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살았던 날들 - 죽음 뒤에도 반드시 살아남는 것들에 관하여
델핀 오르빌뢰르 지음, 김두리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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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뒤에도 반드시 살아남는 것들에 관하여

거대하고 상실의 시간을 건너는 이들에게 약하고, 일시적이며, 빈틈투성이의 삶이 보내는 위로

내가 이 책을 읽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이 책의 홍보문구 한 문장 때문이었다.

[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저마다 아름답다" 소설가 김연수 추천 ]

이라고 책의 띠지에 쓰여있는 것을 보고 이 책이 궁금해졌다. 책에 대해 아무런 사전정보가 없었지만 김연수 작가가 아름답다고 추천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 책이 읽고 싶어졌다. 내가 아는 소설가들 중에 김연수 작가만큼 서정적인 작가는 없기 때문이다.

책을 받아들고 보니 이 책은 프랑스에 사는 여성 랍비인 저자가 자신이 진행했던 장례식들에 대해 쓴 에세이였다. 누군가의 죽음을 장례식이라는 예식을 통해 추모하고 애도하는 유대인 랍비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 책은 그렇게 죽음에 대한 송가이기도 하고 삶에 대한 찬가이기도 했다. 이 책의 원제를 번역하면 <죽은 자와 함께 살기 : 위안에 대한 작은 논문> 이다.

유대 전통은 천 가지 이야기를 통해 죽음이 당신을 따라올지라도 그를 돌려보낼 방법이 있다고, 죽음이 결국 당신을 추적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죽음은 수많은 전승 속에 등장하는데, 천사의 형상으로 우리네 집을 방문하고 우리네 마을을 둘러본다. 이 등장인물은 심지어 이름까지 있다. 죽음의 천사 아즈라엘이다. 아즈라엘은 한 손에 검을 쥐고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 주변을 서성거린다고 전해진다. (p. 15) 랍비의 일이란 뭘까? 단연, 의례를 집행하고 사람들과 함께하고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중략) 하지만 해가 갈수록 내 직업과 가장 엄밀하게 가까운 직업명이 따로 있는 것 같다. 바로 이야기꾼이라는 이름이다. (p. 19) 당신이 손에 잡은 이 책은 내가 들려줄 수 있었던 몇 가지 이야기들, 내가 경험해야 했거나 내가 함께할 수 있었던 삶과 애도들을 망라한다. (p. 25)

'나는 장례를 진행할 때마다 우리 안에 사라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죽은 자에게서 살아 있는 자에게도 이어지는 이 이야기의 힘으로, 그 자리를 빛내고, 확장하려고 노력한다. (p. 25)' 저자는 말한다. 정통 유대전통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여성랍비가, 그들의 부모세대가 탈취한 땅에서 프랑스로 망명하여 랍비로서의 삶을 살면서, 죽음의 천사가 지나간 자리를 되돌아보며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장례식에서 이야기를 한다. 저자는 이야기꾼이 맞다. 다만 그 이야기의 소재가 '죽음'일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좀 특별하다면 특별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특별함이 아름다움으로 느껴지는 경우는 '죽음'에 대한 경험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것 같다. 아마도 '죽음'에 가까워져가고 있다고 느끼는 나이일수록 이 책속의 이야기들을 '아름답다'고 말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토라는 하늘 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느님에게 직접 호소한 것이었다. 시나이산에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제 그것은 우리의 손안에 있지, 당신의 손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해석할 책임도 우리에게 있는 것이고, 어떤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현상도, 다수가 표현한 것인 한 현자들의 의견을 무효화할 수 없을 것입니다.

[탈무드]에서 이 에피소드는 하느님이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끝난다. "내 아들들이 나를 이겼구나, 내 아들들이 나를 이겼어" (p. 40~41)

살인자들은 그들이 저지른 살인 행위의 가당찮은 모순을 알아차렸을까? 앙갚음을 요구하고 무시당한 것에 분통을 터뜨리는 신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야말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신성모독이다. 어떤 '위대한'신이 이토록 옹색하게 '초라해져서'인간이 당신의 체면을 세워주길 요구한단 말인가?신이 모욕을 당해서 노여워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크나큰 모독이 아닐까? 유머러스한 신은 위대하다. 유머감각이 떨어지는 그분은 몹시 졸렬하다. (p. 44~45)

이 책의 첫 에피소드는 2015년 프랑스에서 있었던 이슬람단체의 테러로 사망한 사람의 장례식에서 저자가 느꼈던 것들을 풀어내고 있다. 유대교 랍비인만큼 탈무드적 이야기가 이 책에 자주 나올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말도록. 몇가지 전통적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저자가 하고 있는 이야기들은 동화적 탈무드와 결을 달리한다. 저자가 재해석해낸 이야기들은 전통적이면서 동시에 신랄한 면이 있다. 또한 그럼에도불구하고 온정적이다.

나는 자주 생각한다. 우리의 장례식 날에 우리의 삶이 비극의 형식과는 다르게 이야기될 수 있고, 우리가 다른 어휘와 다른 상황의 언어로 회상될 수 있기를, 그리고 우리의 삶 역시 스릴러, 로맨스 시리즈, 신화, 심지어 대중적인 코미디 영화처럼 간주될 수 있기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역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의 장례식에서 우리가 우리의 죽음으로 요약되지 않고, 그래서 우리가 살아생전에 얼마나 살아 있었는지를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p. 57)

저자의 생각은 우리네 전통과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예전에 집에서 초상을 치루던 시절 초상집은 시끌벅적했다. 밤새도록 떠들고 놀고 마시며 '죽음'을 슬픔으로만 내리누르지 않고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어느때부터인가 장레식장에서 고스톱치는 사람들도 없어졌을만큼 우리네 장례식은 그야말로 어둠에 잠겨버렸다. 그렇게 비극적인 비극으로만 치루는 장례식이 과연 누구를 위한 장례식인걸까? 그러한 애도가 '죽음'이 곧 단절이라는 공포심을 더 크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차피 사람은 다 죽는다. 모르지 않던 '죽음'에 대해 왜 점점 두려움과 공포를 키워가는 쪽으로 변화되어 온 것일까? 그보다는 살아있었을때의 사랑과 행복에 대해 이야기나누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애도자들과 함께하는 것은 그들이 이미 아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당신에게 말한 것을 그들에게 번역해줌으로써 그들이 그말을 새로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그들의 목소리가 아닌 목소리로, 그들의 입을 벗어난 이야기가 그들의 귀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p. 97)' 라는 저자의 말처럼, 장례식장에 모인 모두가 알고 있는 죽음보다 각자가 알고 있는 떠난이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명사의 남녀 성을 구분하는 프랑스에서 직업명은 기본적으로 남성형이다. (중략) 2019년이 되어서야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오랫동안 터부시되었던 주제인 직업의 여성형을 받아들였다. (p. 106)

무엇보다 선례를 만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느껴졌다. (p. 117) 이 일화가 이토록 유명한 투쟁에 참여한 여성의 장례식 날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그저 피식 웃고 지나갔을지 모른다. 시몬 베유의 무덤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지워버린 행위가 그녀의 투쟁 현안을 탁월하게 증명해준 셈이다. (p. 118)

저자가 1974년생이다 보니 그녀가 진행하는 장례식의 대상들은 그녀의 부모세대, 그러니까 마지막 남은 전쟁세대라 할 수 있다. 유대인에게 2차대전이란 홀로코스트다. 그 속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의 삶은 정통 유대교적이기엔 신이 너무 무능했음을 경험해버렸기에 이도저도 못하는 그런 침묵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한다. 시몬 베유도 그런 생존자였고 프랑스에서 선구자적 페미니스트였다. 테러는 외부에서만 폭탄으로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여전히 남성중심적이고 한국인들이 선망하는 서양인들의 언어는 여성들에 대한 터부와 무시가 기본으로 깔려 있다. 새삼, 평등한 한글과 결혼해도 유지되는 내 이름에 감사를!


솔로몬은 예루살렘의 왕이었다. (중략) 그는 왕궁을 세우고, 나무를 심고, 과실을 수확하고, 보물을 쌓아올린다. 카인의 아들답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그는 말년에 <전도서>라는 책을 쓴다. 그리고 양피지에 모두에게 알려진 이 문장을 반복한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 구절은 <성서>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중 하나이다. 또한 가장 잘못 번역된 구절 중 하나다. 솔로몬은 히브리이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하벨 하발림 하콜 하벨" 예루살렘의 왕은 허무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입김이고 입김이니 모든 것이 입김이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아벨이고 아벨이니... 모든 것이 아벨이다!" 이렇게 현자, 소유자, 정착민, 그리고 재물을 획득하고 세상의 영속성을 믿었던 자는 말한다. 모든 것이 아벨이라고, 그는 인정한다. 우리가 튼튼하게 세운 모든 것이 결국 마모되거나 사라질 때, 약하고 일시적이며 빈틈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세상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지나간 존재의 입김은 증발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숨을 불어넣고, 우리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데려간다. (p. 270~271)

책을 읽으면서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아무래도 내가 좋아하는 역나나 어원에 관련된 부분이었다. 새로 알게된 부분들이 무척 흥미로웠다. 히브리어의 원어 해석을 곁들인 저자의 문장들을 읽다보면 그녀가 해주는 이야기들을 더 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렇게 '자가격리' 시대에 함께 하지 못한 '죽음'들에 대한 생각을 하다보면 저절로 위안이 되기도 한다.

랍비이자 '쇼아'생존자의 손녀이면서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저자의 이야기들은 그동안 알았던 유대교나 탈무드나 성서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에 대해 조금 다른 해석을 보여주어 좋았다. 무엇보다 이 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죽음들이 홀로코스트의 생존유대인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문득 위안부 할머니들이 생각났다. 전쟁의 마지막 세대 그중에서도 가장 피해를 입은 분들의 죽음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도 저자와 같은 책을 내는 이가 나와준다면 좋으련만.... 여하튼, 이 책은 '죽음'을 다룬 책이긴 하지만 마냥 어둡지 않고 그렇게까지 종교적이지도 않아서 새로웠다. '상실'과 '죽음'에 대해 한번이라도 생각해본 적 있는 이가 읽어보면 좋을 에세이였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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