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 (양장) 소설Y
천선란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날, 식물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독보적 상상력, 폭발하는 스토리텔링!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소설, 눈 앞에 펼쳐지는 판타지 드라마



대본집 형태로 받은 가제본 책이었다. 가제본으로 받아 읽는 책은 일반 책과는 다른 설렘을 주곤 했는데, 대본집 형태는 또다른 설렘을 주었다. 이 새로운 설레임으로 첫장을 넘긴 순간 마지막장이 나올때까지 한순간도 내려놓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압도적 가독성!

이곳은 원래 죽은 땅이었다. (p. 5)

공장폐기물이 쌓여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버려진 땅, 그 땅에 왠 여자가 나타나 화원을 짓겠다고 했을 때 마을 사람들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죽은 땅이 살아났다. 그것도 불과 두달도 지나지 않아서.

여자는 '브로멜리아드' 라는 화원을 개업했다. 그 화원엔 어디서 듣도보도못한 신기한 식물들이 자랐다. 그리고 거기서 한 아이가 자랐다.

미래는 두 사람과 오피스텔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며 엄마의 애인은 여자라고 툭 내뱉었다. 그러자 나인이 자신은 이모랑 살고 엄마 아빠 얼굴도 모른다고 말했고, 현재는 가끔 무서워서 누나랑 같이 잔다고 말했다. 미래는 승강기가 멈춰 설 때쯤 자신의 고백은 고백도 아니었다고 말하며 웃었다. (p. 20)

초등학교때 만난 미래, 현재, 나인은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며 단짝 친구로 자랐다.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고 서로가 있기에 든든했다. 그런데 고등학생이 되고나서 언제부턴가 셋 사이에 미세한 균열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나인은 자신에게 들리고 보이는 것에 대해 아직은 말할 수가 없었는데 그러던 차에 학교선배인 박원우의 실종사건에 대해 알게 된다. 이년전 '이상은 했지만, 엄청나게 대단하지는 않은 (p. 15)' 고등학생의 잊혀진 가출사건.

절대 죽지 않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지모가 키운 식물은 누구에게 가더라도 죽지 않는다. (p. 26)

나인이 보는 지모는 그저 매일같이 잎사귀를 닦고, 매만지고, 이야기 나눌 뿐이었다. 어쩌면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식물에게 말을 거는 게 비밀이라면 비밀일 수도 있겠다. (p. 27)

화원을 운영하는 이모를 '지모'라 부르며 나인은 평범하지 않은 환경이지만 평범하게 사는 여고생이었다. 그런 나인에게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세상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 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벗겨 낸 세상의 비밀을 한 겹씩 먹으면, 어떤 비밀은 소화되고 흡수되고 양분이 되고, 어떤 비밀은 몸 구석구석에 염증을 만든다. 비밀의 한 꺼풀을 먹지 않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세상의 시스템은 그걸 먹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도록 설정되었다. 그러니 언젠가는 반드시 먹어야만 하는 것이다. 시기가 너무 이르면 소화하지 못해 탈이 나거나 목이 막혀 죽기도 하고, 너무 늦으면 비밀을 흡수하지 못하고 그대로 배출시켜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텅 빈 몸이 된다. (p. 28~29)

자신의 출생에 대해 물었을때 지모가 한 이 말이 나인에게는 모든 의문에 대한 답으로 자리매김했다. 비밀은 미래에게도 현재에게도 각자 생겨나고 있었다. '믿기지 않을 진실이라도 일단은 서로 믿어 주기로 (p. 30)' 약속한 셋이었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건 각자의 비밀도 생겨나는 것이었다. 언젠가 털어놓게 되더라도 일단은 서로에게 비밀인 그런... 그런데 나인 본인도 모르고 절친 미래와 현재도 모르는 비밀을 떡하니 말해준 이가 나타났다.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네가 듣고 있는 이상한 소리, 그거 식물이 대화하는 소리야. 그게 들리는 건 너도 식물이라서야. 좀 많이 진화하긴 했지만" (p. 31)

'미친 새끼' 나인은 갑자기 자신에게 나타나 이상한 소릴 하는 소년에게 속으로 '미친새끼' 라고 말했지만, 소년은 계속 나인 앞에 나타났고 나인 스스로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아직 그 비밀을 들춰낼 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혼란스러워하는 나인에게 지모는 너무나 쉽고 스스럼없이 진실을 말해주었다.

식물처럼 땅에서 자라는 종족을 부르는, 그 이전 행성에서 자신들을 지칭했다던 단어. 초거성 리겔 근처에 있던 지구만 한 행성. 그곳에서 살았던 종족 누브. 수명이 다한 행성을 막을 수 없어 맞이한 멸망. 그렇게 찾아 헤매다 발견한 지구. 이주를 거부한 절반은 행성과 함께 죽고, 수송선 두 대 중 한대가 소행성과 충돌해 반의 반의반도 안 되는 일부만 도착했다. 오래전에, 아주 오래전에. (p. 48)

당연히 인간인줄 알고 살아온 나인이 외계인이라니?! 그 황당함과 당황스러움에 대해 지모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준다. '너는 땅에서 태어났지만 다른 누군가는 알에서 태어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물속에서 태어나 치어로 살다가 뭍으로 오며,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살을 떼어 도자기처럼 굽는다고. 듣다 보니 생명을 십 개월이나 몸속에 품고 있는 것이 불필요할 정도로 길다는 생각도 들었다. (p. 61)' 지구인들 사이에 다양한 외계인들이 섞여 살고 있다는 것이 소설을 읽는 내내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자연스러워서 당장 주변을 살펴보고 외계인 친구를 찾고싶은 마음이 들곤 했다. ㅎㅎ 여하튼 나인은 그렇게 '피어났다'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것이 아니라 피어난 것임을 깨달은 그 순간 실종된 선배의 죽음을 알게 된다.

우연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난다. 세상이 정말 정해 둔 것처럼. 쥐 죽은 듯이 기다리다가 해결사가 나타나면 그제야 소리친다. 꽁꽁 숨어 있다가. 평소에는 보이지도 않다가. 이렇게 갑자기. 정말 치사하게. (p. 134)

나인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힘겨운데 절친 미래와 현재도 제 나름의 비밀을 감추고 힘겨워하고 있는 것 같아 이래저래 고민을 털어놓을 수가 없다. 그런데 엎친데덮친 격으로 학교선배의 실종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고 묻혀진 그 사건의 억울함을 그냥 두고볼수가 없다. 그래서 갑자기 나타나 자신이 유일한 친구라고 말하는 소년 승택과 사건을 파헤치게 되는데...

소수가 다수를 이기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지겹고, 지긋지긋하고, 진절머리 나게 구는 것이라고. 그게 지모가 살아오며 깨달은 중요한 이치 중 하나였다. (p. 156)

"인간들은 그래. 믿을 수 없는 게 하나 생기면 모든 걸 다 가짜로 만들어 버려" (p. 163)

나인에게 들이닥친 문제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친구관계, 가족관계, 종족관계에 누군가의 억울함과 누군가의 슬픔과 누군가의 외로움이 한꺼번에 나인을 덮쳤다. 스토리적 몰입력도 압도적이었지만 문장의 맛도 뛰어났다. 예를들면 이런것,

피가 극도로 식으면 어는점에서 굳는다. 끓는 점의 폭발은 분노와 모멸이고 어는점의 폭발은 상처와 서글픔 같다. (p. 171)

이 세계가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은 괴로운 것 같아. 누군가가 내 세상을 떠나면 그 사람이 찢고 나간 틈으로 또 다른 세상이 보여. (p. 202)

사건해결의 진행도 흥미진진했지만 세 친구의 우정이 단단해지는 과정이 따듯해서 좋았다. 역시 청소년문학은 이런 감동이 있어 참 좋다.

외계인이 등장한다고 다 SF처럼 읽히지는 않는다는 것도 이 작품을 통해 처음 느꼈다. 외계인이건 지구인이건 그런건 중요치 않았다.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믿음이고 진심이었다.

그러니까 나인은, 기적이라는 뜻이야. (p. 477)

판타지적 소재와 휘몰아치는 사건을 현실적 감동으로 꽉 채우는 소설 <나인>으로 위 '기적'을 느껴보길 강추한다.

창비 K-영어덜트 소설Y시리즈 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