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 임진왜란에 관한 뼈아픈 반성의 기록 클래식 아고라 1
류성룡 지음, 장준호 옮김 / arte(아르테)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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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임진왜란을 경계하며

유성룡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고전읽기를 좋아한다면서 국내 고전에 대해선 읽은 게 거의 없는 것 같다. 서양고전에 대해서는 수메르신화부터 고대그리스로마 그리고 중세까지 세계사를 관통하는 책들을 수두룩 읽어오면서 사이사이 동양고전을 공자 맹자 순자 등 중국철학서 몇 권 읽은 것 외에 한국의 고전 읽기는 과연 무엇이 있었나;;; 사실 역사서와 고전이라는 책이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한국사 책을 읽지 않은 것은 아니기에 좀 애매한 감도 없잖아 있지만 <징비록>을 읽고나서 알았다. 우리의 고전도 이토록 생생하게 있었구나 우리의 고전도 이렇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구나 라는 것을.

[시경]에 이르기를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경계하여 뒤의 근심거리가 없도록 조심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이다. (p. 10) 비록 볼 만한 것은 없지만 당시의 사적들로 버릴 수 없었다. 이로써 시골에 살면서도 성심으로 나라에 충성하고자 하는 나의 간절한 뜻을 나타내고, 또 어리석은 신하가 나라에 보답하지 못한 죄를 드러내려고 한다. (p. 11)

<징비록>은 익히 알려진대로 유성룡이 임진왜란 이후 다시는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후대를 생각하며 임진왜란 이라는 전쟁을 되짚어본 책이다. 따라서 반성과 후회, 깨달음과 나아갈 바를 두루 적은 역사적 기록이자 일종의 전쟁사 이다. 전에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땐 별로 마음이 동하지 않아서 미루었다가 근래 영화 <한산>을 보고 나니 아무래도 이번엔 읽어봐야지 싶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너무 재밌어서 놀랐다. 이미 아는 전쟁이야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토록 긴박하게 읽히는 책이었을 줄이야!

대체로 성은 견고하고 작아야 좋은 것인데, 당시에는 오히려 넓지 않은 것을 걱정하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군정의 근본, 장수를 뽑는 요령, 군사 훈련의 방법 등이 백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도 정돈되지 않아 결국 전쟁에 패한 것이다. (p. 23)

주로 전쟁의 패인을 짚어 나가는 책이지만 서술이 연대기순으로 되어있다보니 전쟁이 임박해올 수록 혹은 전쟁이 진행될 수록 마음졸여 가며 읽게 되는 쫄깃한 책이었다. '신립은 하나라도 살피거나 깨닫지 못하고 가버렸다. (p. 27)' 장군의 지략없이 고집세고 자만심만 강한 신립 같은 장군의 모습을 읽으면 화가 나고 '우복룡은 군사들이 말에서 내리지 않는 것에 화가 나서, (중략) 모두 죽이니 시체가 들판에 가득 쌓였다. (p. 33)' 일본군이 코앞에 다가오고 있는데 인사하지 않는 병사들을 죽이는 장군을 오히려 승진시키는 조정에 기가막혀서 '일본군이 길을 나누어 멀리까지 말을 달려 여러 고을이 연이어 함락되었는데 감히 막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p. 32)' 라는 과정이 너무도 당연스런 나머지 한숨조차 쉬어지지 않았다. '성첩은 3만여 곳인데 성을 지킬 사람은 겨우 7천 명이고, 그것도 다 오합지중이라서 모두들 성을 넘어서 도망갈 생각만 했다. (p. 43)' '불행히 경상도 수륙 장수들은 모두 겁쟁이였다. (p. 47)' 전쟁 초기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지금 후회한다고 하더라도 소용은 없으나 뒷날의 경계까 되는 것이므로 자세히 적어 두는 것이다. (p. 48)' 그나마 유성룡 같은 학자가 있었던게 당시의 천운이라면 천운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징비록>은 당시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고 비난 받았던 책이었다. 아마도 자신들의 잘못을 세세히 들여다보기 부끄러운 사람들이 천지라 그랬던 것이리라...

임금의 행차가 평양을 떠난 뒤로 인심이 무너졌다. 난민들이 지나는 곳마다 창고에 들어가 곡물을 약탈했다. (p. 81)

요동에서는 우리나라에 왜변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곧 조정에 보고하였으나, 조정의 논의가 다들 달랐으며 심지어는 우리가 일본을 인도하고 있다고 의심하기도 했다. (p. 83)

임금이 의주로 피난갈때까지 민심은 점점더 무너졌고 그 빠른 괘멸 속도에 명나라는 그 상황이 사실이라고 믿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휘몰아치는 전쟁이 다 쓸어버리고 나서 그 진격 속도가 더뎌지자 조선도 조금씩 다시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다. 안타깝게도 임금이나 지배층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각 도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명나라의 군대가 오면서 일본군은 그제야 주춤하게 된다. 명나라군과 평양성을 탈환하며 후퇴하는 일본군을 말끔히 소탕했어야 했는데, '김경로는 다른 핑계를 대며 듣지 않았다. ... 김경로는 일본군과 싸우는 것이 두려워 피해버린 것이었다. ... 만일 우리 군사가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겐소 등을 사로잡았다면 경성에 있는 일본군은 저절로 무너졌을 것이다. .... 한 사람 김경로의 잘못으로 사태가 나라의 운명에 관계되었으니 진실로 통분하고 애석한 일이다. 나는 임금께 글을 올려 김경로의 목을 베자고 요청했다. (p. 119, 120)' 그러나 김경로의 목은 베이지 않았다. 전쟁전 전쟁중 전쟁후 에도 내내 그랬다. 상받아야 할 사람들은 감옥에 가고 벌받아야 할 사람들은 승진을 하기 일쑤였다. 그때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천운이라면 또 천운이다. 여하튼, 전쟁의 분위기가 전환되었던 초기 기세를 잡지 못한 것에 유성룡은 크게 통탄한다. 그뒤로 명나라군은 조선땅에 있었으나 제대로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때의 유성룡의 통탄은 더욱 뼈아픈 역사적 순간이 되고 말았다.

처음에 원균은 이순신이 와서 구해준 것을 은덕으로 여겨 서로 사이가 매우 좋았다. 얼마 후 전공을 다투어 점처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원균은 성품이 험악하고 간사했다. 또 중앙과 지방의 인사들과 수시로 연락하여 이순신을 모함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p. 157) 임금께서는 (중략) 성균사성 남이신을 파견하여 한산도에 내려가서 사실을 조사해오게 했다. 남이신이 전라도에 들어서자 군민들은 길을 막고 이순신이 원통하게 잡혔다는 것을 호소했다. 그 사람들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이신은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고 (중략) 이순신이 하옥되자 (중략) 사형을 감하여 삭발한 다음 군대에서 복무하도록 했다. 이순신의 노모가 아산에 있었는데, 아들이 옥에 갇혔다는 말을 듣고 애를 태우다가 죽었다. (중략)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했다. (p. 159, 160)

원균이 한산도에 통제사로 부임했는데, 그는 이순신이 정해 놓은 제도를 다 변경하고, 이순신이 신임하던 장수와 군사들도 모두 내쫓아버렸다. (중략)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을때 운주당이라는 집을 짓고, 밤낮을오 그 안에서 지내면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군사에 관한 일을 의논했다. 비록 졸병이라고 해도 군사에 관한 일을 말하려고 하는 사람은 와서 말하게 했다. 군대의 상황을 소통하게 하였으며, 매번 싸움을 할 때 장수들을 모두 불러 계교를 묻고 전략이 결정된 뒤에 싸웠기 때문에 패한 일이 없었다. 원균은 애첩을 데려다 운주당에 살게 하고 이중으로 울타리를 쳐서 안팎을 막아놓으니, 여러 장수들은 원균의 얼굴을 보는 것도 드물었다. 또한 원균은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날마다 주정을 부리고 화를 내면서, 형벌에도 법도가 없었다. (p. 161) 원균은 도망하여 바닷가에 이르러 배를 버리고 언덕으로 달아나려 했으나, 살이 찌고 몸이 둔하여 올라가지 못하고 소나무 아라에 앉아 있었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흩어져버렸다. 어떤 사람은 원균이 일본군에게 살해되었다고도 말하고, 어떤 사람은 그가 도망하여 죽음을 면했다고 한다. 그 사실은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p. 163)

<징비록>에서 이순신의 비중은 상당하다. 말미에 있는 세개의 장이 모두 이순신에 대해서 라고 할 수 있다. 9장 이순신의 재기용과 명량해전, 10장 일본군의 퇴각과 노량해전 모두 이순신의 해전이 임진왜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친 승리였는지 설명하고 마지막 11장에선 아예 '이순신의 인품' 이라고 이순신에 대한 간략한 전기로 징비록을 마무리 하니 만약 이러한 유성룡의 기록이 없었다면 이순신의 업적이 후대에 이토록 잘 알려졌을지 의문이 들 정도다.

이순신의 해전이 큰 승리이긴 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지 않았다면 아무리 이순신이 있었어도 조선의 운명이 어찌되었을지 알수 없다. 노량해전 에서 이순신이 죽기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 (명량-한산 에 이어 이순신 영화 3부작이 마지막은 아마도 노량해전이 될 터인데 유성룡의 회고로 영화를 구성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그리고 징비록도 끝났다. 그러나 뒤이어 [녹후잡기]가 이어지는데, '녹후잡기는 유성룡이 [난후잡록]의 체재를 달리하여 초본 [징비록]을 저술하면서 본문에 포함하지 못한 [난후잡록]의 기사를 [징비록] 뒷부분에 '잡기'라는 형태로 부기한 것이다. (p. 188)' 아무래도 잡기의 기록은 앞선 징비록의 기록만큼 치밀하지 못한 감이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보다 총체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중요한 내용들이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태평세월이 백 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백성들이 전쟁을 알지 못하다가 갑자기 일본군이 쳐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엎어지고 넘어져 멀고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바람에 쓰러지듯이 모두 넑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열흘만에 도성에 들이닥쳐서 지혜로운 사람은 계책을 도모하지 못하게 했고, 용감한 사람은 과감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게 했다. 인심은 무너져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병가의 좋은 계책이며 일본군의 교묘한 계책이었다. 그러므로 도성을 뺏은 것을 교묘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때 일본군은 항상 승리했던 위세를 믿고 뒷일을 돌보지 않고 여러 도로 흩어져 나아가서 마음껏 미쳐 날뛰었다. 군사가 나누어지면 세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중략) 적군의 잘못된 계책은 우리에게는 다행이었다. (p. 193, 194) 당시에 우리는 너무 쇠약하여 이것을 능히 처리할 수 없었다. 명나라의 여러 장수들도 또한 이런 계책을 쓸 줄 몰라 일본군에게 조용히 오고 가게 했다. 이 때문에 적이 조금도 징계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갖은 방법으로 이것저것 요구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에게 대처하는 전략은 하책에서 나와서 봉작과 조공으로써 그들을 견제하려고 했으니 탄식할 일이며 애석한 일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더라도 사람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분격할 일이다. (p. 195)

전쟁에 대한 인식이나 준비성 등 임진왜란 당시 문제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겠으나 가장 큰 실책이라면 명나라군이 왔을때 반전기회를 잡지 못한 것이었다. 빠르게 공격받은 만큼 빠르게 물리쳤어야 했다. 하지만 명나라군도 조선도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당시 일본군의 위력은 대단했다. 징비록의 마지막 장을 이순신에 대해 쓴것과 비슷하게 녹후잡기의 마지막 장은 심유경 이라는 명나라 관리에 대해 썼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조정에 조선을 적극적으로 비호했으며 일본군과의 협상에 담대하게 응했던 심유경이라는 인물의 발견은 징비록을 읽으며 얻은 빼놓을 수 없는 수확이었다.

이 책의 절반 조금 넘는 분량이 징비록 본문과 녹후잡기 본문 즉 고전 본문 이라면 남은 절반은 [해설] 이다. <징비록>이 역사적 사료로 쓰일만큼 중요한 문헌이니 자세한 해설은 필수라고 하겠다. 역자는 해설에서 징비록이 어떤 책이고 유성룡은 어떤 인물이며 임진왜라 당시 동아시아 3국의 정세가 어떠했는지 자세히 설명해준다. 그럼으로써 이 시대 <징비록>을 왜 다시 읽어야 하는지 생각케 한다.

과거를 공부한다고 해서 미래를 반드시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예측불가능한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기술과 지혜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인간사에서 과거와 똑같지는 않더라도 전개될 미래의 해석에 도움이 되기 위해, 과거의 정확한 지식을 열망하는 탐구자들을 위해 <펠로폰네소스전쟁사>를 썼다고 했다. 유성룡이 <징비록>을 남긴 이유도 투키디데스의 의도와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p. 357)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전쟁사>를 얼마나 감탄하며 읽었던가? 서양전쟁사는 그렇게 읽어놓고 <징비록>을 이제야 읽게 된것이 못내 부끄럽다. 역사서는 승자의 기록이고 역사가가 아무리 객관적으로 쓰려 했다해도 주관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기록이다. 그러니 시대를 달리하며 다르게 읽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먼 과거일수록 지금의 현실과 직접 연결되지 않을수록 오히려 미래를 예측해보는데 더욱 중요한 기록이 된다고 생각한다. 거리두기는 역사읽기에도 필요한 것이다. 역자는 <징비록>이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되기를 염원하며 이 책을 마무리했지만 나는 이 책이 이시대에 보다 널리 읽히길 더 소망한다. 징비록에서 읽혀지는 리더의 모습과 리더 주변의 관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 당장 임진왜란처럼 외세에 의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전쟁과 다를바 없는 혼란스런 국내 정세를 보며 독자로서 깨달아지는 바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명량- 한산 에 이어 이순신 영화 3부작의 마지막편이 나오기 전에 <징비록>을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 분명 영화못지 않은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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