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트리플 8
최진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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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이란 단어보다 생존이란 단어에 익숙해진

지금 십대들의 '일주일'의 표정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가 8권이 나오기까지 어쩌다보니 이 책으로 4권을 읽은 그러니까 이 시리즈의 반을 읽은 셈인데 이 4권 중에서 <일주일>이 가장 좋았다. '작가-작품-독자의 아름다운 트리플이 일어나길 바란다'는 이 시리즈의 취지에 (내 생각에는) 가장 부합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제야 언니에게> 라는 작품으로 최진영 작가를 알게 되었다. 아픈 현실을 아프고 쓰지만 차갑지 않게 쓰는 작가라는 인상을 갖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도 그러한 매력이 빛을 발했다.

일요일, 수요일, 금요일 이라는 제목의 3편의 단편은 각각의 단편이기도 하고 여러가지 주제로 하나로 묶이는 작품들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모두 고등학생 이라거나, 특성화고/ 특목고/ 일반고 의 이야기 한편씩 이라고 구분한다거나, 해당 사건을 겪는 주인공들에게 의미있는 요일이라거나 등등...

<일요일>

나는 겁에 질려 있다. 왜냐하면. 이유 따위 붙일 필요 없는데도 나는 여전히 이유에 집착하고 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유를 말하기 때문이다. (p. 9)

일요일은 주말이고 쉬는 날이고 휴일이다. 하지만 모두에게 그럴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어릴때부터 친구인 세 명은 일요일이면 성당에서 만났다. 종교는 큰 의미 없었다. 그들이 약속하지 않아도 일요일이면 늘상 만난다는 것이 중요했다. 일요일은 그들이 서로를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휴일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각자의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도우는 외국의 대학교에서 공부한 다음에 외국 대학교의 교수가 될 거라고 했다. 서른 살이 되기 전에 그 모든 걸 다 해낼 거라고 했다.

그러면 이긴 것 같을 거야.

도우는 이기고 싶어했다. 도우의 라이벌은 동급생이 아니라 이미 성공한 부모님이었다. 성공한 자리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자기를 내려다보는 부모님과 자존심을 걸고 싸우던 도우. 도우에게 공부는 노동이었다. (p. 19)

어서 돈을 벌고 싶었다. 부모님에게 용돈을 주고 싶었다. 내 돈으로 내가 살고 싶었다. 돈을 모아서 세계를 여행하고 싶었다. 서른 살 되기 전에 그 모든 걸 다 해내고 싶었다. 나 역시 노력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p. 21)

그러나 일요일에는 서로의 평화를 빌 수 있었다. 장난스럽게 목례하면서도 나는 도우와 민주의 평화를 진심으로 빌었다. 도우와 민주도 그랬을 것이다. 진심이었을 것이다. (p. 22)

어릴 땐 이런저런 장난을 치며 놀면 그만이었는데 그들은 어느새 고3이 되었다. 외고에 간 도우와 일반고에 간 민주 그리고 특성화고에 간 '나'는 삶의 방식이 이미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그때 미성년자 실습생승의 사고사 뉴스가 나왔다.

세상은 평평하지 않고 울퉁불퉁하다. 누구는 웅덩이에 있고 누구는 언덕에 있다. 각자 다른 세상에서 어쨌든 노력하며 아무튼 불공평하게 살고 있다. 그러니 제발 세상이 좋아졌다느니 젊은 애들이 문제라느니 그런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p. 26)

<수요일>

지형의 보호자가 조심스럽게 펼쳐서 보여준 종이에는 지형의 비밀문자가 적혀 있었다. 보호자가 물었다. 너는 이게 대체 뭔지 알고 있니.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p. 53)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모인 특목고에서도 등급은 나뉘기 마련이다. 1등이 있으면 꼴등이 있고 적응하는 이가 있으면 부적응하는 이도 있기 마련이다. 공부도 잘했고 적응도 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지형이가 사라졌다.

지형의 보호자가 종이를 접으며 말했다. 애 아빠는 지금 굉장히 화가 나 있어. 이걸 애들 장난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이건 장난이 아니야. 우리 지형이는 부모를 상대로 이런 장난을 치는 애가 아니야. '서영광'이라는 사람에 대해 지형은 가끔 이야기 했다. (p. 54)

지형은 장난을 좋아했다. (p. 55) 어쨌든 장난의 끝에서는 웃기 위해 지형은 (치밀하게) 장난을 치는 편이었다. 숨거나 숨기거나 갑자기 튀어나오거나 아픈 척하는 건 가벼운 장난. 진실인지 거짓인지 오직 지형만이 알고 있기에 섣불리 화를 내거나 안심할 수 없어서 오직 지형의 말을 믿고 지형이 웃으면 따라 웃을 수밖에 없는 건 (몽유병과 악몽, 상처와 흉터,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는 기사가 증거로 제시되는 사건들에 대한 증언 등) 지독한 장난. (p. 56)

'멀지 않은 도시의 공장에서 미성년자 실습생이 사고로 죽었다는 짧은 기사를 보여주면서, 지형은 그 아이의 장례식장에 다녀왔다고 했다. 죽은 아이가 자기 친구라고 했다. 학교 근처의 아파트에서 또래 아이가 학대를 당하다가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도 지형은 말했다. 그건 뜬소문이 아니라고, 자살한 아이는 자기의 옛 친구이며 또 다른 친구를 통해 소문이 진짜라는 말을 전해들었다고 했다. (p. 56)' 지형은 자신만의 문자를 만들어 기록할 정도로 독특한 아이였지만 친구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첫사랑 경험도 있는 어떻게 보면 꿈많고 노력파인 고등학생이었다. 자신을 억압하는 아버지를 그저 서영광 이라고 저장하고 자신과 소통이 되지 않는 어머니를 그저 보호자 라고 저장해 놓았지만 친구들에게만큼은 자신을 보여주는 진심이 있는 아이였다. 그런데 지형이가 사라졌고 보호자가 '나'를 찾아왔다. 부모가 절대 암호를 풀수 없었던 핸드폰을 초기화해서 버젓이 책상위에 놓고 사라졌다. 그 핸드폰엔 '나'에게 보낸 문자 하나만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형의 문자를 알지 못한다. 지형의 '장난'일까 아닐까.

하루에 청소년 스물 세명이 자살한대요. 우리나라에서. 아줌마는 그런 얘기 들어본 적 있어요?

얘, 우리나라 인구가 5천만이 넘어. 어림잡아서 하루에 천 명 가까이 죽고 태어난다고 치자. 그중 스물 세명이면 1프로도 안 되는 거야. (p. 78)

지형을 구렁텅이에서 어서 꺼내주려고 나는 말했다. 네 탓 아니야. 우리중에 성적 스트레스 없은 애가 어디 있어. 근데 걔는 그걸 네 탓으로 돌리고 싶었떤 거야. 그래서 너한테 들러붙은 거야. 솔직히 네가 틀린 말 한 거 아니잖아. 그런 애들 걸리적거리잖아. 영주처럼 나약한 애는 언제 죽어도 죽었을 거야.

아줌마는 아무것도 몰라요. 영주는 죽고 지형이는 사라졌어요. 그게 무슨 의미겠어요?

아줌마는 어떻게 확신해요? 지형이는 절대 스물 세명에 포함될리 없다고? 지형이가 그렇게 특별해요? 왜 지형이만 특별해요? (p. 84)

'나'는 지형이의 베스트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지형에겐 늘 '나'말고도 다른 이들이 있었다. 지형이만의 문자를 보여준 것도 '나'에게는 두번째 였다. 하지만 중요한건 이제 정말 중요한건 이런게 아니다. 지형이가 사라졌고 지형이만의 문자를 '나'는 해독하지 못하지만 지형이는 아마 돌아올 것이었다. 다만 '나'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었다. '나는 1프로에 속하고 싶었다. 1프로도 안 되는 존재에 속하고 싶진 않았다. 이런 내 마음이 거짓일까 봐 두려웠다. (p.86)' 세상에서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1프로의 존재와 아무나 올라갈 수 없는 저 위 아득한 곳의 1프로, 세상이 그렇게 양 끝 1프로씩 2프로만 있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그 끝 2프로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너무나 다르게 너무나 다르게. 우리는 그 사이 98퍼센트의 세상에 대해 좀더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2프로가 98프로의 세상을 잠식하지 못하게 98프로의 세상이 2프로의 세상을 감싸 안을 수 있게 이야기해봐야 하지 않을까...

<금요일>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가방을 싸 들고 교실을 나오기 직전에, 아니, 가방을 싸기 직전에 나를 떠민 생각은 '도저히 못 봐주겠다' 였다. 이젠 진짜 이곳을 견딜 수가 없다는 생각. 당장 벗어나지 않으면 폭발해버릴 것만 같았다. (p.89)

특성화고, 특목고 의 이야기가 너무 딴세상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반고의 이야기라고 해서 그닥 나을 것은 없었다. 일반고에 다니는 아이들 중 과연 얼마나 학교에 정말 가고싶어서 갈까? '나'는 학교를 더이상 다니고 싶지 않았다. 고2가 될때까지 다닌 10년 도 너무 길었다.

여름방학 끝날 무렵 엄마에게 처음으로 말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엄마는 이유를 물었고 나는 학교가 너무 싫어, 라고 대답했다. 그건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많이 했던 말이다. 방학이 끝날 때마다, 운동회나 소풍 같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월요일마다 금요일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새벽에 눈을 떴는데, 아침이 오면 학교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자 잠이 확 깼다. 아침이 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울어버렸다. (p. 104)

자퇴하겠다고 하면 혹은 자퇴했다고 하면 무슨 문제가 있는 아이인가 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흔할 것이다. 하지만 소설속에서도 '나'는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선입견이라고. 하고 싶은 것이 뚜렷하고 계획도 차근차근 세워놨다고. 학교를 다니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나'는 어떤 분야에 특출나거나 어떤 분야에서 모자라는 학생은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모습으론 어떻게보면 그저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하지만 평범해보이는 많은 학생들이 모두 학교를 잘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후회할 수도 있는 거고 후회는 잘못이 아니야. 후회될 때는 나한테 말해야 된다. 같이 그다음을 생각할 수 있게. 알았지? (p. 127)

다행인 것은 책속에 나오는 어른이 모두 쓸모없는 인간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세번째 작품인 <금요일> 에서 '나'의 엄마는 딸의 자퇴를 계속 만류해왔으나 딸과 솔직하게 대화하고 함께 계획서를 검토한 후 결국은 허락해준다. 그리고 당부한다. 앞으로의 여정도 '함께' 하자고.

<일주일>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일주일의 각 요일별로 에피소드를 엮었다면 또다른 어떤 이야기가 나왔을까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작가-작품-독자' 라는 트리플의 삼박자로도 충분한 책이었다. 얇고 작은 책이었지만 굵고 큰 메시지를 남기는 책이었다. 무엇보다 어두운 현실을 어둡다고만 하지 않고 힘든 상황을 힘들다고만 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후회의 선택'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수 있어서 안심이 됐다. 이 아이들이 혼자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인물들의 행복을 생각하고 싶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의 바람은 터무니없거나 비윤리적이지 않다. 일찌감치 자립하는 것, 돈이나 사회적 지위가 아닌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것, 자기 인생을 자기 속도로 사는 것, 청소년이어서 불완전한 게 아니라 인간은 원래 다 불완전하다. 그래서 행복할 수도 있다. 죽음이 비극인 이유도 잊지 않고 싶다. 나는 지난날의 나에게 배우는 점이 아주 많다. 미래의 나는 오늘의 나에게 주는 것이 없다. 주는 것 없이 그저 거기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거기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을 때도 많은데... 이런 생각 또한 자만이고 오만이겠지. (p. 135)

소설이 끝나고 난 뒤 두 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한편은 작가의 것이고 한편은 작가의 제안을 받아 화답한 박정연 작가의 에세이다. 작가의 후기나 작품해설이 아닌 에세이를 읽는 것은 또다른 새로움 이었다.

청소년 소설은 아니지만 청소년 소설처럼 읽히는 이 책을 읽으며 든 생각은 라떼 꼰대가 가진 입장에 대해서 였다.

많은 어른들이 후대에게 말할때 '나때는 이렇게 힘들었는데 너희는 안힘들다' 라는 명제로 시작하다 보니 소통이 안되는 것인데, 사실 모두가 힘든 세상에서 안 힘들게 사는 세대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나때는 이래서 힘들었는데 너희는 무엇이 힘드니?' 라고 묻거나 아니면 차라리 '나때는 이런게 힘들었다' 하고 자신의 경험만 이야기 하는 것이 어떨까.

예를 들면, 나때는 국민학교때 교실에서 난로 때느라 매일 아침 당번이 석탄을 가져와야 했다 너희는 온풍기가 있으니 얼마나 편하고 좋으냐 라고 말하기 보단 너네 석탄 날로 본적 없지? 그 난로 옆에 앉은 애는 너무 따듯해서 졸고 문가에 앉은 애는 너무 추워서 졸고 그랬단다 하면 우리도 온풍기 바로 아래 앉은 애는 코막히고 머리에 뎁혀지는데 문가에 앉은 애는 발이 시렵대요 정도로 대화할 수 있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맥락없이 왠 꼰대 이야기기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청소년이 주인공인 소설을 읽고나면 늘 우리는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나 싶어 안타깝곤 했다. 게다가 최근 읽은 소설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작가가 나이들면서 변하는 게 느껴졌다. 좋게 말하면 젊었을 때의 예리함이 나이들면서 너그러워진다 이겠으나 특유의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아쉬움이 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적어도 <일주일> 이 책에서만큼은 그 넓어진 마음이 그 너그러움이 따듯하게 남아서 좋았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이들어 간다는 것은 화르륵 한때의 불꽃보다 미지근하지만 여유로운 온기를 지닐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불꽃들이 한순간에 확 꺼지지 않도록 지켜주어야 하지 않을까.

뒷말이 너무 길었는데... 여하튼, 좋은 책이었다 뭐 그런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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