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왜 사라졌는가 - 도시 멸망 탐사 르포르타주
애널리 뉴위츠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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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소멸의 미스테리를 풀어내려면

어떻게 번성하고 유지되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얼마전 도시의 역사로 세계사를 엮어내는 책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었다. 그 세계사 속 도시들은 과거의 영광을 잃은 도시도 있었고 꾸준히 발달중인 도시도 있었으며 새롭게 부흥하는 도시들도 있었다. 도시의 역사를 보는 것으로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후였기에 도시멸망에 대한 이 책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 속 그 도시들은 왜 사라졌을까?

하지만 이 책은 사라진 도시에 대해 세계사적으로 살펴보는 책은 아니다. 이 책의 원제는 FOUR LOST CITIES 이고 그 사라진 4개의 도시는 차탈회윅, 폼페이, 앙코르, 카호키아 이다. 이 책은 그러니까 이 4개의 도시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4개의 도시는 사라지지 않았다 라고나 할까.

'사라진 도시'는 서방의 판타지에 단골로 등장하는 표현이다. 발견되지 않은 엄청난 세계, 아쿠아맨이 거대한 해마와 어울려 다닌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사라진 도시를 믿고 싶게 만드는 것은 단순히 현실도피적인 이야기에 대한 애호는 아니다. 우리는 세계 대부분의 주민이 도시에 사는 시대에 살고 있고, 기후 위기나 빈곤 같은 풀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해 있다. 현대의 대도시는 결코 영원히 유지될 수 없고, 역사적 증거는 지난 8000년에 걸쳐 반복적으로 도시를 선택하고 버려왔음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인간이 소멸될 수밖에 없는 곳에 거주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사라진 도시라는 신화는 사람들이 자기네 문명을 파괴했다는 현실에 눈감게 만든다. 이 책은 바로 그 현실에 관한 것이다. (p. 13) -프롤로그 中-

'사라진 도시' 에 대한 판타지는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인디아나존스 같은 영화에서 처럼 보물을 가득 품고 미지의 장소에서 신비롭게 나타나는 그런 도시는 사라진 도시여야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앙코르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애당초 앙코르를 사라진 도시로 자리매김한 것은 미디어가 조작한 것이엇다. 모든 증거는 그 반대였다. (p. 13)' 고 말한다. 앙코르는 사라진 적이 없었다고 이 도시엔 과거부터 현재까지 늘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그런데 어쩌다 '사라진 도시'가 되어버린 것일까? 그 해답은 이 책을 읽으며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다보면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인류 역사에 나타났던 도시 폐기 가운데 가장 극적인 네 개의 사례를 탐구하고자 한다. 이 책에 나오는 도시들은 모두 저마다의 종말을 맞았지만, 공통된 실패 요인을 갖고 있다. (p. 13)' 이 4개의 도시들은 모두 우리에게 '사라진 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이 도시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라진 것과 용도폐기는 분명 다른 의미이므로.

나는 모든 도시의 죽음은, 우리가 언제나 그 종말을 개별적으로 보기 때문에 미스터리로 느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극적인 소멸의 순간에만 집중하고, 그 오랜 생존의 역사를 잊는다. 사람들이 도시를 유지하는 방법에 관해 수많은 결정을 내리면서 보낸 수백 년의 세월을, 우리가 사람들이 도시인으로 살았던 특별한 방식을 이해해야만 그들이 왜 자기네 도시를 죽게 만드는 선택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p. 21) 도시 생활의 운명은 인류의 운명에 매여 있다. 우리가 21세기에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한다면 우리 지구 전체의 모습을 바꾸어놓을 어떤 유해한 도시 생활이 확산할 위험성이 있다. (중략) 도시의 시대가 이런 식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차탈회윅, 폼페이, 앙코르, 카호키아는 사라지기 전에 번성하는 문명의 중심지였다. 그들의 어두운 매리는 결코 미리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중략) 결국 우리는 우리의 잘못으로부터 가장 좋은 방법을 배운다. (p. 23)

'우리는 우리의 잘못으로부터 가장 좋은 방법을 배운다'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알아야 하고 읽어야 한다. 우리가 역사 속에 사라졌다고 멸망했다고 묻어둔 도시들을 다시 들춰봐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현재 도시에서 대부분의 삶이 이루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고 이러한 도시 생활이 지구환경을 망치고 있다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다. 하지만 도시생활을 멈출수가 끊을수가 없다. 그러나 계속 이런식이면 도시의 죽음이 앞당겨지리라는 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을뿐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니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잘못으로부터!

결국 길들임이란 자연을 배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여과 과정에 가깝다. 어떤 생명체는 받아들이고 다른 것은 차단한다. 길들여진 동물·식물·사람은 집 안에 들어와 살지만 야성은 벽에 갇힌 상태다. 차탈회윅의 도시 디자인은 길들여진 생활에 불편하게 적응하고 있는 사회를 반영한다. 그 사람들은 자기네의 야생의 과거에 매달려 있다. 그것이 그들에게 힘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억제되기를 원했다. 조금 거리를 두고서 말이다. 이 고대 도시 사람들이 조금 거리를 두길 원했던 것이 또 있었다. 바로 이웃들이다. (p. 43) 인간은 우리가 상시적으로 집에서 살기 시작하기 훨씬 이전에 집을 지을 기술적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 것이 기술적 혁신 때문은 아니었던 듯하다. 실제로는 거꾸로였을 것이다. 사회가 점차 복잡해지면서 우리에게는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보다 영구적인 대상이 필요했다. (p. 46)

'괴베클리 테페 사람들은 황야에서 새로운 사회를 강화하려고 애쓴 반면, 차탈회윅 사람들은 수천 개에 달하는 '자신감 있는 기성사회'의 일부였다. 괴베클리 테페의 거대한 야생 동물 조각품과 색칠한 두개골의 공개 전시는 차탈회윅의 사람들 집 내부에 작은 규모로 존재한다. 차탈회윅에서 이것들은 화덕 및 집과 관련된 사적이고 가정적인 물건이 됐다. 이는 차탈회윅 사람들이 더 이상 어떤 단일 장소와의 일체감을 형성할 긴급한 필요가 없어졌다는 징표일 수 있다. (p. 49)' 괴베클리 테페는 농업혁명을 거스르는 대표적인 유적이고 차탈회윅은 공동생활보다 사생활이 강조된 대표적인 유적이라고 볼 수 있다. 둘다 기존의 역사적 '혁명'들에 대해 다른 논리를 요구하는 유적들이다. 8천여년전의 고대인들이라고 해서 석기시대인들이라고 해서 우가우가 하는 침팬지친구로 여겨서는 곤란하다. 우리가 지금의 형상을 갖추고 생활을 영위해온 것은 서기부터 시작되는 고작 2천년이 아니다. 훨씬 그 이전부터 지금과 거의 흡사한 모습으로 살아왔음을 알아야 고대시대에 대한 거리감을 완화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농업혁명이나 도구혁명 같은 기술적인 면에서만 인류역사를 이해하는 것도 곤란하다. 종교가 먼저인지 정착생활이 먼저인지 확신하는 것도 곤란하다. 역사는 총체적으로 이해해야 하고 유적들은 갈수록 더욱 새로운 진실들을 알려주고 있다. 그 새로운 증거들은 '다산의 여신을 숭배하는 모계사회' 도 잘못된 해석이라고 반박한다.

차탈회윅이 여신을 숭배하는 모계사회가 아니었다면 그 여성 조각상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차탈회윅 일대에서 출토된 소조각상을 연구한 스탠퍼드대학 고고학 교수 린 메스켈은, 멜라트와 그 시대 사람들이 이를 잘못 해석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이 유적지를 전체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얻을 수 있는 맥락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25년에 걸친 지속적인 발굴에서 얻은 자료들 덕분에 이 여성 조각상들은 보다 복잡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음이 밝혀졌다. (p. 64)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차탈회윅으로 모여든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전문화의 편익일 것이다. (p. 72) 역사관은 또한 알지 못하거나 그곳에 없는 사람들을 아우를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한 추상적 관념을 나타냈다. (중략) 이는 유목민 사회에서 공동체라는 것이 모두의 얼굴을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한다고 생각했을 사람들에게는 철학적인 도약이었다. (p. 75) 도잇에 우리는 차탈회윅 바깥에는 도시인이 거의 없던 시대에 도시생활이 얼마나 이상했을지를 인식해야 한다. (중략) 결국 그들이 견뎌내지 못한 마지막 난관은 서로에게 대처하는 문제였다. (p. 76)' 차탈회윅 사람들이 남긴 유적을 통해 그들의 생활모습을 구체적으로 점검해보고 추론해보는 과정은 흥미로웠다. 그들은 당대에 일종의 실험적인 시도들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 실험과 도전들이 거대한 도시를 일구어냈고 발전시켰으며 문제점을 깨닫게 했다. '호더는 오늘날 고고학자들의 공통된 생각을 되풀이한다. '사라진 도시'나 '문명붕괴'같은 용어는 이런 경우에 사용하기에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도시가 변화를 겪었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중략) 도시들은 오랜 시간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가 갑자기 사라져 아무것도 남지 않은 정적인 존재가 아니다. 도시는 어떤 시기에라도 여러 사회 집단의 복합체다. 그 집단들은 도시 생활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볼 것이다. 그리고 그 사회 집단들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며, 그들의 세계관을 반영해 도시의 물리적·상징적 구조를 변화시킨다. 더 이상 함께 살기를 바라지 않는 순간까지 말이다. 그러나 차탈회윅에서 그 일이 일어난 순간에조차도 도시를 '잃어버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p. 79)' 세계사의 발견들에 대해 우리는 서양인들의 지식에 기대있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우리도 발견한 역사로 배운다. 하지만 그들이 몰랐다고 해서 거기에 살았던 사람들이 없어져서야 되겠는가. 도시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저 변화한 것일뿐이었다. 현재의 모습과 너무나 다르다고 해서 그 중간 과정을 스킵하고 과거의 그 도시는 사라졌었으나 현대에 발견되었다 라고 해서는 안될 것 같다. '차탈회윅이 명백한 도시와 초기 형태의 도시 사이의 애매한 위치에 있기는 했지만, 이 도시의 폐기는 도시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에 부합한다. (p. 94)' 도시의 사라짐과 재발견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왜 당시 사람들이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차탈회윅의 흥망성쇠를 상상하며 역사를 맥락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나는 네로가 좋아요!"

나는 너무도 놀라서 커피를 엎질렀지만 메모를 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던 휴대용 컴퓨터는 가까스로 피했다. (p. 118)

"그는 실제로 여성들에게 좋은 일을 했어요"

(중략) 네로는 그의 치세 동안 연극에 돈을 쏟아부었고, 순회공연 수요는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휴즈는 설명했다. 가장 의도하지 않앗던 결과로서 '네로 치하에서 극장이 개방되고 더 많은 여성들이 공연 무대에 참여'했다고 휴즈는 말했다. 여성들의 공연이 흔해졌지만, 여성들은 제작자와 후원자로서 연극 산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p. 119)

폼페이는 화산폭발로 사라진 도시로 대부분 기억되고 있다. 폼페이가 화산폭발로 더이상 사람이 살수 없게 된 것은 맞지만 폼페이 사람들의 삶까지 멈춘 것은 아니었다. 폼페이 사람들의 생활은 당대의 로마에 대해 많은 것들을 새롭게 보여주고 있었다. '식민 역사로 인해 폼페이는 다多언어 사회가 됐다. (p. 106)' 다문화 사회였던 폼페이에서는 해방노예와 여성들의 재산축적이 가능했고 상업의 발달로 계층분화가 뚜렷해지고 있었다. 화산폭발이 갑작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지진으로 여러번 위험이 경고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왜일까? 차탈회윅 연구에서 중요한 것이 맥락이었다면 폼페이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데이터고고학이었다. 폼페이에 남겨진 수많은 흔적들은 데이터화 되어서 점점 더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연구자들이 200여년 동안 폼페이를 발굴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르티스와 아마란투스가 살던 세계에 대해서는 최근까지도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해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그것은 데이터고고학이 우리에게 상류층 이외 사람들의 삶을 탐구할 새로운 도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가 역사를 연구하는 방식에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20세기 사람들이 폼페이를 소중하게 여기고 추가 발굴을 위해 거듭 이곳을 찾았지만, 그 문화에는 그들이 잊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 (중략) 그들의 기독교적 가치관을 벗어던지고 로마인들의 눈으로 이 인공물들을 바라보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p. 155)

'도시는 집의 집합체라기보다는 화려하고 복잡한 공적 공간이었다. (p. 158) 아무도 폼페이를 버리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다. 그곳이 불더미에 묻힌 것은 거의 견딜 수 없는 상실로 느껴졌다. 그리고 많은 생존자들은 서둘러 다른 도시들에서 자기네의 삶을 재건하고 그들이 잃어버린 공적 공간의 새로운 변형을 건설하는데 헌신했다. (p. 159)' 폼페이라는 물적 공간은 화산재속에 묻혔지만 사람들은 폼페이에서의 삶의 방식을 다른 곳에서 새롭게 일구어 나갔다. 그렇다면 폼페이라는 도시는 사라졌다고 봐야할까? 아닐까? 폼페이 라는 도시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공적 공간' 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이었다. 이 공적 공간에 대한 개념은 차탈회윅 사람들과 무척 달랐다.

로마문명과 달리 크메르 전통은 사라지거나 소멸한 것이 아니다. 앙코르에서 꽃핀 문화는 오늘날까지 캄보디아인들의 삶에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계속 영향을 미친다. (p. 181) 유럽 고고학자들이 처음 앙코르에 갔을 때 그들은 서방 방식의 도시 발전을 찾도록 길들여져 있었고, 이에 따라 이 도시에 있던 거의 대부분의 집은 그들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앙코르와트와 아옼르톰의 석조 탑으로 직행해 이들 사원 단지가 담으로 둘러싸인 작은 도시라고 잘못 이해했다. 넓게 확산된 도시 안의 담으로 둘러싸인 구내였는데 말이다. 그들은 한때 꽉 들어찼던 주거 구역들과 저수지, 농경지들이 주변 넓은 땅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지만 전혀 보지 못했다. (p. 188) 이 도시는 심지어 15세기 초 왕실이 이곳을 떠난 뒤에도 비어 있던 적이 없었음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략) 무오의 기록은 수리야바르만이 옛 앙코르를 몽땅 서바라이 밑에 묻어 말소한 것만큼이나 대담하고 오래간 역사 변개행위였다. (p. 229)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4개의 도시중 가장 개탄스러웠던 것이 앙코르 였다. 서양인들은 앙코르를 발견했다고 떠들썩하게 요란을 떨었으나 크메르인들은 내내 앙코르에서 살고 있었다. 일종의 식민사관 혹은 제국주의적 사관으로 보여지는 이러한 역사 변개행위는 사실 앙코르에서 뿐만이 아니라 서양이 아닌 많은 지역에서 일어났다. '늘 그렇듯이 진실은 전설보다 더 기묘하고 더 복잡하다. (p. 230)' 그 진실이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밝혀지기를 바랄뿐이다. 캄보디아 앙코르에서 나온 고고지지학적 증거는 15세기의 붕괴가 대재앙이라기보다는 점진적인 쇠락이었음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중요했던 것은 '정치' 였다.

17세기에 유럽인들이 일리노이를 탐험할 때 이 도시는 수백년 동안 버려져 있었다. 당시 이 지역에는 카호키아족이 살고 있었다. 일리노이연맹에 속하는 한 부족이다. 유럽인들은 이 부족 이름을 따서 이 고대 도시를 부르기로 했다. 카호키아족 스스로는 이 도시를 건설했다고 주장한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리하여 카호키아라는 이름이 고착됐다. (중략) 카호키아인들에게 도시의 폐기는 실패나 손실이 아니었고, 오히려 예측된 도시 생명 주기의 일부였다. (p. 260)

4개의 도시중 생소했던 유일한 도시가 바로 카호키아 였다. 그 넓고 풍요로운 땅 아메리카 대륙에 인류의 역사가 없었을리 없건만 인도가 아닌 대륙에 인디언이라 이름붙인 원주민들의 역사에 대해 그동안 너무 몰랐다. 지금의 미국 땅에도 당연히 고대유적 거대유적이 있.었.다. 미시시피강 유역의 고대인들은 또다른 도시생활을 만들어 살았었었다.

이 책에서 본 다른 모든 도시들도 그렇지만, 카호키아도 고정돼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유적은 수백 년에 걸쳐 몇 개의 시기를 거치며 역동적으로 변화한 문화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것이 오늘날 많은 고고학자들이 문명은 '붕괴'국면과 대비할 수 있는 '고전기' 내지 '절정기' 가 있다는 생각에 의문을 표시하는 이유다. 붕괴 관념은 사라진 도시가 유럽 고고학자들에 의해 기적적으로 '발견'됐다는 19세기에서 20세기 초의 식민지 시대 전통과 같은 발상이다. 이런 전통에 따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회가 유럽 문명들이 밟은 길을 그대로 따라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 커지고, 더 계층적이며, 더 공업화한다는 것이다. 시장경제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회는 '미개발'사회로 부르고, 확장을 멈춘 도시는 문화가 붕괴한 실패자로 낙인찍는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증거와 부합하지 않는다. (p. 293)

'1970년대에는 이미 고고학자들과 도시사학자들이 도시 문명에 정해진 발전 패턴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증거를 많이 축적하고 있었다. 많은 도시들은(앙코르와 카호키아도 여기에 포함된다) 비시장 원리에 따라 조직됐다. (p. 293) 한 도시의 주민이 작은 마을들로 쪼개지더라도 그것이 실패는 아니다. 그것은 변화일 뿐이고, 흔히 정상적인 생존 전략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 도시의 문화는 조상들을 이어받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전통 속에서 생명을 이어간다. (중략) 도시를 버리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은 그것이 정치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p. 294)' 저자는 기존 학자들의 환경결정론적 도시붕괴론에 대해 반박한다. 중요한 것은 공적 공간과 그것을 사용하는 사회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의 문제라면서 모든 도시는 건축술을 이용해 공적 영역을 만들어내느 실험이라고 표현한다. 붕괴나 멸망 보다는 변화에 초점을 둔다. 따라서 '모든 도시는 집중과 분산 사이를 끊임없이 순환할 것이다. (p. 297)' 라는 관점에서 보면 '사라진 도시'는 하나도 없는 셈이다.

차탈회윅, 폼페이, 앙코르, 카호키아 같은 곳들의 극적인 도시사를 되돌아보면 수백 년에 걸쳐 나타난 확장과 폐기의 패턴을 볼 수 있다. (p. 319) 도시의 인구 감소가 그 원인과 결과는 다르지만 모두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인간이 만든 거대한 기반시설을 관리하는 골치 아픈 문제로 인해 촉발된 것이었다. 인간 자체를 관리하는 일은 더욱 큰 문제였다. (p. 320) 그렇긴 하지만 좋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도시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역사 속의 증거는 많다. (p. 321) 도시에 살던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도시가 사라진 적은 없었다. 도시는 우리의 상상 속에, 우리 공적인 땅 위에 계속 살아 있다. (중략) 천 년이 지나도 우리는 여전히 도시 실험에 매진하고 있을 것이다. (p. 325) -에필로그 中-

저자는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는 아니었지만 글쟁이답게 가독성 높은 르포르타주를 써냈다. 소설을 읽듯 4개 도시생활을 가상으로 체험하고 나면 역사를 읽은 줄 몰랐는데 역사를 읽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역사는 가르쳐준다. 사라진 도시를 통해, 도시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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