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원균은 이순신이 와서 구해준 것을 은덕으로 여겨 서로 사이가 매우 좋았다. 얼마 후 전공을 다투어 점처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원균은 성품이 험악하고 간사했다. 또 중앙과 지방의 인사들과 수시로 연락하여 이순신을 모함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p. 157) 임금께서는 (중략) 성균사성 남이신을 파견하여 한산도에 내려가서 사실을 조사해오게 했다. 남이신이 전라도에 들어서자 군민들은 길을 막고 이순신이 원통하게 잡혔다는 것을 호소했다. 그 사람들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이신은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고 (중략) 이순신이 하옥되자 (중략) 사형을 감하여 삭발한 다음 군대에서 복무하도록 했다. 이순신의 노모가 아산에 있었는데, 아들이 옥에 갇혔다는 말을 듣고 애를 태우다가 죽었다. (중략)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했다. (p. 159, 160)
원균이 한산도에 통제사로 부임했는데, 그는 이순신이 정해 놓은 제도를 다 변경하고, 이순신이 신임하던 장수와 군사들도 모두 내쫓아버렸다. (중략)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을때 운주당이라는 집을 짓고, 밤낮을오 그 안에서 지내면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군사에 관한 일을 의논했다. 비록 졸병이라고 해도 군사에 관한 일을 말하려고 하는 사람은 와서 말하게 했다. 군대의 상황을 소통하게 하였으며, 매번 싸움을 할 때 장수들을 모두 불러 계교를 묻고 전략이 결정된 뒤에 싸웠기 때문에 패한 일이 없었다. 원균은 애첩을 데려다 운주당에 살게 하고 이중으로 울타리를 쳐서 안팎을 막아놓으니, 여러 장수들은 원균의 얼굴을 보는 것도 드물었다. 또한 원균은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날마다 주정을 부리고 화를 내면서, 형벌에도 법도가 없었다. (p. 161) 원균은 도망하여 바닷가에 이르러 배를 버리고 언덕으로 달아나려 했으나, 살이 찌고 몸이 둔하여 올라가지 못하고 소나무 아라에 앉아 있었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흩어져버렸다. 어떤 사람은 원균이 일본군에게 살해되었다고도 말하고, 어떤 사람은 그가 도망하여 죽음을 면했다고 한다. 그 사실은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p. 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