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끄러지는 말들 - 사회언어학자가 펼쳐 보이는 낯선 한국어의 세계,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백승주 지음 / 타인의사유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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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차별의 시대, 지금 여기의 말들을 다시 들여다보다

우리는 단일민족국가, 단일언어 사용이라는 표현등으로 '공통된 하나' 라는 일체감을 너무 깊이 각인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그 공유된 하나가 아니라고 여겨질때면 더욱 가차없이 혐오와 차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저자는 그런 공통의 일체감이 가리고 있던 균열들을 보여준다. 다름아닌 우리의 언어를 통해서. 순수를 위해 거부되고 미끄러지고 있는 말들이 내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자신이 실제 사용하는 언어를 부정한다. 그러면서도 이를 인지하지조차 못한다. 외계인들 입장에서는 사뭇 생경하게 느껴질 풍경이다. 그러니까 이 글을 통해서 내가 하려는 일은 이런 것이다. 외계인의 눈으로 사회와 언어, 삶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들여다보는 것. 당연하다는 듯 지나치는 그 '접촉의 순간'들을 정지 버튼을 누르고 살펴보는 것.

어쨌든 부디 다른 평행 우주에 있는 내가 여러분과 지구를 구할 수 있기를 빌어 본다. 그런데 우리들 사이에 숨어 있는 외계인이 한국어 초급 교재풍으로 이렇게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이게 책입니까" 네, 책입니다. (p. 6~7)-프롤로그 中-

저자는 사회언어학자로서 아주 적당한 삶을 살아온 것 같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후 대학내 한국어교육원에서 10년동안 외국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다음 지금은 5.18의 도시에서 전남대 한국어교육학과 사회언어학 교수로 있다. 나는 내가 사용하는 말과 글에 대해 타자로서 생각하거나 경험해본 적이 없는데 저자는 시종일관 타자의 입장에서 한국어를 익히고 배우고 가르쳐온 것이다. 그래서인지 저자가 들려주는 사투리에 관련된 경험이나 외국인들의 한국어에 대한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진실되게 다가오고 공감대가 남다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뒤늦게 내가 사용하는 말과 글이 휘둘러온 혐오와 차별을 깨닫기 시작한다.

<어벤져스>시리즈를 모두 섭렵한 아들에게 우주란 하나의 우주인 유니버스가 아니라 당연히 멀티버스, 곧 다중 우주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 우주는 하나였다. 슈퍼맨의 고향 별인 크립톤 행성은 지구로부터 50광년 떨어져 있고, <스타워즈>는 '오래 전 멀고 먼 은하계' 저 너머의 이야기다. 그러나 그 우주는 내가 속한 나의 우주다. 내게 우주는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내가 속한 우주의 저 반대편, 그곳에서 산다는 제다이 기사들의 '포스'를 생각하다, 문득 우주의 언어에까지 생각이 미친다. 단일한 우주이기는 하지만 그 끝을 알 수 없는 광대한 우주, 얼마나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인지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스타워즈에서는 외계인들이 영어가 아닌 온갖 종류의 다른 언어를 구사한다. 이를테면 스타워즈의 우주는 다중 언어의 세계다. 이와 달리 <어벤져스>의 우주 '들'에서는 영어라는 단일한 언어가 사용된다. 우주의 끝 타이탄 행성에서 온 최강의 악당 타노스도 영어를 사용하고, 아스가르드 왕국의 왕자 토르도 영어를 사용한다. <어벤져스>의 세계는 다중 우주이지만 단일 언어가 사용되는 곳이다. (p. 22~23)

<스타워즈>의 유니버스 에서는 다종다양한 외계어들이 난무하지만, <어벤져스>의 멀티버스 에서는 단 하나의 언어가 공용된다것에 의문을 가진 사람이 왜 여태 없었을까;;;; 저자는 언어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힘과 권력의 관계가 보인다고 이야기 한다. 사투리만 해도 남자들이 사용하면 유대감의 표현이지만 여자들이 사용하면 계몽되지 않은 야생의 존재로 여겨질 뿐이라고, 그래서 여성들이 표준어 구사를 훨씬 빨리 습득한다고. 그러고보면 한국어는 전혀 하나의 한국어가 아니라고 저자는 또한 말한다. 다양한 지역방언들과 외국인들이 사용하는 한국어와 신세대들이 만들어낸 신조어의 세계등등, 한국어의 세계는 결코 하나가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한국어는 단 하나의 종류뿐이라고 착각해 왔는가? 어벤져스의 멀티버스 우주에서 영어가 공용어로 사용되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말들은 결코 균질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어'라는 가공품의 '발명'은 이러한 차이를 일거에 제거해 버린다. 한국어라는 말 속에는 '언어=영토=국민'이라는 성스러운 삼위일체의 구도가 숨어 있다. 그리고 이 구도를 통해 한국 영토 안에 거주하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동일하고 균질한 하나의 한국어를 사용한다는 환상이 만들어진다. 이 환상을 만들어내는 장치는 다름 아닌 표준어 제정이다. 표준어 제정 과정에는 우생학과 위생학이 개입한다. 우생학 처리 과정은 서울말을 우등한 것으로, 지역어를 열등한 것으로 만들어 표준어에서 지역어를 제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다음은 위생학적 처리과정. 이 처리과정을 통해 토착어가 아닌 외래어들은 '오염된 말'이 된다. 순수한 언어란 있을 수 없지만 만들자면 쉽게 만들 수 있다. 방법은 간단한다. 어떤 것을 오염된 것으로 지목해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는 순수한 것이 된다. (p. 34)

유럽이나 미국 처럼 하다못해 가까운 중국처럼 다민족 국가들엔 당연히 다양한 언어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반도라는 좁은 땅에서 전쟁은 잦았어도 이민이나 이주는 거의 없이 전국 어디를 가나 대화를 할 수 있었기에 한국어는 하나의 단일한 언어인 것으로 당연스레 생각해 왔다. 하지만 지역방언은? 특히 제주도 말은? 축약을 하든 뒤집든 기이하게 만들어지는 신조어들은? 해석되지 않는 말은 순수하지 않아서 한국어가 아닌가? 표준어와 서울말을 기준삼아온 것은 결국 차별과 혐오의 토대를 만든 것일수도 있었다. 아니라고? 그런 방언과 조어들도 존중해왔다고?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언어학은 노동하는 인간의 언어에는 관심이 없다. 언어학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언어 자료를 다룰 것 같지만 돈 놓고 돈 먹는 세상에서 설마 그럴 리가. 언어학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본을 움직이는 자들의 언어, 자본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언어, 또는 자본을 대변하는 국가의 '정상 언어'이다. 본래부터 언어학은 근대 부르주아 국민국가의 국가 장치로 기능해 왔다. 이 국가 장치가 충실하게 수행하는 일 중 하나는 언어를 정상적인 범주와 비정상적인 범주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런 범주의 구분은 그 자체로 권력으로 작동된다. 이렇게 비정상적인 범주로 분류된 언어들, 다시 말해 순화해야 할 범주의 언어들은 이등 시민의 언어가 된다. 그리하여 노동하는 삶 속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들은 정작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로부터 소외된다. (p. 47~48)

노동하는 언어에 대해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면 건설현장을 떠올려 보라. 가장 흔히 쓰이는 노가다라는 단어부터 이미 비하의 기운을 풍긴다. 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해 무시의 분위기가 풍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년동안 계속 사용되어져 온 단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무엇을 소외시켜 온 것인지 누구를 소외시켜 온 것인지 이제 좀 감이 잡히는가.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상범주의 언어라고 말하는 언어들 조차 잘못 사용되곤 한다는 점이다.

N번방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것을 보라. 죽음을 택한 정치인의 성폭력 피해자에게 그 죽음의 책임을 묻고 2차 가해를 하는 행태를 보라. 차별을 법으로 금지하자는 움직임을 신의 이름으로 저주하는 모습을 보라. 이것이, 한국의 '교육'이다. 많은 한국인들은 거리낌 없이 혐오와 차별의 언어를 가르치고 배운다. 이 교육 속에서 소년들은 여성을 성적 욕망을 위한 도구라고 배운다. 이 교육 속에서 상급자는 위력으로 하급자를 유린할 수 있다고 배운다. 무엇보다도 한국사회는 이 교육을 통해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 난민들에게 말하지 말 것을 강요한다. 요컨대, 혐오와 차별의 산맥 사이, 깊은 계속에 갇힌 이들의 목소리는 지층 밑에 묻혀서 들리지 않아야 한다. 이들의 말은 지형을 이루고 풍경을 만들 권리가 없다. (p. 74)

현재 한국의 언어 지형에 대해 저자는 지옥도를 그려낸다. 별것 아니라고 그럴수도 있지라며 넘겨왔던 작은 말과 글들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나니 엄청난 지옥도가 그려져 버렸다. 뭐 그렇게까지 해석하냐 할수도 있지만 말이 씨가 된다고도 했고 말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고도 했다. 말은 그런 것이다. 사소할수도 있지만 결코 무시해서는 안되는 그런 것. 더구나 인터넷 시대가 된 현대엔 더더욱.

분노가 지금은 인터넷 산업이 대량으로 생산하는 공산품이 되었다. 그것도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이다. 오늘도 구매자들은 매력적인 분노 상품을 찾아 인터넷 공간을 기웃거린다. 사람들은 기사의 답글에, 자신의 SNS에 방금 쇼핑해 온 따끈따끈한 신상 분노를 전시힌다. 소금의 생산과 유통이 고대 문명의 기반이 되었고, 향신료라는 상품이 근대를 만들었다면, 분노라는 상품은 21세기 사회를 건설(파괴?)중이다. (p. 89~90) 분노라는 포장 안에 싸여 있는 것은 결국 혐오이겠지만 말이다. (p. 92) 분노 산업의 언어는 실재를 왜곡시킨다. 그리고 그 왜곡된 언어는 다시 일그러진 실재를 구축한다. 이 무한 반복의 개미지옥에 빠져 한국 사회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다. (p. 93)

편안하게 읽히는 에세이겠거니 생각했던 내 예상은 첫장부터 찬물을 머리에 뒤집어쓴 듯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문장들로 완전히 벗어났다. 2020년 2월부터 한국일보에 <언어의 서식지>라는 제목으로 기고하고 있는 칼럼을 바탕으로 저자의 글들을 엮은 이 책은 최근의 사회적 현상들에 대한 저자의 날선 비판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한국 사회라는 언어의 서식지에서 내가 가장 많이 관찰한 것은 혐오와 차별, 억압의 말들이었다. 이는 칼럼을 쓰기 시작한 시점이 코로나19가 본격화되던 시기라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터이다. (p. 271)' 라고 저자가 설명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비판들은 하나같이 너무 따끔한 주사였고 너무 쓴 약이었다. 하지만 '약'이 되는 지적들임은 분명했다.

자신이 나고 자란 제주를 한국의 식민지라 부르며 근로가 아닌 노동을 강조하는 저자는 한국어교육원에서 자매들의 언어로 자신을 참교육으로 이끌어준 상사에 대한 추모글로 에필로그를 마무리한다. 자신의 미끄러진 말들이 누군가에 닿길 바라며.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그동안 내 주위에서 미끄러진 말들은 무엇이었나.. 혹여 내가 일부러 미끄럼틀 위에서 밀어내버린 말들은 없었나... 다행히 내 언어의 미끄럼틀의 경사는 무척 낮은 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이 사회의 경사도는 확 올라간 느낌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 미끄러지는 말들을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계속 그렇게 경사도를 높여가며 기름칠을 해가며 더더 미끄러지게 놔두기만 할 것인지... 부디 아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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