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관계, 고부관계, 부모와 자녀사이, 시댁갈등 및 맞벌이가 늘면서 장서갈등까지 가족이라는 좁은 테두라 안에서 있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관계에서의 갈등과 충돌이 드러나고 얘기되면서도 유독 모녀사이에서의 문제는 그동안 문제화되지 않았다. 친정엄마 라는 단어에 내포된 따듯하고 포용적인 이미지에 공감하지 못하고 친구같은 딸이라는 표현에 감춰진 폭력에 대해서 이제 꺼내놓을때가 된 것일까. '매일 떠오르는 작열하는 태양과도 같이 딸의 곁에 머무는 엄마... 아, 딸은 정말이지 태양을 피하고 싶다. (p. 25)' 에 웃프게 혹은 아프게 공감하는 딸들이여 이제라도 독립하라!
저자는 '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엄마'라고 부를 때 느끼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나의 엄마는 일반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일상에서 불리는 엄마라는 단어가 주는 정서를 잘 모른다. (p. 57)' 라고 하면서도 '엄마의 투병을 함께하며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예견된 죽음과 갑작스러운 죽음, 둘 중 무엇이 더 나을까, 무엇이 덜 슬플까, 무엇이 더 슬플까.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어떤 형태라 하더라도 둘 다 가늠할 수 없는 절대 적인 슬픔일 테니까. (p. 79)' 라면서 엄마에 대한 사랑과 슬픔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인정하고 이해하여 받아들이게 된 자신의 모녀관계를 바탕으로 다른 모녀관계에 대한 토대를 닦아주려 주려 한다.
장녀로서의 희생, 왜곡된 남성관, 아바타같은 딸... 등등 '평범하지 않은 엄마'를 이해하기 위한 과정은 자신이 엄마가 되고나서야 가능해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엄마같은 엄마가 되지 않겠어 이든 (보통의 엄마같은) 엄마다운 엄마가 되겠어 이든 내가 보살핌 받아야 했던 시기에 받지 못한 것은 내가 보살핌을 해주어야 하는 대상이 생겼을때 비로소 서로 상호보완적 이해가 가능해지게 된달까. 그렇게 내 아이를 키우는 '그 시간은 내가 나를 양육하는 시간 (p. 143)' 이 될 수 있고 그제서야 '나'는 엄마라는 태양을 피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고나 할까...
지극히 사적인 관계일 수 있는 모녀관계 나아가 가족관계는 사실 굉장히 사회문화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는 관계이다. '내가 이 병에 대해 가장 큰 충격을 받았던 부분은 화병이 파리나 뉴욕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쉽게 걸리지 않는, 한국 고유의 국지적인 토속병이라는 사실이었다. (p. 213)' 그러니까 한국사람이라고 다 화병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나고자란 한국사람이 화병에 걸린다는 말이다. 왜? '한 인간이 성장하고 처한 거대한 배경이자 맥락인 사회적·문화적 특수성을 배제할 수 없(p. 213)'기 때문이다. 더구나 화병은 주로 여성이 잘 걸린다. '화병이라는 특수성을 가진 민족의 딸이자 엄마들이 부정적인 감정을 잘 표현하기란 퍽 어려운 일이다. (p. 213)' 모녀관계의 이해에 있어서도 화병의 맥락은 이해할 필요가 있다. 화병을 대물림받지 않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