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성공 - 한국은 왜 불평등한 복지국가가 되었을까?
윤홍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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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복지를 통합적으로 연구하는 한국의 대표적 학자 윤홍식 교수,

한국 복지국가를 근본적으로 다시 세울 방법을 논하다.

올해 7월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더이상 개발도상국이 아닌 선진국으로 격상되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조사결과들은 한국을 자살율이 높고 불평등이 심하며 많은 국민들이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느끼는 나라라고 말하고 있다. 그야말로 '이상한 성공'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이 성공 패러다임속에 무시되어온 복지국가에 대한 혁신적 프레임을 세울 것을 제안한다. 지금까지 한국이 온 길이 특이할 정도로 이상했다면 앞으로 나아갈 길은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면 된다고 희망을 제시한다.

<2021년 한국 사회의 울분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10명 중 6명이 만성적 울분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p. 8)

OECD에서 부정기적으로 '삶의 질' 순위를 발표하는데, 한국은 '어려울 때 의지할 친구나 친척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응답한 비율이 OECD 35개국 중 최하위였습니다. (p. 28)

독재정권이 부와 소득을 불공형하게 분배해 불평등과 빈곤이 심각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독재만 무너뜨리면 더 평등한 사회가 올 것이라고 믿었지요. (p. 34)

민주화 시대가 열렸어도 평등한 사회는 되지 않았고 '삶의 질' 조사에서는 매번 하위를 차지했으며 심지어 최근에는 과반수를 넘는 국민들이 '만성적 울분 상태'에 있다니, 1인당 GDP가 높아지고 한류를 통해 세계적 문화영향력까지 가졌다는 나라가 이룩한 그동안의 성공은 과연 어떤 성공이었던 것일까? 먼저 지금까지의 '성공'에 대해 면밀히 숙고해봐야 할 것이다.

86세대라고 불리는 1960년대생 중에 출세한 엘리트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마치 1960년대에 태어난 50대가 모두 대학을 졸업해 좋은 직장에 다니면서 높은 지위에 있고 높은 소득과 부를 독점했다고 묘사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심각한 계급 불평등을 세대 불평등으로 감추려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듭니다. (p. 40)

현재 청년들이 직면한 어려움을 세대 담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자극적이고 선동적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청년들은 '꼰대들이 문제'라고 하니 그 적이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세대 담론은 부와 특권이 세습되는 계급사회의 현실을 감추는 위험한 장막이 될 수도 있어요. 지금 청년들이 직면한 위기의 본질은 세대가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부가 대를 이어 세습되는 불평등에 있기 때문입니다. (p. 45)

일제치하에서는 일제라는 적이 분명했고 독재에서는 군부라는 적이 분명했기에 지금 현실에서도 꼰대라는 기성세대를 표적으로 삼으면 사실 이해와 설명이 쉬울 수 있다. 하지만 쉬운만큼 함정일 수도 있다. 표면적인 적을 내세워 공격의 화살을 받게 함으로써 이득을 얻는 이들은 누구일까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이 불평등의 사슬을 끊는 것은 하루하루를 어렵게 살아가는 대다수 기성세대를 적으로 돌리는 세대 간의 반목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소수의 기득권층을 제외한 특권 없는 사람들의 세대를 가로지르는 연대입니다. 문제의 본질은 세대가 아니라 부가 세습되는 새로운 신분사회니까요. (p. 45)' 각자도생인 사회가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이 시대에 그러한 삶의 방향이 과연 바람직한가에 대해 되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상생은 복지국가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너무나 기초적 마인드이다. '우리는 현재 한국 사회의 위기를 기성세대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을 넘어 왜 그런 일들이 만들어지고 고착화되었는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왜 한국 사회는 더 정의롭고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지 못했는지 질문하고 답해야 할 것 같아요. (p. 63)'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어려운 사회경제 문제에 직면한 것은 우리가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한국사회가 직면한 어려움은 세계 모든 국가가 찬양해 마지않는 성공의 결과입니다. (중략) 성공의 덫에 빠진 것이지요. 그래서 한국 사회는 자신이 직면한 실패, 위기에서 벗어나기가 더 어려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p. 63)

성공의 덫에 빠졌다는 말을 이해하려면 그동안의 성공의 발자취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대한민국의 놀라운 성공이 향기로운 술처럼 우리를 취하게 만들어 우리가 직면한 사회문제를 보지 못하게끔 가리는 역사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성공의 덫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게끔 하는 용기의 근원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p. 71)' 라고 희망을 드러낸다. 최근 읽었던 한국사회 혹은 공정이나 공평 에 대한 책들 중에서 이 책이 가장 부담없고 쉽게 술술 읽혔던 이유는 근래에 보기드문 이런 긍정적 태도와 구체적 대안제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이클샌델의 능력주의 공격이나 국내 학자의 불공정함을 내세운 정권 공격보다 훨씬 현실적이었고 훨씬 논리적이었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카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답한 것 말입니다. 그는 역사를 어떤 인물의 영웅적 서사로 해석하는 것을 '좋은 여왕 베스'학설과 다름없다고 비판했습니다. 쉽게 말해 좋은 여왕 베스 학설이란 '역사위인설'으로 불리는 것으로 한 사람의 영웅 때문에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었다는 역사관이죠. 그러면서 카는 그 '좋은 여왕 베스'학설을 '최근에 들어와서는 유행에 뒤지게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따금씩 그 흉물스러운 머리를 치켜들고 있다'라고 결론짓습니다. <역사란 무엇인가>가 1961년에 출간되었으니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이죠. 그리고 덧붙입니다. 역사를 개인의 업적에 맞추는 것은 시대라는 더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저도 카와 같은 생각입니다. 역사를 영웅들의 모헙담으로 그리는 것은 우리가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는 역사의 기본적인 역할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p. 120~121)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참 여기저기 다양하게 인용되곤 한다. 그럴때마다 어서 저 책을 읽어야하지 하면서 몇년째 책장에 고이 모셔져 있는 두꺼운 벽돌책을 노려보곤 하지만 시작이 영 어렵다;;; 여하튼, 60년 전에 이미 유행이 지났다는 그 학설이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유효하지 않나 싶다. 영웅이 되었건 악당이 되었건 한 인물에 집중해서 역사를 바라보면 그 주변인물과 그리고 대다수의 일반사람들이 무시되는 역사관이 힘을 얻게 된다.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역사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은 동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역사에 관련이 있고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의미일 것이기 때문이다. 시대를 분석함에 있어서 '나'를 함께 생각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개신교 신자가 되어야 전쟁구호물자를 받기 쉬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개신교 신자가 되었씁니다. 1950년대 초만 해도 개신교 신자는 10만 명에 불과했지만, 1950년대 말이 되면 무려 10배 이상 증가한 백만 명으로 폭증하지요. (p. 127)

한국전쟁이 남긴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그것은 한국전쟁으로 군대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선진화된 국가기구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p. 130)

1950년대에 이루어진 농지개혁으로 지주계급은 이렇게 몰락합니다. (중략) 재미있는 사실은 농지개혁이후에 전국적으로 수많은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는 점입니다. 학교법인에 귀속된 토지는 농지개혁 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지요. (p. 135)

지주는 사라지고 자본가와 농민은 정권의 충성스러운 지지자가 되었어요. 산업화와 함께 성장하면서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만들어갈 노동자 조직은 큰 타격을 입어 정권을 지지하는 어용단체가 되었습니다. 국가에 저항할 수 있는 계급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좀 과장하면 정권이 원하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p. 137)

미국의 요구는 곧 법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정부도 여러 차례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했던 것입니다. 4.19혁명 이후에 집권한 장면정권이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한 것도, 박정희 정권이 장면 정권이 수립한 계획을 가져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발표한 것도 모두 미국의 요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개발계획을 박정희 정권만의 독창적인 일로 보는 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신화에 불과합니다. (p. 140)

지금의 한국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전쟁이후부터 급격히 변화된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이 책이 역사책은 아니지만 과거의 사회흐름을 설명하는 것을 읽다보니 몰랐던 세세한 역사들을 새롭게 배울 수 있어 좋았다. 역시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현재 사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사회로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대도 국민의 관심사는 복지확대가 아니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많은 사람이 생계의 터전과 직장을 잃었을 때도, 사회복지를 전공하는 소수의 전문가와 참여연대와 같은 일부 시민단체를 제외하면, 국가가 공적 복지를 확대해야 한다는 여론은 높지 않았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과 실직자들을 위한 실업급여를 확대하라고 요구한 것은 노동자를 쉽게 해고할 수 있게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라고 압박했던 IMF이었습니다. (p. 190) 어쩌면 한국사회는 놀라운 성장을 하는 동안 개인과 가족의 안전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이 시장에서 열심히 일해서 지켜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선성장 후분배'에서의 분배도 사람들이 서로 연대하며 지켜주는 공적 복지를 확대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성장을 통해서 시장에서 개인에게 돌아가는 몫을 늘리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나와 가족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내가 번 돈이지, 국가 국민이 낸 세금으로 제공하는 복지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p. 191)

코로나이후의 사회의 어두운 면들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주는 설명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타격을 입었지만 설문조사를 해보면 자영업자, 비정규직, 청년, 중소기업을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는 데 찬성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일인당 얼마간의 돈을 주는 기본소득에 대해서는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우리사회는 지금 경제적 어려움을 개인의 몫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연대보다 공적 복지 보다 개인에 대한 일시적 기본 소득에 더 찬성하고 있는 것이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수십 년의 권위주의 정권은 한국인이 국가를 신로할 수 없게 만들었씁니다. 독재정권도 국민이 정권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세금을 걷어 복지국가를 만든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권위주의 정권은 가뜩이나 취약한 정권의 정당성을 세금을 많이 걷어 더 취약하게 만들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경제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낮은 세금은 권위주의 정권의 취약한 정당성을 보완하는 중요한 정책이었습니다. (p. 194) 국가가 나를 지켜준 경험이 거의 없는 한국인은 세금을 모든 악의 근원같이 생각했던 것이죠. (p. 197)

국민이 민간 생명보험사에 낸 돈은 1997년에 정점을 찍은 이후 감소합니다. 하지만 한국인의 민간 생명보험 사랑은 여전합니다. (중략) 국민이 국가보다 영리를 추구하는 민간 생명보험사를 더 믿는다는 것이고, 사회적 연대보다는 내가 낸 것 내가 돌려받는 '각자도생'을 더 선호한다는 것이지요.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굉장히 비합리적인 행동입니다. (p. 199)

국가가 수립된 이후로 오랜 세월 국가를 믿지 못하며 살아온 국민은 세금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국가적 복지제도는 세금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선진국이 된 한국에서 세금으로 운영되는 복지제도가 발전하지 못한 역사적 배경을 읽으며 이해가 되면서도 씁쓸하다. 저자의 계산을 읽다보면 알수있는데, 적게내는 세금으로 더 많은 혜택을 얻을 수 있음에도 사회적 불신은 많이 내고 적게 돌려받는 민간 보험사를 선택하게 하고 해왔다. 이 연장선에서 부동산 투기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믿을건 보험과 부동산 뿐이었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권위주의 정권도 건드리지 않았던 보유세 강화 방향을 거꾸로 되돌리는 정책도 시행했고, 박근혜 정부는 불로소득을 세금으로 환수할 수 있는 '개발이익환수제도'를 완전히 무력화시켰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이 부동산 규제를 강하게 하는 정부가 들어서면 5년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은 너무나 합리적이었던 것입니다. 부동산은 영원한데, 정권은 딱 5년만 참으면 되니까요. (p. 204)

1997년 IMF를 겪으면서 성장 신화가 처음으로 무너졌는데도 성장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2008년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겪고, 2020년 코로나19팬데믹이라는 전대미문의 위기를 겪었는데도 국민은 여전히 성장을 꿈꾸고 있습니다. 20~30대 청년들에게 '영끌'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주식 투자와 암호화폐의 광풍이 몰아쳤습니다. 내가 축적한 자산 말고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응할 수 있는 안전판이 없는데 집은 너무 비싸 살 수 없으니 주식이나 암호화폐에 투자해서라도 자산을 불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손잡고 연대해 함께 풀어가는 보편적 '복지 국가'가 들어설 틈은 없습니다. (p. 205)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수십 년 동안 고도성장을 지속하면서 빈곤과 불평등을 감소시킨 한국의 성공적인 산업화는 인류 역사라는 큰 틀에서 보면 '대단히, 대단히, 대단히' 이례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p. 206)' 한국의 이례적인 성장은 분명 성공이었다. 이 성공경험을 한 국민들은 지금의 위기도 지금까지처럼 '이례적인 성장'으로 해결할 수 있기를 꿈꾼다. 하지만 '기적'은 일상적으로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한번도 힘들었을 '한강의 기적'은 두번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마냥 '성장'의 꿈을 꾸며 '각자도생'으로만 살길을 찾을 것인가?

한국 경제의 모습을 '가마우지 경제'라고 합니다. (p. 220) 생산은 한국기업이 하는데, 생산에 필요한 첨단기술, 소재, 부품, 장비는 모두 외국 기업의 것이니 한국 기업이 열심히 만들어도 결국 이익은 외국 기업의 몫이라는 것이죠. (중략) 한국 산업은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역량, 즉 '개념설계'라고 부르는 혁신역량이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p. 221)

한국이 1960년대 산업화를 시작하면서 모든 자원을 기업에 몰아줄 때, 한국인은 기업의 성공이 곧 국가의 성장이고, 국가의 성공이 곧 국민의 성공이라고 믿었습니다. 권위주의 정권을 몰아내고 국민의 피와 눈물로 민주화를 이루었을 때도 그 민주화의 최대 수혜자는 국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이루고 나서 뒤돌아보니 산업화와 민주화의 최대 수혜자는 국민이 아니었습니다. (p. 222) 민주화로 권위주의 정권이 사라지마 재벌 대기업을 통제할 힘은 한국 사회 어디에도 없었어요. 서구 복지국가에서는 노동조합이 기업을 견제할 힘이 있었어요. 하지만 한국의 노동자들은 오랜 권위주의의 탄압을 겪으면서 제대로 성장할 기회를 갖지못했어요. (p. 223)

한국 기업이 최첨단 설비에 프로그래밍 할 수 없는 축적된 숙력을 갖춰야만 혁신이 가능하고 다른 국가들과 격차도 벌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노동자의 숙련을 자동화 설비로 대체하는 방식으로 성장하면서 그런 기회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겉으로 화려해 보이는 성공의 이면에는 한국이 선진국을 열심히 따라가도 그 간격이 좁혀지지 않는 '제논의 역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p. 229)

선진국이 됐다는 것은 어찌보면 성장률이 둔화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급속한 성장은 그 무엇도 안정화시키지 못하고 그저 지나쳐 달려오기만 한 셈이다. 기껏 힘들게 만들어서 외국기업 배만 불려주고 기껏 힘들게 일해서 대기업 배만 불려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른 성장을 한 것은 정말 '한강의 기적' 이었다. 하지만 그런 방식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아무리 빨리 뛰어가는 토끼도 몇걸음 앞서 출발한 거북이를 이길 수 없다는 '제논의 역설'은 한국의 미래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제 문제는 국가탓만 해서도 기업탓만 해서도 내탓만 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혁신도 사회적 합의에서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복지에 대한 개념도 그렇다.

일반적으로 선별주의는 자산과 소득이 낮은 사람들을 조사하고 선별해 지원하는 복지를 의미해요. 그런데 한국의 복지제도는 거꾸로 소득이 높고 고용이 안정적인 사람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p. 232) 신화화된 개발국가 복지체제는 한국 사회를 성장제일주의, 낮은 세금, 공적 복지와 사적 자산 축적에서 나타나는 계층간 불평등으로 대표되는 '역진적 선별성'이 강한 복지 체제를 고착화시켰어요. 그러자 한국 사회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4개의 신분으로 구분되는 '신(新)신분사회'로 분열되었습니다. (p. 239)

'결국 나와 내 가족의 안위는 내가 축적한 재산에 달려 있다는 개발국가 복지체제가 만든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은 모두가 열심히 살고 있는데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이상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p. 241)' 이 이상한 사회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은 아마도 공무원에 대한 이율배반적 태도일 것이다. '청년을 자녀로 둔 많은 부모는 자녀가 안정적인 공무원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그 부모 다수는 국가가 공무원을 늘리는 일에 반대합니다. (p. 245)' 여기서 나오는 헛웃음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한 노랫소리,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 앞으로의 미래를 저해할 더 큰 근심거리는 한국적 특수한 상황에 있었다.

반공개발국가의 엄청난 성공이 한국 사회에서 공정하게 이익을 배분하자는 주장조차 사회주의의 발상이라며 발을 붙일 수 없는 상황을 만든 것입니다. (p. 255)

1987년 한국의 민주화는 이렇게 권위주의 세력과 보수 야당의 거래를 통해 이루어지면서 1987년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학생, 재야, 노동자, 농민이 배제됩니다. 1987년 민주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헌법, 권력구조, 선거제도가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을 어렵게 만들었던 이유입니다. 다수 득표자가 승리하는 소선거구제, 결선투표없이 다수 득표자가 승리하는 대통령 선거는 권위주의 세력과 보수 야당의 기득권을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세력으로부터 지켜내는 핵심적인 제도였습니다. (p. 258)

사회경제적 이해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권위주의 세력과 부수야당이 민주화운동 세력을 배제하고 진행한 민주화가 분배 문제를 제대로 다룰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p. 259) 복지는 항상 성장 다음이었습니다. 권위주의 세력과 보수 야당 간에 타협으로 이루어진 민주화는 민주주의가 저절로 시민의 삶을 개선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해준 것이었습니다. (p. 261)

그런가 그런것이었나... 반공으로 인한 몰지각한 폄하와 왜곡은 그렇다치자 그런데 80년대 이루어낸 민주화의 속뜻은 이런 것이었다니... 뒷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성공한 사회라고 하나 성장은 멈추었고 분배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민주주의도 지켜지지 않은 사회... 암담하기만 할 이런 상황에 저자는 희망찬 목소리로 '이제 그 성공의 덫이라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p. 273)' 라고 말한다. '누구도 가보지 않은길' 을 가면 된다고 말한다. 그렇게 복지국가에 대한 제대로된 정의부터 앞으로 바꿔가야 할 것들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한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정치의 문제입니다.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은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지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회가 더 나빠지도록 방조하는 사람입니다. 정치는 좋은 사회를 만드는 시작이자 끝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복지국가를 만든다는 것은 결국 '정치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사회 비전인 것입니다. 좋은 복지국가란 좋은 정치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좋은 정치는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드는 것입니다. (p. 365)

독립적 개인,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사회, 증세, 평화와 공존, 선거제도, 기후위기에 대한 방안 등등 저자가 제시하는 다양한 개선방안들을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정치'였다. 경제적으로 힘들다고 하는 것도 사회적으로 문제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모두 '정치'로 풀어야 했다. '정치제도가 만들어져도 그 속을 채울 정치집단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정치인들이 유권자와의 공약을 지키는 경우는 공약을 지키지 않았을 대 자신을 응징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세력이 존재할 때입니다. (p. 335) 나를 대표하는 조직이 없고, 정치제도도 갖추어져 있지 않은 조건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선태지는 조금 덜 보수적인 정당과 더 보수적인 정당,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권리뿐이었죠. 선거를 통해 복지를 확대하는 '선거 동원 모델'의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직된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p. 337)' 풀뿌리 시민운동은 옛날에나 통용되던 말인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말이었다. 저자는 '촛불항쟁'에서 연대의 희망을 보았다. 촛불항쟁 또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우리가 지나온 길은 '이례적'인 경우가 참 많았다. 그러니 외국의 좋다하는 이론들이 적용될리 만무할 것도 같다. 이상한 성공이 만들어낸 이상한 사회에 살면서 이상한 실패를 겪으리라 미리 좌절하지 말자. 차라리 앞으로 갈 길도 과거에 없던 '이례적' 길이 될거라 생각하자. 그렇게 세계 어디에도 없는 이상한 복지국가를 꿈꿔보고 싶다. 그 출발은 객관적 정치판단을 할 수 있는 시민이 되는 것부터 일 것이다. 정치라면 절레절레 도리질 하는 시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관심을 갖는 '이상한' 시민이 되어보자.

-한겨레출판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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