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전 그 다짐을 보며 남훈씨는 도망쳐왔던 지난날을 떠올리는 것이 괴롭고 마뜩지않아 미루고미루고미루던 중이었다. 사실 지금의 아내와 늦둥이 딸은 모르지만 그에겐 전처와의 사이에서 딸이 한명 있었다. 하지만 딸 보연이가 여섯살때 이혼한 후 연락을 끊은 터라 마흔살이 다된 딸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는지 알지 못했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노트 속 마지막 한 문장은 내내 남훈씨 마음에 걸려 있었다.
'스페인으로 '진짜 가족'을 찾아 나선 한 남자의 플라멩코 정복기' 라는 뒤표지의 문구를 봤을때 스페인으로 가서 잃어버렸던 가족을 찾는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남훈씨에겐 스페인에 살고 있는 가족이 없다. 가족은 모두 그의 근처에 한 도시에 살고 있다. 스페인으로 가족을 찾아 나섰다기 보다는 스페인어를 배우고 플랑멩코를 추며 스페인으로 여행을 다녀옴으로써 가족애를 돈독히 하는 그런 정도의 연결고리라고 볼수 있다. 스페인은.
허남훈 씨라는 한 아버지의 인생사 굴곡을 따라 펼쳐지는 가족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기에 술술 읽히고 만남과 헤어짐 혹은 상처와 보살핌 이라는 드라마적 요소와 적절히 어우러져 가족의 범위가 확장되는 해피엔딩으로 자알 마무리된다.
크게 무리없이 읽히는 편안한 소설책에서 거슬렸던 부분이라면 작품 끝에 해제처럼 붙어있는 '혼불문학상 심사평' 이었다. '심사위원 대부분의 의견은 안타깝게도 최종심에 올라온 작품의 수준이 다소 떨어지고 고르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혼불문학상>의 위상을 재정립하고 더 젊은 문학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그에 합당한 작품을 찾기 위해 장고에 들어갔다. (p. 269)' 다시말해 상을 줄만한 뛰어난 작품이 없었기에 오랜시간을 들여 고르고 골라 그나마 상을 준 작품이 <플라멩코 추는 남자> 라는 소리다. 기왕 상 준거 굳이 이런 사족 붙일 거 뭐있나? 이래놓고 뒤에가선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작품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p. 271)' 라고 해봤자 크게 위안이 될 것 같진 않다. 어떤 문학상에서 심사위원을 맡는 작가들도 따지고 보면 그닥 훌륭한 작품이나 베스트셀러를 쓰지 못한 작가들도 있기 마련이던데 심사위원이라는 타이틀을 목에 걸었을때 내뱉는 문체가 나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하튼, 이 책은 따듯한 가족이야기 이다. 매정한 뉴스에 마음이 씁쓸해지고 차가운 사회에 마음이 허해질때 이 작품과 같은 가족이야기는 은은한 화롯불처럼 마음 한편을 뭉근하게 뎁혀 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