 하지만 아무리 형용사들을 많이 깔아도 그 유령이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히 보여주지는 못하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어. 나는 유령들에게 손을 흔들어대며 껑충껑충 뛰면서 노래를 불렀어. '우리는 마법사를 만나러 가네. 놀라운 오즈의 마법사를!' 그 순간 빛이 들어왔어. (p. 252)

'마리아 부츠 사람들이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게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제인 에어] 이고 다른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 이라고. (p. 129)'

마찬가지로 저자가 확실히 좋아하는 건 [제인 에어]와 디킨스

눈으로 읽은 문장이 물체감은 없듯이 문장이 존재를 증명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저자의 세계관은 소설 속에서 증명되지 않고

'지금까지 지구인들은 그들이 저지르는 수많은 바보짓을 신비주의로 포장해 그럴듯하게 해석해왔던 게 아닐까. (p. 290)'

처럼 sf인지 아닌지 헤깔리는 세계를 sf라고 그럴듯하게 포장해 놓고 그럴듯하게 해석해 왔던 게 아닐까.

하지만

'앞으로 인간과 링커 기계 사잉서 어떤 역할을 하며 어떤 이야기를 만들게 될지 누가 알랴. 수많은 가능성을 담은 새로운 미래가 시작되고 있었다. (p. 291)'

라는 마무리처럼 저자의 작품엔 수많은 가능성이 있을 테지...

나는 내 인생에서 허구의 재료가 될 만큼 재미있는 순간을 단 하나도 골라낼 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그동안 보고 읽은 것에 대한 기억은 꽤 갖고 있다. 이들은 내 인생 대신 내가 쓰는 이야기의 재료가 된다. 이들 대부분은 번역서들이거나 자막이거나 더빙을 입힌 외국영화들이다. (중략) 아직도 나는 한국소설을 읽을 때 종종 낯선 사람의 나체를 보는 것과 같은 난처함을 느낀다. (p. 296) <제저벨>에 대한 내 알리바이는 내가 그리는 이 세계가 객관적인 우주가 아니라, 내 어린 시절 문화 경험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은 번역서들이거나 자막이나 더빙을 입힌 외국 영화들이다. 나에게 번역체의 문장을 통과한 이국의 환경은 가장 자연스러운 공간이었고... 여기서부터 이 글은 무한 순환한다. (p. 298)

저자의 소설은 sf소설이다. 하지만 sf 라고 해서 작가의 경험이 전혀 안 들어간다고 할 수는 없다. 내가 김초엽 작가나 천선란 작가의 sf를 좋아하는 것은 sf 소설작품에도 그들의 인생을 그들의 경험을 녹여놓기 때문이다. 하지만 듀나 작가의 소설에선 그런게 느껴지지 않는다. 작가가 말했듯이 자신의 경험이 아닌 자신이 본 책과 영화들을 재료로 써서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작가의 어린 시절 문화 경험은 모두 외국작품 외국영화였나 보다. 그리고 작가가 여전히 한국 소설을 낯설게 느껴서인지 작가의 소설은 한국sf로 읽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외국sf로 읽히지도 않는다. 그저 낯설고 난처할 뿐이다.

검색을 해보니 1990년대 PC통신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듀나라는 필명으로 꾸준히 활동중인 '얼굴없는 작가' 다. 신상정보를 전혀 공개하지 않고 활동하는 게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30여년을 그렇게 활동해왔다니 기묘하면서도 대단하다 싶다. 전부터 듀나 작가의 작품이 궁금했다. 한국SF 소설에 대한 평을 할때 빠지지 않는 작가였고 늘 분석되는 작품을 쓰고 있는 작가로 보여서였다. 하지만 내가 접한 듀나 작가의 작품은 생각보다 너무 마이너 했다. 아니 마니아 적이라고 해야 하나. 마블 시리즈 영화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마블 시리즈 영화는 한편 한편 그냥 봐도 재미있지만 마블 세계관을 알고 보면 더 재미있다. 하지만 듀나의 SF 세계는 마블시리즈 처럼 대중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듀나의 팬들이라면 그래서 이미 전작들을 통해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면 재밌게 점점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겐 그저 여기저기서 짜깁기하고 모방에 모방을 거듭한 혼합물로 혼란스럽게 읽혔을 뿐이다.

마리아 부츠 선생의 서가와 마찬가지로 이 책은 내가 읽지 않은 책과 영화에 대한 모방으로 가득하다. 예를 들어 제저벨이라는 배의 이름이나 몇몇 설정은 마커스 굿리치의 [딜라일라]에서 영향을 받았는데, 나는 제임스 미치너의 [작가는 왜 쓰는가]에 나오는 소개글을 읽었을 뿐, 이 책을 읽은 적이 없고 읽을 생각도 없다. (p. 300) 단지 부츠 선생과는 달리 나는 읽은 책과 영화도 꽤 있는 편이라, 그것들 역시 크루소 행성을 이루는 재료가 됐다. 그 상당수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나온 RKO사 제작 흑백 영화들이다. 우리나라엔 이 영화들의 팬이 별로 없는 편이라, 이 책은 종종 불친절하다는 말을 듣는다. 곽재식 작가는 듀나 소설을 <제저벨>같은 걸로 시작하면 이게 뭔가 하면서 헤멜 수 있다고 친절하게 경고한 바 있다. 하지만 독자들이 과연 작가가 숨겨놓은 모든 레퍼런스들을 다 이해해야 하는 걸까? 모르면 모르는 대로 즐거운 독서가 가능하지 않을까. (p. 301)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제저벨>은 서구인과 서구세계를 흉내 내는 비서구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중략) 가짜 유럽 국가가 무대인 로맨스 판타지와 서양 배경의 뮤지컬이 한국에서 인기를 끄닌 지금, 이에 대해 생각해보는 건 여전히 의미가 있지 않을까. (p. 302)

'나는 한국적 SF에 대한 의무감은 없지만, 한국인이 아닌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늘 조금씩 민망함을 느낀다. (p. 298)' 면서 '가짜 유럽 국가가 무대인 로맨스판타지와 서양배경의 뮤지컬이 한국에서 인기를 끄는 지금 이에 대해 생각해보는 건 여전히 의미가 있지 않을까' 라는 마무리는 내로남불 혹은 어불성설 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지. '한국어롤 쓰는 한국 사람들만이 모인 우주선이 안드로메다 은하계로 날아가는 미래는 상상하지 못하겠다. 아마 그런 미래는 오지 않을 것이다. (p. 298)' 라는 저자의 말을 보며 나는 왜 평소 갖고 있지도 않던 국뽕감이 차오르는 것일까. 듀나 작가가 한국적 SF에 대한 의무감도 갖고 민망없이 한국 캐릭터가 등장하는 아니 아예 주인공으로 하는 SF도 썼으면 어떨까 싶다.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아니 그게 왜 오지 않을 미래라고 단정하는지. 아니 듀나 작가가 그런 작품을 쓰지 않아도 된다. 이미 그런 한국적 SF 잘쓰는 작가들 많다. 또한 작가는 자신의 외국어 실력과 인문학적 지식을 다시 뽐낼때 알아둬야 할게 있다. 지금 이 시대는 작가가 PC통신 하던 그 시절과 같지 않다고, 지금 정보와 책이 넘쳐나는 이 시대는 그런 외국어 실력과 인문학적 지식을 알고도 잘난척 뽐내지 않는 사람들도 많으니 독자가 알아챌게 뭐람 하면서 무시하다간 나중에 큰코 다칠 거라고. (ps. 가장 최첨단 소설인 SF를 쓴다는 작가가 이런 구시대적 꼰대 마인드를 작품 곳곳에서 드러내다니 거참 당혹스럽기가 참...)

듀나 세계로 오는 자,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려라.

여하튼, <제저벨>은 듀나 작가의 작품에 열광하는 독자라면 또다시 열광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듀나 작가의 작품에 접한 적 없다면 곽재식 작가의 친절한 조언을 명심하길 바란다.

ps. Jegebel 을 구글번역기에 입력하니 노르웨이어로 '사랑해요' 라는 뜻이라고 나오는데... 아무래도 이 뜻으로 사용한 것 같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