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브 (반양장) 창비청소년문학 111
단요 지음 / 창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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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기억을 깨워 줄게"

2057년 서울, 잠든 과거를 찾아 떠나는 여정

가제본 서평단으로 당첨되어 대본집 형태로 읽은 소설인데 서평을 쓰려고 보니 책이 등록되어 있어 작가이름을 알게 됐다. 단요 였구나... 처음 보는 작가 이름이다. 살짝 검색을 해봤는데 다른 작품도 수상이력도 경력도 아무것도 조회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차피 작가가 누군지 모르고 읽은 작품이니 상관없긴 하다. 창비가 소설Y시리즈의 다섯번째 책으로 정한 작품이었고 읽어보니 그럴만한 작품이었다.

선반 사이를 헤매던 선율은 어느 큐브 앞에서 멈춰 섰다. 헬멧이 쏘아내는 주홍빛 조명이 두터운 플라스틱의 결을 따라 흘렀다. 그 너머로 웅크려 앉은 사람의 윤곽이 보이더니 얼굴이 뚜렷해졌다. 흰 티셔츠를 입은 소녀였다. (p. 12~13)

때는 미래시대, 3차대전으로 세계 곳곳은 파괴되었고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전부 녹아버려서 서울을 비롯한 대부분의 지역이 물에 잠겼다. 산꼭대기나 높은 건물꼭대기처럼 물 위에 드러난 곳에 그나마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많은 아이들이 물꾼으로 자랐다. 물꾼은 잠수해서 예전에 도시라 불리던 곳들을 뒤져 쓸만한 것들을 찾아냈다. 선율은 물꾼이었고 어느날 멀쩡하게 보존중인 기계인간을 찾아냈다.

아이콘트롤스의 최첨단 시냅스 스캐닝 기술은 고인의 기억과 의식을 그대로 구현합니다. 평생 플랜 구독을 통해 당신의 아이를 다시 한 번 품에 안으세요. (p. 15)

상자 안에는 여러 종류의 전선과 팸플릿이 동봉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이 기계인간은 아니 이 소녀는 누군가의 딸의 기억을 구현한 누군가의 아이였던 것이다. 이 소녀를 찾아낸 지오와 선율은 살짝 망설였지만 배터리를 연결했다. 옆 산의 물꾼과 한 내기를 이기려면 더 멋진 것을 찾아내기로 한 그 내기를 이기려면 소녀의 구동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누군가의 기억을 어떤 기억을 품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따져볼 여유가 없었다.

소녀가 입을 열었다.

"몇 달 전에 이 회사에서 상담을 받았던 기억이 나. 2038년 마지막 달에. 데이터를 수집하려면 머리에 전극을 꽂고 한 달쯤 지내야 한다더라고. 그래서 머리를 다 깎았는데... 일어나 보니까 다시 자라 있네"

소녀는 선율을 빤히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끌어당겨 살짝 웃었다. (p. 27)

현재는 2057년 이었고 소녀의 기억은 2038년에 멈춰 있었다. 세계 곳곳이 물에 잠긴지 15년쯤 됐으니까 소녀도 그때 물에 잠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물에 잠기기 전 4년 정도의 기억이 소녀에게 없는 것이었다.

삼촌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이미 끝난 걸 붙잡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게 삼촌의 말버릇이었는데도 스스로는 전혀 그렇게 살고 있지 않았다. 댐으로 막아야 하는 도시라면 바다에 잠기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면서도 삼촌은 서울에 머물렀다. 물꾼이 서울을 파고드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는데도 누군가 기계를 고쳐달라고 하면 선뜻 받아들였다. 죽은 이를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무덤 앞에 꽃을 올리는 건 언제나 삼촌이었다. 그런 사실을 늘어놓다 보면 삼촌이 바라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 의아해질 때가 있었다. (p. 37)

선율과 지오를 비롯한 여러 아이들을 보살피고 있는 건 삼촌이라 불리는 사내였다. 지오는 삼촌에게서 기계관련한 것들을 배웠고 선율은 이 곳에 하나뿐인 잠수장비를 사용하는 물꾼이었다. 아이들이 허락없이 소녀를 깨운것에 대해 소녀의 기억을 부활시킨 것에 대해 삼촌은 아이들을 나무랐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재미있지 않아?"

"뭐가 재미있는데?"

"살고 싶지 않았던 사람은 살아 있고, 곧 무너진다던 건물은 멀쩡하게 서 있는 거. 살려 놓은 사람도, 다른 건물도 이젠 없는데" (p. 44)

소녀는 말기암 환자 였다고 했다. 이름은 '채수호'

선율이 갑작스레 깨운것에 대해 그리고 내기를 비롯한 이런저런 것들에 대해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수호는 괜찮다면서 한가지 요구사항을 말한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서, 그걸 알 때까진 살아 보려고" (p. 46)

"지금은 2057년이고, 내 마지막 기억은 2038년이지. 그 사이에는 19년이 있고. 그런데 서울이 이렇게 된 게 15년 전이라고 했잖아. 4년이 텅 비네. 왜일까? 나는 4년 동안 거기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걸까?" (p. 47)

"내기에 나갈게. 그러니까 너도, 내 4년을 찾아 줘" (p. 48)

'이윽고 선율은 자신이 플라스틱 큐브에서 꺼내 온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다. 그건 내기 물품이 아니라, 멀쩡하게 움직이는 기계 인간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과거였다. (p. 48)' 이 소설의 핵심이자 내게 가장 인상적인 표현이었다. '아직 오지 않은 과거'. 이 소설은 미래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SF에 가깝지만 과거를 찾아가며 퍼즐을 맞추는 과정에서 SF적 요소를 까먹게 하는 작품이었다. 과거를 찾아가면서 현재를 읽게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열여덟 살의 수호가 다섯 번째로 장기 입원을 했을 때 맞은편 침대에는 희 아주머니가 있었다. 아직 어린데 어쩌다가, 로 시작된 통성명은 서로의 입원 경력을 읊으면서 끝났다. 희는 먼 예전에 양성 종양을 한 번 떼어 낸 이후로는 몸에 칼을 대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이 나이에, 같 때문에 배를 째게 생겼다며 희는 너스레를 떨었다. 입원 경력으로 따지면 수호가 까마득한 선배인 셈이었다. 희 아주머니가 수호의 이력에 놀라는 동안 수호는 아주머니의 이름에 놀랐다. 자신처럼 병원을 뻔질나게 들락거리는 사람은 몇 번보았지만 한국에 그런 성씨가 있을 거라고 생각도 해 본 적 없었던 것이다. 서문희. 서, 문희도 아니고 서문, 희. 수호는 그게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세상이 조금 더 복잡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아직 모르는 게 세상에 많은 것 같아서, 병원에만 앉아 있을지라도 세상을 넓혀 갈 공간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아서. (p. 75~76)

희 아주머니에게 문병오는 가족은 딱 한 사람,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는 아들 경 이었다. 서문 경. 수호는 병원에서 경으로부터 과외를 받기 시작했고 대화할 사람이 생겨 기뻤다. 수호는 예닐곱살 위인 그를 경이삼촌이라고 불렀다.

경이 삼촌.

기계를 잘 다루는 노고산 삼촌.

그 삼촌의 이름은 서문 경.

수호는 서울에 그렇게 나뉘는 이름이 둘씩이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노고산 삼촌이 예전의 경이 삼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2038년의 서울과 2057년의 서울이 같지 않은 것처럼 스물다섯의 경과 마흔 넷의 경도 같지 않을 테니까. (p. 80)

수호는 경이 삼촌을 알아보았지만 경이삼촌은 수호에게 그 어떤 아는 내식을 하지 않고 있었다. 데이터에 존재하지 않는 4년의 시간 동안 수호와 경이삼촌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소설은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죽음을 원하는 사람과 죽음을 원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하나하나 차곡차곡 열어나간다.

그냥, 그런 세상이 있었던 거야. 없어진 것도, 아주 먼 곳에 있는 것도 눈앞에 불러낼 수 있었던 세상이. 그게 너무 당연해서 만질 수 있는 무언가를 간직할 필요가 없던 세상이. (p. 143)

예전 사람들이 컴퓨터에만 추억을 맡긴 게 이해 안 된다고 했었지. 이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 컴퓨터에 있는 것들은 마음대로 수정할 수 있으니까, 언제든지 삭제했다가 복구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여전히 진짜 같으니까 그랬던 거야. (p. 145)

어른들이 과거를 그리워하면서도 추억삼을 것을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던 것에 대해 기억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해 선율은 이해할 수 없었다. 수호는 그때 사람들이 핸드폰에 컴퓨터에 데이터로만 넣어놓고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것에 익숙해져서 사진도 그림도 글자도 애써 남기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다 데이터에 전원공급이 끊기고 데이터가 물에 잠기고 데이터가 망가지면 영원히 복구할 수 없는 것임을 그때 그런 일상에선 알지 못했다고...

고통을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시작을 찾아 헤매곤 한다. 나무의 밑동을 자르면 가지도 말라 죽듯이, 그것 하나만 쳐내면 다른 아픔은 한순간에 사라질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중략) 완전히 다른 세상에 발을 들이더라도 계속되는 고통이 있다. 새로 생겨나거나, 기억 속에서 선명해지거나, 둘은 완전히 나뉘는 대신 서로 얽힌다. (p. 170)

수호와 경이삼촌의 얽혀 있는 4년, 선율과 삼촌과 우찬 사이에 풀지 못한 매듭, 지오가 받아들이는 현실과 지아가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모든 문제는 현실도 미래도 아닌 과거에 답이 있었다. 그리고 시간에.

닿지 못할 행복은 생생한 만큼 슬픔이 되고,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은 그대로 남아 후회가 된다. 살아가다 보면 지나간 순간을 다시 볼 기회가 생기지만 그 반대의 일도 얼마든지 일어난다. 과거가 오늘을 옭아매는 것이다. (p. 173)

서로를 옭아매고 있는 과거를 이들이 어떻게 풀어나가는지는 아프지만 따듯한 그들의 시간을 공감하며 읽을 때 그 감동이 배가 될 것이다. 각자의 고통을 안고 살지만 미워하기 보다 서로를 품어주는 이 착한 소설 속에 풍덩 다이브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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