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고전의 세계 리커버
장 자크 루소 지음, 황성원.고봉만 옮김 / 책세상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먼저 말해두자면, 이 책은 <에밀>의 전편을 담고 있지 않다. 문고판으로 머리말과 1장만 가볍게 묶은 책이다.

<에밀 또는 교육론>은 장 자크 루소(1712~1778)가 자신의 저서 중 가장 훌륭하고 가장 중요하다고 꼽은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을 쓰기까지 '20년의 성찰과 3년의 작업'을 거쳐야 했다고 말한다. 실제로 루소는 1740년에 리옹에서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교육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했고, 그로부터 20년 후인 1760년에 1천 쪽에 달하는 원고를 탈고한다. (p. 7)-들어가는 말 中-

그러니까 <에밀>은 원래 1천 쪽에 달하는 엄청난 벽돌책이다. 하지만 교육관련 전공을 한 사람들이라면 루소의 교육론은 반드시 알아야 할 사상이었다. 아니 교육관련자가 아니더라도 일반 중고생의 사회과목에도 사상가로서 루소는 꼭 등장하는 인물이다. 천재사상가였던 그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양극으로 갈린다. 무엇보다 교육론인 <에밀>을 쓴 저자가 정작 자신의 아이들은 고아원에 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를 잘 알지 못하고서는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모순이다.

후대의 많은 인물이 <에밀>의 사상에 흠뻑 빠져들었다. 평생 시계처럼 날마다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를 산책하던 칸트가 딱 한 번 산책을 거른 적이 있었는데 그날이 바로 <에밀>을 읽던 날이었다고 한다. 괴테는 '호주머니에는 언제나 호메로스를, 그리고 머리에는 언제나 <에밀>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나폴레옹 또한 자신의 진중문고에 <에밀>을 꼭 챙겨 다녔다고 한다. (p. 9) -들어가는 말 中-

어떻게 보면 시대의 문제점들을 인식하고 있던 개혁사상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사상가가 루소가 아닐까 싶다. 특히나 <에밀>은 저자 자신이 손에 꼽은 저작이기도 하지만 교육론을 넘어 당대의 많은 모순점들을 포괄하여 지적하고 있는 책이기에 더욱 널리 읽히고 큰 호응 및 거부를 일으켰을 것이다. 루소는 '아이가 작은 어른이 아니라 그 자체로 고유한 인격이요 완전한 존재임을 발견한 것이며, 자연에 따라 '인간을 양성하는 기술'로서의 교육을 발견 (p. 15)' 한 사람이다. 따라서 '루소는 20세기의 모든 교육 개혁가가 택한 길의 교차점에 있다. (p. 18)' 끊임없이 읽혀지는 고전들은 읽고나면 그 이유를 깨닫게 되곤 한다. 루소의 <에밀>도 그러한 고전임에 분명하다.

나는 오래전부터 가정 교육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누구 하나 그보다 나은 실천 방법을 제시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p. 24) 나로서는 인간이 태어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내가 제안하는 바에 따라 그들 자신이나 타인에게 최선의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p. 28) -머리말 中-

루소는 책을 시작하는 짧은 머리말에서 이 책은 '사려깊고 훌륭한 어머니 한 분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쓰기 시작했다. (p. 23)' 고 말한다. 의도와 달리 쓰다보니 엄청난 두께의 책이 되어버렸다고 ㅎㅎ 아마도 루소는 가정교사라던가 당대 귀족들의 집에서 도움을 받으며 살다보니 그들의 자녀교육에 대해 많은 사실들을 알게 됐고 그 많은 사실들이 무척이나 문제가 많다고 여겨졌던 모양이다.

조물주의 손에서 나온 모든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온전한 반면, 인간의 손에 들어오면서 속수무책 나빠진다. (p. 33)

라는 에밀 1권의 첫 문장은 무척이나 유명한 문장이라고 한다. 이 문장에 대해 옮긴이의 주석을 보면 '대부분의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이 대목을 '선'과 '악'의 관념을 사용하여 '모든 것은 조물주의 손에서 나올 때는 선하지만 인간의 손에 들어오면 타락한다'로 번역한다. 물론 이런 번역이 오역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다. 서로 상반되거나 대립되는 내용을 즐겨 사용하는 루소의 표현 방법을 빌려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장점도 있다. 다만 원문에는 '악mal'이라는 말이 '선bon, bien'과 서로 맞대어 비교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염두하고 신중하게 원문을 살필 필요가 있다. (주석19 p. 172)' 라고 설명되어 있다. 불어를 모르므로 옮긴이가 써준 불어 원문을 보고도 알수 없었지만, 번역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하는 첫 문장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무르고 약하게 태어나기 때문에 힘이 필요하고, 아무것도 없이 태어나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하며, 어리석은 채로 태어나기 때문에 판단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태어날 때 갖지 못했지만 어른이 되었을 때 필요한 모든 것을 교육에서 얻는다. (p. 35)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 바로 그것이 내가 그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일이다. 내 손을 떠날 때 그는 분명히 법률가도 군인도 성직자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한 인간이 도달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필요한 것을 누구 못지않게 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p. 44)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죽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갈 수 있게 가르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숨을 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p. 47)

루소의 문장들은 지금 읽어도 고개 끄덕이게 하는 부분들이 많았다. 아니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들이었다. 하지만 이 당연한 관점이 당대에는 파란을 일으켰던 것다는 점이 신기할 정도다. 서구사회 지식인들이 흔히 그렇듯 루소도 고대의 지식들을 자주 활용한다. '공공교육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플라톤의 <정체 politeia>를 읽어 보라. 이 책은 제목에서 짐작되는 바와 같이 정치에 관한 것이 전혀 아니다. 이는 지금까지 쓰인 가장 훌륭한 교육론이다. (p. 41)' 에 대해 옮긴이는 주석에서 ''정치와 교육'에 대한 고대적 논의가 플라톤의 <정체>라면, 이것에 관한 근대적 논의는 루소의 <에밀>이라고 할 수 있다. (주석37. p. 177)' 라고 덧붙인다. 플라톤의 <국가>는 정치체제에 대한 책이라던가 고대철학서로 읽히는 경우가 많지만 루소의 말처럼 교육서로 읽을만한 책이기도 하다. 고대의 지식을 다시 찾는 사상가들을 볼때마다 고대이후 2천년간 인류는 참 변한게 없구나 하는게 새삼 느껴져서 좀 허탈한감도 없지않다. 여하튼, 루소는 자신의 교육론을 펼쳐내기 위해 '가상의 제자를 한 명 만들었다. 또 내가 그를 교육하는 데 적합한 나이, 건강 상태, 지식수준을 비롯한 모든 재능을 가졌다고 가정했다. 그리고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한 사람의 성인이 되어 자신 외에 다른 안내자가 필요하지 않을 때까지 그를 교육해보기로 했다. (p. 68)' 그가 바로 에밀 이다.

아이에게 가르침을 주어서는 안 된다. 스스로 그것을 찾도록 해주어야 한다. (p. 71)

사실 지금도 실천하기 어려운 이 가르침을 루소는 어떻게 해낼 것인가? 그 본격적인 교육이 책 <에밀>에서 펼쳐진다.

이 책은 원본의 1장까지만 다루고 있는 얇은 책이지만 <해제>에 <에밀>전체에 대한 설명이 비교적 상세히 되어 있다. 사실 나는 이 요약본을 읽기 위해 이 책을 선택한 것이다.

루소의 <에밀>은 한 교사가 에밀이라는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서 결혼하기까지, 건전하고 자유로우며 공화국에 합당한 시민으로 어떻게 자라는지 다양한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루소는 이 책에서 아동의 성장 발달 단계를 다섯 단계로 구분해 단계별로 적합한 교육 과정을 제시한다. 이 발달 단계는 크게 영,유아기, 아동기, 소년기, 청년기 그리고 성년기로 나뉜다. 전부 5권(각각 나뉜 5권이라기보다 한 저작 안의 5부로 보는 것이 좋다)으로 이루어진 <에밀>의 각 권은 이 다섯 단계와 일치한다. (p. 138)

책<에밀>을 읽는다는 것은 한 사람의 성장사를 읽음으로써 소설처럼 읽히기도 한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사건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가치관이 들어가는 과정은 굉장히 폭넓은 사상을 투영하게 됨으로 읽기 어려운 책이라고도 한다. <해제>에서 짧게 언급된 각 권의 설명들을 보며 만만치 않겠다 싶으면서도 무척 궁금해진다. 루소는 에밀을 과연 제대로 된 인간으로 잘 교육 시켰을지.

ps. '누구든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토록 신성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자는 오래도록 자신의 잘못에 대해 쓰라린 후회의 눈물을 쏟게 될 것이며 결코 그 무엇으로도 위로받지 못할 것이다. (p. 65)' 라는 문장은 루소가 자신의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을 담은 문장이라고 한다. 옮긴이는 주석에서 '루소는 <에밀>을 쓰는 목적 가운데 하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읽게 될 젊은 이들이 같은 잘못으로 과오를 범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고백2> 121쪽)'라고 말한다. (주석48. p. 180)' 라고 부연설명한다. 루소는 천재적인 사상가였고 특히나 교육론에 선구자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이 다섯을 모두 고아원에 버렸다. 물론 당시 루소의 상황이 경제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아이를 키울 수 없는 형편이었다고는 하나 분명 잘못은 잘못이다. 후에 상황이 나아졌을때 고아원에 아이들을 찾으러 갔으나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루소의 아이들은 루소를 비판하는 모든 이들에게 가장 큰 비난요소가 되었다. 개인사적 상황을 알 수 없으니 루소 본인의 아버지로서의 입장에 대해서는 내가 뭐라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에밀> 책 자체만 봤을 때는 분명 대단하다. 1장만 봤는데도 그랬다. 비판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라도 좀더 잘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따라서 루소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루소의 교육론에 찬성하는 사람들도 <에밀>은 읽어봐야 할 고전이 아닐까하고 추천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