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허리 가우디의 뼈 - 탐정이 된 의사, 역사 속 천재들을 진찰하다
이지환 지음 / 부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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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과 추리의 눈으로 바라본 뜻밖의 인물사

셜록처럼 치밀하고 세익스피어처럼 유려하게

역사를 읽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재미있는 건 아무래도 소설적 구성을 곁들인 인물사일 것같다. 저자는 정형외과 의사이지만 어려서부터 다방면에 호기심이 많았다고 한다. 본업인 의학이 대중에게 보다 더 친근해질수 있도록 다양한 학문과 접목하기 위해 노력중인데 이 책은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 중 하나라고 한다.

의학은 한 편의 추리다. 의사는 통증이라는 사건을 안긴 가해자 질병을 탐정처럼 수색해 나간다. (p. 6) 사실, 모든 의사는 홈스의 후배다. 셜록 홈스를 탄생시킨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은 의사였고 그가 취직한 병원은 한산했다. 덕분에 부업으로 글을 쓸 수 있었다. (중략) 코넌 도일은 스승 조지프 벨 박사를 떠올렸다. 박사는 의미 없어 보이는 사건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동료들이 진단을 내리지 못해 쩔쩔맬 때 박사는 어김없이 등장해 질병을 밝혀냈다. (p. 7) -들어가는 말 中-

읽고 보니 정말 그렇다. 의학은 한 편의 추리다. 여러가지 증상을 통해 병명을 유추해나가는 과정은 흡사 범인을 색출하는 추리의 과정과 비슷해보인다. 게다가 아서 코난 도일에게 영감을 준 조지프 벨 박사의 일화를 읽고보니 셜록 홈스가 따로 없다. 저자또한 셜록 홈스가 된 것 마냥 질병을 추적해 나간다. 환자로는 우리에게 익숙한 다방면의 위인들이다. 위인들이 앓았던 질병을 추리해나가는 과정은 역사를 읽듯 사건을 해결하듯 흥미진진해서 독자도 탐정이 된 듯 술술 읽게 된다. 추리의 시작은 항상 질문이다.

세종은 왜 운동을 싫어했을까?

가우디는 왜 해골집을 지었을까?

도스토엡스키는 어쩌다 도박꾼이 되었을까?

모차르트의 사인이 정말 질투일까?

로트레크는 왜 난쟁이로 태어났을까?

니체는 어쩌다 정신병원에 입원했을까?

모네가 말면에 그린 그림이 추상화처럼 변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프리다는 왜 자신을 붉은 과일로 표현했을까?

퀴리는 방사능의 위험을 몰랐을까?

말리는 왜 자신의 피부암을 방치했을까?

질문을 던지고 나면 정말로 궁금해진다. 알고 있었던 것들도 질문에 의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그렇네 이상하네 왜그랬지 하면서.

질문에 대해 저자는 단번에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추리라는 것이 이런저런 단서들로 몇번의 시행착오 끝에 얻어지는 결론이듯이 위인들의 질병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다른 가설들을 먼저 알려준다. 그러한 미끼들은 질문에 대한 확신을 더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세종의 유일한 약점이라면 운동을 꺼렸다는 점, 하나다. (중략) 사람들은 세종을 '고기를 좋아하지만 운동은 하지 않아 결국 비만한 몸을 갖게 된 왕'이라고 생각한다. 세종은 완벽주의자다. 관심을 갖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 그런 세종이 단순히 '하기 싫어서' 운동을 피했을까? (p. 16)

도스토옙스키는 방탕한 노름꾼과는 다르다. 그는 뱀장어 일당에게 조종당한 가여운 먹잇감이었다. (p. 67) 그는 자신의 이중성에 괴로했다. (중략) 초대받지 못한 전기 뱀장어는 도스토엡스키의 뇌 어디에 자리를 잡고 있을까. (p. 68)

모차르트의 죽음에 대한 보고는 상당히 과장됐다. 누구도 모차르트를 살해하지 않았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독살하지 않았고 프란츠는 악의로 장송곡을 의뢰하지 않았다. 죄 없는 이를 희생시키는 거짓 시나리오는 폐기하자. 이제, 진범을 찾을 시간이다. (p. 96)

주로 질병을 추적하는 과정이지만 때론 뜻밖의 상식을 때론 의외로 멋진 문장을 만나는 재미도 있었다.

몽마르트는 '순교자의 산'이라는 뜻이다. 가난한 이화 쫓겨난 예술가는 순교자의 산에서 삶을 이어 갔다. 이들을 먹여 살릴 상권은 술집과 사창가뿐이었다. 세탁업을 하던 어머니는 빨간 속옷을 입고 술집에서 캉캉 춤을 췄고, 교회를 다니던 방앗간 주인은 헌금을 낼 돈으로 풍차를 개조해 카바레를 열었다. 순교자의 산은 어느덧 성공한 파리 사람들이 마차를 타고 놀러 와 욕망을 분출하는 하수구로 변모했다. (p. 139)

니체는 소년 시절 신을 떠난 모양새로 바그너를 등진다. 어려운 결정을 내린 니체는 육체의 약화까지 감내해야 했다. (중략) 니체는 교수직을 내려놓고 여행을 떠난다. (p. 149) 이무렵 니체의 글은 사뭇 따뜻해진다. 신과 예술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은 통증과 함께 인간계로 내려왔다. (중략) 니체는 인간을 때리는 신의 채찍을 뺏으며 너무나 인간적인 선언을 한다. "우리는 그렇게 영리한 동물이 아니다. 전통적인 도덕을 위해 가축처럼 스스로 훈육할 필요가 없다." (p. 150) 매독이 니체의 뇌를 손상시켜 정신병이 발생했다는 그의 주장은 '나는 뇌신경 학파다'라는 맥락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 (p. 154)

빅뱅 이론은 '우주가 거대한 폭발 뒤에 팽창했다니. 마치 덩치 큰Big 근육질 스트리퍼가 생일 파티에 빵Bang 하고 깜짝 등장하는 것과 비슷하군요" 라며 비꼰 말에서 따왔다. (p. 167)

실험을 시작하고 꼬박 4년 만인 1902년, 부부는 염화라듐 0.1그램을 추출한다. 이만큼을 얻기 위해 8톤의 역청 우라늄과 400톤 이상의 물이 필요했다. (p. 243)

1900년대 의사들은 치료 허무주의에 빠져 있었다. 선배들 덕분에 감염병이 세균 때문이고 류머티즘 질환이 면역 체계 문제라는 건 알았다. (중략) 그렇지만 알면 뭐하나? 환자를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외과 의사들은 차가운 칼을 쥐고 암 덩어리를 적출이라도 할 수 이싿. 하지만 내과 의사는 감염병 환자에게 '당신의 병은 결핵입니다' 라고 진단하고, 환자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물으면, 앵무새처럼 '좋은 공기를 쐬고 식사를 챙겨 드세요'정도의 말밖에 못했다. 허무할 따름이다. (p. 247)

책속에는 참고 그림이나 사진이 종종 등장하는데 212p의 <디에고와 프리다>사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프리다의 유명세만큼 프리다의 자화상 그림은 여러점 본 적 있다. 사진도 몇 장 봤던 것 같다. 하지만 자화상 속의 프리다는 너무 참혹하거나 너무 거대했고 사진은 환자의 모습인 것 뿐이었다. 그런데 이 책속에 나온 사진은 프리다의 풋풋하면서 강인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거대한 덩치의 디에고 옆에 너무나 여리여리한 체구로 앉아 있는 프리다가 너무 예뻐서 슬펐다.

우리는 초등학교 졸업, 대학교 입학, 결혼, 출산과 같은 굵직한 이벤트가 모여 삶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큰 사건을 와 닿게 하는 것은 사소함이 아닐까. 삶이란 뭉뚝한 사건의 분탕질 속에 부지런히 적응한 사소함일지 모른다. '삶도 사소함에 깃든다'

이 책은 천재들의 사소함에 주목했고, 사소함을 관찰해 병을 진단해 냈다. 왜 세종은 운동을 기피했으며 말리는 죽을 때까지 암을 방치했는지, 모두 사소함에 주목한 질문들이다. 우리는 손톱같은 사소함을 관찰했기에 그들의 숨겨진 삶을 엿볼 수 있었다. 진단은 사소함에 주목하는 시선이다. 이 시선에는 원인을 밝히겠다는 철저함과 환자를 대하는 따듯함이 함께한다. (p. 284) -나가는 말 中-

저자는 '의사는 손톱을 기르지 않는다' 고 말한다. 수술을 하려면 손톱이 짧아야 하기에 이삼일에 한번은 손톱을 깎는다고 한다. 이런 섬세함이 습관이 된 의사는 환자의 사소함을 놓치지 않고 병을 진단해내는가 보다. 의사들에 대한 기억이 별로 좋은 게 없었는데 저자와 같은 마인드의 의사라면 신뢰가 절로 우러날것 같다. '얼핏 고루하고 빡빡할 것 같은 의학은 사실 이렇게나 역동적인 학문이다. 관심이 생기는가? 그렇다면 이 책은 충분히 성공했다. (p. 286)' 라는 저자의 소박한 바람은 책을 읽는 내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역사를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의학으로 마무리된, 여러모로 유용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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