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 실종, 미궁, 오컬트 신봉자, 초월적 사고 그리고 자신을 찾는 열여섯번째 사람. 새로운 사실 새로운 증거 그리고 새로운 사람.
그동안 안개속을 걷는 것 같던 소설은 이제 기묘한 퍼즐맞추기로 전환된 듯 읽힌다. '2012년 11월 15일의 사건 (p. 242)' 이날 매슈 로즈 소런슨은 사라지고 피라네시는 탄생했다.
'집은 헤아릴 수 없이 아름답고, 무한히 자애롭다. (p. 345)' 라는 마지막 문장은 본문에서 이미 나왔던 문장임에도 마지막에 그 의미를 달리해서 다가온다. 인간의 고독과 그 고독을 품어주는 '집'에 대해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사실 소설 내용 자체만으로는 이 책을 소개하는 온갖 칭찬과 미사여구들이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옮긴이의 글'을 통해 작가의 삶을 알고나니 이 소설이 새롭게 공감된다. '힘겨운 시기를 보내던 때 작가는 다른 사람가 한 공간에 있는 것이 무척 힘들었는데, 홀로 이런 세계에, 건물들로 가득하지만 조용한 세상에 있는 상상을 하면 마음이 차분해졌다고 한다. 몇 년이 흐르는 동안 조금씩 회복되면서 작가는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쓰기 시작했고, 우여곡절 끝에 <피라네시>를 완성했다. (p. 351)' 자신의 삶을 담은 글은 그 울림이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작가의 삶이 담긴 소설을 늘 애정한다. 허구일지라도 삶이 진정 담겼느냐와 담기지 않았느냐는 작품의 공감도를 전혀 달리한다. '피라네시가 집에 홀로 거주하면서 그곳에서 위로받듯이 작가도 상상속의 세계에서 조용히 위로받고 있었다. 피라네시는 그야말로 작가의 분신이었던 것이다. 이야기 속의 피라네시를 보면 '자기'를 잃고 어떤 면에서는 '분열되었다'고 할 수 있는 상태인데도 그런 그가 밝게 묘사되는 점이 신선하고 재미있었는데, 어쩌면 작가 자신도 그에게서 희망을 찾고 있었던것은 아닐까. (p. 352)' 라는 옮긴이의 말에 동의한다. 피라네시는 작가 그 자신이었다.
피라네시 라는 단어를 잠깐 검색해봤을때 그닥 소득이 없었는데 옮긴이가 해설을 붙여주어 고마웠다.
'주인공의 이름 피라네시는 18세기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건축가 조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에서 따온 듯하다. 그는 16점으로 구성된 '감옥'을 판화로 발표했다고 하는데, 지하에 있는 이 감옥들을 보면 계단과 기계장치가 두드러 진다. (중략) 주인공 피라네시가 '집'이라고 부르던 공간을 상상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p. 354)' 누군가에겐 집이 감옥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소설속 노인이 실제 감옥을 좋아했던 것처럼 감옥이 집보다 나을수도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며 피라네시의 미궁이 감옥인가 집인가에 대해 의견이 크게 갈릴 것 같다. 감옥처럼 보이는 집일수도 집처럼 보이는 감옥일수도 있다. 매슈에겐 미궁이 감옥이었지만 피라네시에겐 집이었듯이 매슈의 집이 있는 도시가 피라네시에겐 감옥일 수 있다. 그래서 미궁을 다시 찾게 되는 심리가 이 소설을 환상문학으로 읽게하는 감정이었던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