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 - 알고 보면 가깝고, 가까울수록 즐거운 그림 속 철학 이야기
이진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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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가깝고, 가까울수록 즐거운 그림 속 철학 이야기

미술도 처음, 철학도 처음이라면

그림 앞에서 할 수 있는 세상의 모든 생각

정치철학을 박사과정까지 공부하고 철학과 육아를 버무린 책을 쓰며 독일 맥주가 삶의 원동력이라는 저자의 두번째 책인 이 책은 그동안 저자가 미술관에 놀러다니며 느꼈던 것들과 그동안 저자가 학교에서 배우며 공부했던 것들을 엮어서 한껏 잘 차려놓은 잔치상 같은 책이다. 뷔페처럼 골라 먹어도(읽어도)되고 한식처럼 하나씩 맛봐도(읽어도)되지만 나는 (요새 내게 너무 필요한) 주안상을 받은 듯 술처럼 마시고 안주처럼 먹었다(읽었다).

앞으로 이어질 여러 편의 글은 이렇게 조금은 난해할 수 있는 철학적 개념을 좀 더 쉽게 머릿소에서 재생시킬 수 있는 스위치 같은 예술 작품을 골라서, 눈으로 보면서 생각해보는 놀이입니다. 즉 미술에 철학을 올려놓고 싸 먹는 쌈이 될 겁니다. 맛있었으면 좋겠는데 맛이 없을까 봐 걱정입니다. (p. 8) 이 책은 사실 학생 때부터 가장 쓰고 싶었던 것으로, 마음속에 아주 오래 묵혀뒀던 아이디어들입니다. 미술도 철학도 어렵다고 생각해서 살짝 도망치고 싶은 분들께 수줍게 권하고 싶습니다. 저도 노는 겁니다. 같이 놀아요. (p. 9) - 들어가는 말 中 -

13편의 글 속에 그 배가 넘는 철학개념들이 있고 또 그 배가 넘는 그림들이 등장한다. 때로는 철학적 개념이지만 때로는 현실이나 삶 그 자체이기도 했다. 철학자의 책도 어렵고 미술가의 책도 어렵지만 그 둘이 중간 어딘가에서 만난 이 책은 미술사적이지 않고 피상적이지 않아서 좋았다. 철학도 미술도 다 구체적이라 좋았다.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올해 내게 가장 큰 인상을 남겨주었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라는 그림으로 시작해서 더 좋았다. 그런데 이 그림이 니체 철학과 연결될 줄이야 ㅎㅎㅎ

통상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모습, 즉 신에게 가 닿으려고 간절히 염원하는 인간과 그를 부드럽게 포용하는 신의 모습이 아니다. 아무리 보아도 유유자적한 쪽은 아담이고 의지와 열망이 강하게 느껴지는 쪽은 신이다. (중략) 미켈란젤로는 신과 그가 창조한 첫번째 인간이 만나는 순간을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 (p. 19)

그 유명한 그림 <천지창조> 이고 특별전까지 가서 유심히 봤던 그림이었기에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신과 인간의 손가락만 클로즈업 해서 보여졌을때 어느쪽이 신이고 어느쪽이 인간이었더라 라는 방향을 생각하기에 앞서 손가락의 모양만으로는 직감적으로 무심한듯 내민 손이 신이고 손가락 하나라도 길게 뻗어 닿으려 애쓰는 손이 인간의 손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한두번 본것도 아닌 이 그림에 대해 이렇게 또한번 놀라게 될 줄이야!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무지와 신의 열망을 니체가 철학으로 풀어냈을 줄이야.

니체는 허무주의로 알려져 있지만 인간 삶의 험함을 가차 없이 폭로한 데서 허무주의라는 이름을 얻은 것을 뿐, 그 허무를 껴안고 계속 전진할 것을 주문하기 때문에 사실 허무주의를 한 차원 뛰어넘는 인물이다. 허무주의자가 아니고 허무주의를 극복하자는 사람이다. 그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염세의 철학이 아니라 긍정의 철학이다. (p. 27)

철학을 공부한 적도 없고 철학에 대해 아는 것도 없지만 들은 소리로는 철학책을 읽을 대 니체의 책을 가장 나중에 읽으라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니체의 철학은 다른 철학들이 애써 쌓아놓은 공든 탑을 허물어버릴 만큼 강력한 염세적 허무주의를 깨닫게 하는 철학이라고 들었었기에 어쩌다 가끔 철학대중서를 읽을 때도 니체의 책은 조심스레 건너뛰곤 했었다. 그러다 올해 어쩌다보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을 읽게됐는데 다 읽고 나서 허무하긴 했지만 '허무주의'가 느껴지진 않았다. 어른을 위한 동화처럼 우화처럼 쓰인 이 책은 내게 약간은 구도자의 책처럼 읽혔고 약간은 열렬한 사상가의 책처럼 읽혔다. 그 에너지가 넘쳐나서 전혀 허무스럽지 않았다. 그런데 원래 니체 철학이 염세의 철학이 아니라 긍정의 철학이었구나...wow

군자불기는 동양철학의 고전인 <논어>의 <위정>편에 나오는 말로,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라는 간단한 해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p. 40) 군자불기는 막스 베버가 말한 '영혼 없는 전문가'와도 맥이 닿는 말이다. 군자가 도구나 부품 같은 존재가 아니라 막힌 곳 없이 두루두루 통하는 인물이어야 한다는 말은, 곧 영혼 없는 전문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p. 43) 쓰임새와 크기가 정해진 것은 군자가 아니다. 안팎을 구분하는 단단한 경계가 있고 한정된 양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군자가 아니다. 하지만 리카 반도의 작품 속 메이슨 자를 보면서 나는 군자가 이 유리병 같은 사람이면 어떨까 생각한다. (p. 46)

동서양의 철학을 넘나들고 동서양의 그림을 넘나드는 이 책은 그 다양한 폭 만큼 생각의 넓이도 넓었기에 가끔 검색찬스가 필요하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하지만 내가 검색한 것은 '군자불기'라는 논어의 구절도 아니고 '영혼 없는 전문가' 라는 막스 베버의 철학도 아니었다. 내가 검색한 것은 '메이슨 자' 였다. 메이슨 자가 뭐지??;;; 익숙한 유리병이었지만 메이슨 자라고 하니 생소했다. 아직은 철학도 그림도 내게 이 메이슨 자 같은 것이라서 그러려나...

책가도는 책가, 즉 서가를 그린 그림이고 책거리는 서가가 있든 없든 책을 중심으로 그린 그림이다. (p. 55) 책거리는 가장 한국적인 정물로 통한다. 외국 명화들 속에도 책이 더러 등장하지만, 우리처럼 책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모습을 그려 약2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왕부터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즐겼던 나라는 없는 듯하다. 그만큼 우리는 책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온 사람들이다. (p. 59) 책거리에 담긴 사물들을 보며 떠오르는 개념은 가치 다원주의다. (p. 66)

나는 책가도도 책거리도 좋다. 외국의 호기심캐비닛이나 장식장을 그린 그림들도 보기 좋지만 병풍 가득 책만 그려져 있어도 잡동사니 속에 책이 쌓여있어도 나는 책이 많은 그림이 좋다. 저자의 말마따나 우리나라가 이토록 책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온 사람들인데 출판시장이 힘들다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다. 여하튼 이렇게 애정어린 책과 함께 풀어지는 철학개념은 책장이 술술 넘어가듯 쏙쏙 이해가 된다. 철학을 공부하게 하는 책이 아니라 철학을 그림처럼 음미하게 하는 책이다.

나에게 '사과 하면 홉스'인 것은 단지 내가 홉스의 사회계약론을 배울 때 자연상태의 개념을 사과로 배웠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렇게 파악한 개념들을, 사과를 그린 작품 두 점을 보며 풀어보겠다. (p. 75)

국가의 형성이나 사회계약 관련한 것을 공부할때 중고등학교 교과서엔 홉스, 로크, 루소 3명이 비교대조 설명된다. 저자도 이 3명을 통해 그 개념들을 설명하는데 저자가 보여준 그림을 본 순간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었다. 아~ 자연상태의 차이~가 아~ 하고. ㅎㅎ 그리고 홉스와 로크에 비해 좀더 상세히 설명되는 루소의 사상을 깨닫게 하는 파울 클레의 그림엔 실소를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들이 무슨 이유로 모여 살게 되는지에 더 관심이 있었던 홉스와 로크에 반해, 루소는 인간이 모여 살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더 관심이 있었다. (p. 96) 홉스와 로크는 공통적으로 인간이 사회계약을 통해 보다 더 나은, 진보된 상태로 나아간다고 믿었다. 하지만 루소는 정반대로 인간들이 맺는 사회계약은 스스로 노예가 되겠다는 서명에 불과한, 더 나빠지는 상태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p. 101) 다시 새로운 계약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 루소의 답이다. (p. 102)

인간들이 모여살아야 서로에게 더 유익하다는 것을 전제하는 홉스와 로크는 왜 모여살게 되었는가 라는 기초적 자연상태에 질문을 던지지만 인간들이 모여살아야 한다는 것이 기본인 루소에게는 어떻게 모여살아야 좋을까 라는 삶의 형태에 질문을 던진다. 기원을 올라가는 철학도 이상향을 추구하는 철학도 다 철학답지만 그 뜬구름 같은 철학을 그림을 봄으로써 현재에 시선을 둘 수 있었다. 읽을수록 참 묘한 조합이다 싶으면서도 신선했다.

미래주의 미학은 결국 이탈리아 파시즘과 결합하게 된다. 과거를 증오하고 미래를 사랑하자는 파괴적인 생각은 결국 미술의 영역에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옳고 그름의 구분'을 예술에 덧대고자 했다. (p. 122) 아름다움의 영역에도 옳지 못한 것, 청산해야 할 것이 있다는 생각, 그렇게 힘과 속도와 기계를 찬양했던 미래주의는 결국 '약하고 부드러운 것에 대한 구토와 혐오'라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가던 파시즘과 악수를 나누게 된다. (p. 123)

형이상학적 철학을 구체적 그림으로 느끼게 되기도 하지만, 미학이 너무 정치성을 띠게 될때 그 미학은 결국 미학이 아니게 된다. '우리는 어떤 정치적 메시지가 문화의 탈을 쓰고 들어올 때를 특히 경계해야 한다. 그래서 그림을 보면서도 끊임없이 생각을 해야 한다. (p. 125)' 철학과 그림이 이래서 조화로울 수 있었나 보다. 둘다 우리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

저자는 오만원권의 뒤에 있는 그림 '월매도'와 '풍죽도' 에 대해서 여백을 없애고 달을 내려뜨린 그 합성그림에 대해서 '우리는 그렇게 달이 추락한 그림이 든 지폐로 오늘도 기술을 사고 여유를 팔고 유행을 먹고 낭만을 마신다. (p. 129)' 며 씁쓸해한다. 나는 이렇게 일상속 그림에 대해서까진 관심을 가져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림은 미술관이나 책을 통해 보는 것이지 일상 곳곳의 사물에 혹은 다른 곳에 그려진 것을 보면서 '그림'이라고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림이 이렇듯 일상 가까이 여기저기에 들어와 있듯이 철학도 우리의 생활 곳곳에 들어와 있는게 아닐까.

학문의 승리를 그리랬더니 승리는 무슨, 주제 파악을 잘하자는 그림을 그려 온 클림트를 보고 아마 교수들은 <철학>에 등장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머리를 싸맸을 것 같다. (중략) 교수들은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해 학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며 클림트를 비판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들보다 학문의 본질을 더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클림트였다. 학문이 보일 수 있는 위선이라든가, 학문이 가지는 명확한 한계까지 덤덤이 포괄한 그림들이었던 것이다. 인간을 겸허하게 만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진토록 하는 그림들이다. 대학이 무조건적으로 학문을 찬양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p. 139)

오스트리아 빈 대학 천장에 배치할 그림 3점을 클림트에게 요청했었다고 한다. 주제는 철학, 의학, 법학 3가지. 그런데 클림트가 가져온 결과물은 엄청난 반대에 부딪혀 결국 당시에 걸리지 못했고 분개한 클림트는 받은 돈을 돌려주고 그림을 찾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클림트의 명성이 높아지자 세계대전 당시 화재를 당한 이 그림의 스케치와 사진을 통해 복원한 그림은 지금 흑백복사본으로 제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클림트의 화려한 색감은 볼수 없지만 그림의 내용은 분명 클림트가 학문의 본질을 제대로 꿰뚫고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는 듯 보였다. 클림트의 화려함만 알았던 내게 클림트의 깊이를 알게 해준 저자는 아렌트와 동시대 철학자였던 주디스 슈클라 라는 뛰어난 여성철학자도 소개해주었다. 슈클라는 그 유명한 철학자 존 롤스의 정의론에 맞장을 떴던 여성 철학자였다.

이런 슈클라의 주장은 앞서 본 클림트의 천장화 시리즈와 매력적인 접점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클림트의 그림들을 보면서 슈클라의 '공포(로부터)의 자유쥬의'를 떠올렸다. 우리가 자유의 개념을 이해하고 증진시키려면 자유 그 자체보다는 공포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자, 슈클라의 그 유명한 논문 제목이다. 자유를 위해서는 공포에 시선을 두어야 하듯 철학은 모호함을 통해, 의학은 죽음을 통해, 법과 정의는 죄와 불의를 통해 그 본질이 더 잘 드러나는 법이다. (p. 147)

이 책은 읽다보면 은근히 다음 주제로 물흐르듯 연결되는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그러니 '정의'에 대해 논하고 난 후에 정의의 여신 에 대해 이야기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정의의 여신상 이야기는 당연히 '정의'에 대한 철학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우리나라 법무연수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이 들고 있는 칼은 아무리 보아도 양날이 아닌 외날인데, 고전미를 부각하려는 취지에서 전통적 냄새가 물씬 나는 도검을 선택하다 보니 그 안에 들어 있어야 할 소중한 알맹이를 놓치게 된 것 같아 아쉽다. (p. 165)' 라는 문장에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정의와 양날의 칼에 대한 연결과 설명은 이해하지만 우리나라에 세워진 정의의 여신상이 반드시 양날의 칼을 쥐고 있어야 하는걸까? 양날의 칼은 위험성을 경고하지만 외검은 칼날로 한번에 베지 않고 칼등으로 한번 더 기회를 주는 온건함이 있다고 볼수도 있지 않을까? 어느 영화에서였더라... 사극이었는데 두 원수가 격렬하게 칼부림을 하다가 한명이 칼날로 이기려는 순간 적의 목에 닿은 것은 칼날이 아니라 칼등이었고 두 원수는 대를 이어온 살육을 멈추게 됐었다. 그 이후로 칼에는 칼날만 있는 것보다 칼등도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꽤 괜찮은 것이었구나 라는 나름의 깨달음을 간직하게 됐다. 그러니 다른나라도 아니고 우리나라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에는 서양의 시퍼런 양날의 검이 아니라 칼등과 칼날이 함께 있는 외검을 쥐고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클레가 남긴 말 중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라는 말이 철학과 클레 작품들 사이의 매력적인 관계를 드러내는 정수라고 생각한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우리 주변에, 우리 생각 속에 존재하는 관념들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것, 이런 클레의 예술관은 바로 내가 쓰고 있는 이 책의 의도를 관통하기도 한다. 관념을 눈에 보이게 하는 작품들, 사람들에게 물음표를 띄우고 사유하게 만드는 작품들. 그래서 나는 클레가 그렇게 좋았던 것 같다. (p. 195)

그래서 이 책속에 클레의 그림이 자주 등장했었나 보다. 저자가 가장 좋아한다는 화가 파울 클레의 그림을 나는 그동안 자주 보진 못했지만 저자의 철학들과 함께 읽다보니 그 매력이 배가되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파울 클레의 그림들을 좀 잔뜩 봐야 겠다. 책으로나마 ^^;;;

골방에 갇혀 쉴 새 없이 수많은 매듭을 짓다 보면 눈이 혹사당하기 일쑤였고, 카펫을 완성하고 나면 아이들은 대체로 시력을 잃었다는 것이다. 우표만 한 면적에 백 개의 매듭이 들어갔으니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직업은 꽤 선호되는 직종이었는데, 몸이 부서지고 착취당해도 나와 내 가족이 평생 먹고살 만한 돈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시력을 잃어가며 말랑말랑한 손가락을 놀렸을 태피스트리 짜는 소녀들. (p. 261)

그림보다 더 그림같은 태피스트리를 보며 그저 감탄스럽곤 했다. 어떻게 저렇게 실로 그림보다 더 정교한 그림을 짜낼 수가 있는지 신기해하면서도 그 안에 숨은 노고는 미처 몰랐다. 그저 당시 여성들의 손재주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가느다란 실로 매듭을 지어 만드는 태피스트리는 어른의 손이 아닌 어린 소녀들의 작은 손들이 그 노동이 들어가 있었다. 설국열차의 제일 앞칸 장면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나부터도 미술작품을 볼 때만큼은 그저 이런저런 생각 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감각을 즐기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대체로 감탄할 준비를 하고 간다는 바로 그 지점이 우리의 눈을 가릴 수 있다. (중략) 우리가 다소 무방비적으로 감상하러 가는 작품들 안에 제법 그늘이 많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즐기는 편이 나와 그 작품 간의 좀 더 입체적인 만남이 아닐까. (p. 271)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했던가 나는 그저 내눈에 이쁘고 내마음에 흡족한 것만 보려고 했었던 것 같다. 그림은 그저 휴식처 같은 의미였다. 보기에 불편한 그림은 굳이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림도 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철학이 던지는 질문이 모호할때 그림은 구체적으로 깨닫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으로 경험한 바, 보고싶지 않은 그림을 보며 애써 덮어두었던 생각들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다. 예쁜 그림은 그나름대로 예쁘지 않은 그림도 그나름대로 다 누군가 봐주길 기다렸겠구나 싶었다.

이토록 건강하게 빛나는 아이들, 하루하루 온몸으로 삶의 찬가를 부르는 아이들에게 주목한 철학자가 있다. 두텁게 드리워졌던 근대의 커튼을 열어젖혀 현대라는 무대에 조명을 비추기 시작한 인물, 바로 니체다. 가끔 생각한다. 계몽과 진보라는 시대정신이 우산처럼 씌워져 있던 근대는 어쩐지 부모 같고, 그게 싫다고 우산을 팽개치고 뛰쳐나간 현대는 알록달록한 아이들 같다고. (p. 280)

니체의 인간형은 뭔가 일반 대중과는 다른 사람, 엄청난 능력을 가진 사람, 무리에게서 떨어져 홀로 고독하게 살아가는 수행자 같은 느낌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오해다. 위버멘쉬는 누구보다 다른 이들과 함께 가는 인간형이다. (p. 284)

어떻게 보면 이 책은 니체로 시작해서 니체로 끝나는 책이었다. 하지만 저자가 알려주는 '니체'는 천진한 아이 같다. 사실 니체도 자신의 철학에서 궁극적으로 아이의 모습을 추구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인간의 정신이 세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했다. 널리 알려진 '낙타와 사자, 그리고 어린아이'의 비유다. (p. 282) 비록 파도에 허물어지더라도 끊임없이 모래성을 쌓으며 즐거워하는 아이, 생을 온몸으로 감각하며 늘 긍정적으로 무언가를 창조하는 아이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의 전형이다. (p. 283)' 미술과 가볍게 조우하는 철학책인줄 알았더니 이렇게 니체를 가볍게 만나게 될 줄이야. ㅎㅎ

이 책에 추천사를 쓴 정여울 작가는 '이 책을 통해 그림을 사랑함으로써 철학을 더더욱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고 했고 김만권 정치철학자는 '마음이 고플 때 그의 책을 펼치면 식탁이 된다. 이 책을 읽어가는 동안 철학이 만든 온갖 맛있는 지식과 곳곳에 스며든 온기를 만날 수 잇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저자가 맥주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런지 종종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싶게 만든 이 책은 내게 일종의 술상이었다. 얼큰달큰 술술 넘어가서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마시던 술처럼 그림에 취하고 철학에 취해서 술술 넘겨 읽다보니 어느새 다 읽어버린, 그런 책이었다.

-한겨레출판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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